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구름 사이로 금빛 파동이 쏟아졌다.
아델가드의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너진 탑의 석재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중력을 잃은 돌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그렸다.
도시의 모든 생명이 동작을 멈추었다.
인간의 법으로 이 세상을 통제할 자격이 있는가.
거대한 울림이 뇌벽을 직접 타격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륙 자체가 토해내는 의지의 파편이었다.
길을 걷던 노인도 쟁기를 든 농부도 얼어붙었다.
광장의 시민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돌무더기를 짚었다.
손바닥이 날카로운 단면에 찢겨 나갔다.
붉은 선을 따라 뜨거운 감각이 번졌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압력에 숨이 막혔다.
콧구멍에서 흐른 피가 턱 끝에 맺혔다.
바닥으로 떨어진 핏방울이 검게 타올랐다.
눈앞에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림자가 섰다.
그림자의 발치에서 보랏빛 사슬이 솟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발목을 옥죄었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냉기가 전신을 훑었다.
집행자라 불리는 존재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았다.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녀의 입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진공 상태에 갇혀 들리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떨며 팔을 응시했다.
그의 피부 위로 푸른 마나 회로가 돋았다.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금속 테가 손가락 끝의 열기에 달아올랐다.
입안에 고인 비릿한 액체를 삼켰다.
대륙이 던진 질문을 머릿속으로 갈무리했다.
자격이라는 단어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돌았다.
자격은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나직하게 읊조리며 법전의 첫 페이지를 폈다.
아버지가 남긴 낡은 가죽의 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신봉해온 것은 용의 권능이 아니다.
신의 자비나 기적을 바란 적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서로 맺은 투박한 약속이었다.
주변의 시민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카엘의 앞에서 낭독했던 법령의 힘이었다.
하층민들의 몸에서 푸른 빛이 배어 나왔다.
공명하는 의지가 내 발치로 모여들었다.
검은 그림자의 압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법은 지배자의 도구가 아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심장을 쥐어짜는 마나의 맥동을 받아냈다.
신체 조직이 재배열되는 통증에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돋아나려던 용의 날개를 억눌렀다.
인간의 의지로 괴물의 본능을 짓밟았다.
약속을 지키려는 평범한 이들의 용기다.
선언이 떨어지자 시민들의 눈빛이 변했다.
두려움은 어느새 경외심으로 치환되었다.
수만 명의 숨결이 거대한 기류를 만들었다.
그것은 용의 언령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개별적인 의지가 모여 형성된 질서의 파동이었다.
아이린의 가슴에 새겨진 표식이 식었다.
고대 기사단의 낙인이 온기로 변했다.
그녀는 검을 고쳐 쥐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스무스는 허공의 룬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정보의 범람을 이기지 못했다.
미세한 핏발이 서린 채로 그는 필기구를 놀렸다.
인간의 합의가 물리 법칙을 재정의하고 있었다.
하늘을 덮은 금빛 파동이 내 머리 위로 모였다.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의 진동을 빚었다.
집행자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뒤로 밀려났다.
그림자의 얼굴에 당혹감과 닮은 균열이 생겼다.
나의 오른팔에 새겨진 고대 룬어가 타올랐다.
살가죽이 타 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피하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빛의 실타래가 엮여 책의 형상을 갖추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새로운 법전의 본체였다.
종이 한 장마다 시민들의 의지가 채워졌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법전이 완성될수록 에테르 폭풍이 잦아들었다.
정적을 깨고 투명한 종소리가 도시에 울렸다.
아델가드 전역을 휘감는 장엄한 선율이었다.
나는 완성된 법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지에 닿는 순간 500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아버지가 왜 조약문을 숨겼는지 깨달았다.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 알았다.
모든 조각이 하나의 인과관계로 연결되었다.
이 법전은 봉인이 아니다.
전율하는 손으로 법전의 첫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룬 문자가 아닌 공용어가 적혀 있었다.
문장을 읽는 순간 나의 시야가 뒤집혔다.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지며 푸른 안광을 냈다.
인간의 틀을 벗어난 시야가 세상을 관통했다.
집행자가 다시 검은 사슬을 휘두르며 달렸다.
사슬 끝은 내 심장이 아닌 법전을 겨냥했다.
아이린이 앞을 막으려 했으나 밀려났다.
법전에서 뿜어져 나온 척력이 그녀를 보호했다.
오직 나만이 이 법을 집행할 권한을 가졌다.
나는 법전의 두 번째 장을 펼쳤다.
여전히 백지였으나 손가락이 지나자 글이 생겼다.
내가 현장에서 집행할 새로운 조항이었다.
대륙의 의지에 던지는 나의 최종 답변이었다.
피고, 대륙의 의지.
목소리가 닿자 집행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사슬은 녹슨 철처럼 바스러져 흩어졌다.
시민들의 푸른 회로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법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중심에 선 나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너를 법정 모독죄로 기소하겠다.
선언과 함께 황금빛 사슬이 집행자를 묶었다.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며 본래 형태를 잃었다.
