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뒤집혔다. 시간의 탑 꼭대기에서 터져 나온 청백색의 줄기가 구름을 찢었다. 아델가드 시내의 모든 금속이 웅웅거리며 울었다. 기사들의 검이 진흙처럼 녹아내려 손등을 태웠다. 비명이 도심을 메웠다. 공중을 점거하던 용들이 추락했다. 거대한 날갯짓은 허무하게 꺾였다. 땅을 기는 짐승의 처지로 전락한 고룡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나의 농도가 대기를 액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전해졌다.
레온하르트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인간의 피부 아래에서 딱딱한 비늘이 돋아났다. 뼈가 마디마디 어긋나며 새로운 관절을 형성했다. 극심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를 때렸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법전의 조항을 나직하게 읊었다.
"제3조. 관리자의 권한은 혈통에 귀속된다."
목소리는 이미 쇠를 긁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해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기하학적인 선으로 조각나 있었다. 모든 사물의 마나 흐름이 법전의 문구처럼 읽혔다. 타인이 베푸는 호의보다 법령의 허점을 찾는 것이 익숙한 뇌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본질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카엘이 광소하며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나가 일렁였다. 이미 인간의 형상을 포기한 듯, 그의 등 뒤로는 뒤틀린 날개 뼈가 솟아 있었다. 드래곤의 언령을 흉내 내는 그의 입술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네놈이 감히 드래곤의 권능을 넘보느냐!"
카엘의 외침에 공간이 뒤틀렸다. 그것은 정교한 마법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현실을 짓이기는 폭력에 가까웠다. 레온하르트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바닥의 석재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는 법전의 한 페이지를 허공에 뿌렸다. 종이 조각들이 푸른 빛을 내며 방어막을 형성했다.
"불법 점유물에 대한 명도 소송을 시작하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탑 내부에 공명했다. 그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려 했으나, 발톱이 뺨을 스쳐 핏방울이 맺혔다. 그는 자신의 신체 변화를 무시한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공기를 가르는 속도가 소리를 앞질렀다.
탑의 하층부에서는 아이린이 거룡 발락의 앞발 아래에서 구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이미 녹아내려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 발락의 비늘은 평소보다 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용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석벽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협력해라, 인간 계집."
발락의 언령이 아이린의 고막을 때렸다. 그녀는 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렸다. 스승을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의 마나가 폭주하며 탑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제정신을 잃으면 끝장이야."
아이린은 발락의 비늘을 타고 기어올랐다. 용은 불쾌한 듯 몸을 떨었으나 그녀를 쳐내지 않았다. 두 존재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탑의 중앙 제어 장치를 향해 달렸다. 고대 룬 문자가 새겨진 장치는 레온하르트의 감정과 동기화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탑 꼭대기에서는 카엘의 검은 마법과 레온하르트의 푸른 룬 문자가 격돌하고 있었다. 충격파가 발생할 때마다 아델가드의 성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카엘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더 큰 힘을 갈구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지배에 대한 갈망만이 번들거렸다.
"나는 용의 신이 될 것이다! 이 미개한 대륙의 주인이!"
카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줄기가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꿰뚫었다. 뜨거운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레온하르트의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스몄다. 그는 통증을 느끼는 대신, 그 피가 바닥에 새겨진 조약 원본의 룬 문자에 닿는 것을 확인했다.
"제54조. 계약의 일방적 파기는 시전자의 소멸을 전제로 한다."
레온하르트의 오른팔에 각인된 룬 문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4화에서 새겨졌던 그 공식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멀리 떨어진 천공의 둥지에서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드래곤들이 조약의 균열을 감지하고 일제히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날개는 시간의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 억제력에 묶여 있었다.
카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부서져 내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레온하르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네가 법이라면, 나는 그 법을 비웃는 신이 되겠다!"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용의 세로 눈동자가 카엘의 영혼까지 꿰뚫는 듯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법전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신이라 해도, 내가 만든 법전의 테두리를 벗어날 순 없다."
레온하르트의 손끝에서 청백색의 폭발이 일어났다. 카엘의 육신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분자 단위로 분해되었다. 그가 가졌던 드래곤의 비늘 조각만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냈다.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카엘이 소멸한 자리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시간의 탑 자체가 비명을 지르며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석재가 무너져 내리고, 그 틈새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금빛 마나가 쏟아졌다.
아이린과 발락은 제어 장치를 붙잡은 채 바닥으로 엎드렸다. 에라스무스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콧수염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해독했던 고대 문서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것은 단순한 조약의 파기가 아니었다.
균열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형상이 드러났다. 그것은 생명체라기보다 대륙의 지형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거대한 의지의 집합체였다. 500년간 억눌려 왔던 대륙의 진정한 의지가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그 형상을 마주했다. 그의 용화된 신체가 금빛 마나와 공명하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자신의 가문이 관리해 온 조약의 실체가, 사실은 이 거대한 존재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음을 깨달았다.
금빛 형상은 레온하르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무너졌던 탑의 파편들이 허공에 멈춰 섰다. 대륙 전체가 살아있는 지성체처럼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자의 피가... 인장을 깨웠구나."
인간의 언어가 아닌, 대지 자체의 진동이 뇌리에 직접 박혔다. 레온하르트는 안경이 없는 빈 눈가를 만졌다. 손가락 끝에 닿는 비늘의 질감이 차가웠다. 그는 자신이 새로 써 내려간 룬 문자가 단순한 계약서가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금지된 영역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초대장이었다.
금빛 형상의 가슴 부분에서 익숙한 문양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의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던 인장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500년 전의 진실이, 그리고 아버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그 거대한 빛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빛의 무리가 아델가드 전체를 덮었다. 추락했던 용들은 공포에 질려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대지의 진동과 일치해 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레온하르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금빛 형상은 대답 대신 탑의 잔해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재배열하여 거대한 문(門)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의 품에는 찢어진 조약문 조각들이 가득했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발치를 붙잡으며 외쳤다.
"레온하르트! 저건 조약의 수호자가 아니야! 저건... 저건 500년 전에 우리가 죽였다고 믿었던 존재라고!"
에라스무스의 눈에 서린 공포는 이전의 용들에게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레온하르트는 문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드래곤조차 공포에 떨게 만들 대륙 너머의 끔찍한 존재들이 도열해 있었다.
"문을 닫아야 해! 당장!"
아이린이 발락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는 카엘이 남긴 드래곤의 비늘이 들려 있었다. 그것이 법적 증거이자 새로운 인장의 열쇠가 될 수 있을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손에 남은 마지막 법전을 펼쳤다. 종이들이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문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중에는 분명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것이... 당신