무너졌던 시간의 탑 잔해들이 다시 솟았다.
집행자를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 형성되었다.
돌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꼬며 이 광경을 보았다.
그가 알던 마법 체계가 완전히 붕괴했다.
인간의 언어가 초월적 존재를 구속했다.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펜을 떨어뜨린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나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도구의 힘 없이도 세상의 흐름이 읽혔다.
모든 현상이 법적인 인과관계로 보였다.
시선은 탑 너머 드라코니아 고원을 향했다.
천공의 둥지에서 고룡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발바닥을 통해 거대한 진동이 전해졌다.
아이린이 곁으로 다가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제 끝난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법전의 마지막 장을 손으로 가렸다.
그곳에는 아직 적히지 않은 판결문이 있었다.
반드시 적어야만 하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나는 법전을 품에 안으며 지면으로 내려왔다.
광장의 시민들이 길을 열어 나를 맞이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변호사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다시 세울 입법자의 모습만 있었다.
누구도 감히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적막 속에 나의 구두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닿는 척박한 땅에서 싹이 돋았다.
마나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내리는 뿌리였다.
대지는 나의 발자국을 따라 푸르게 변했다.
죽어 있던 도시의 혈맥에 온기가 돌았다.
아직 한 명의 증인이 남았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비쳤다.
발락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고룡이었다.
태고의 기운을 두른 존재가 하강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용의 입안에서 화염이 끓어올랐다.
아델가드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열기였다.
공기가 뜨겁게 달궈져 피부가 따가웠다.
나는 법전을 허공에 띄우고 손을 들었다.
손끝에 모인 황금빛이 태양처럼 빛났다.
집행유예는 없다.
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법전이 펼쳐졌다.
백지였던 마지막 페이지에 글자가 새겨졌다.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브레스가 멈추었다.
화염은 형체를 잃고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고룡의 거대한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법전에서 뻗어 나온 빛의 줄기가 용을 덮쳤다.
하늘을 날던 거구의 짐승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굉음과 함께 성벽 너머의 대지가 흔들렸다.
먼지 구름 속에서 용의 처절한 포효가 들렸다.
나는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이것이 네가 어긴 계약의 대가다.
용의 비늘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철보다 단단하던 껍질이 종이처럼 찢겼다.
고룡은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 속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닌 공포였다.
인간이 만든 법의 무게에 짓눌린 괴물이었다.
나는 찢겨 나간 법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인장이 있었다.
500년 동안 숨겨져 왔던 금기였다.
용들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최후의 수단.
이제 그 권한은 오롯이 나의 손에 쥐어졌다.
에라스무스가 비틀거리며 내 곁으로 왔다.
그의 손에는 고대 룬 분석기가 들려 있었다.
기계는 과부하로 인해 검은 연기를 냈다.
레온하르트, 이건 법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했다.
나의 안광에 에라스무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가 보기에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법이라는 이름의 신을 대행하는 괴물이었다.
법이 아니면 무엇이지?
나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린은 멀리서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우리가 함께 꿈꾸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질서의 끝에 남은 것은 차가운 사법적 정의뿐이다.
나는 다시 고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용의 심장을 관통할 마지막 조항을 읊조렸다.
공기가 진동하며 단두대의 칼날이 형성되었다.
투명한 법의 칼날이 고룡의 목 위에 놓였다.
생사여탈권이 나의 손가락 끝에 달렸다.
사형을 선고한다.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대지가 다시 울렸다.
고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역류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법에 의한 죽음보다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시야가 하얗게 가려졌다.
폭풍 속에서 나는 법전을 꽉 쥐었다.
뒤집힌 흙먼지가 코트와 머리카락을 덮었다.
용의 비명이 아델가드 전역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한 종족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신이 원했던 결과가 이것입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정적만 내려앉았다.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는 거대한 웅덩이만 남았다.
고룡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타버린 비늘 한 조각만이 내 발치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품속에 넣었다.
성벽 위에서 카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미친 듯이 박수를 치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눈에는 광기와 탐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내가 완성한 법전의 권능을 보았다.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안달 난 짐승의 눈이었다.
훌륭하군,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
카엘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등 뒤로 왕립 법무관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언제든 나를 반역자로 몰 준비가 되었다.
법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카엘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법전은 국가의 자산이다. 당장 넘겨라.
나는 그를 보며 차갑게 안경을 고쳐 썼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안경테는 식어 있었다.
그의 요구를 법령 제3조 1항에 비추어 보았다.
권한 없는 자의 탈취 시도는 즉각 처분 대상이다.
나는 법전을 펼쳐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당신은 이 법을 가질 자격이 없다.
나의 선언과 함께 법전이 붉게 물들었다.
카엘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그의 비명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묻혔다.
아델가드의 성벽에 새로운 피가 뿌려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장을 빠져나왔다.
성문 밖에는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드라코니아 고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곳에는 아직 처리해야 할 수많은 피고가 있었다.
나는 법전을 옆구리에 끼고 첫발을 내디뎠다.
바람을 타고 용들의 분노 어린 포효가 들렸다.
재판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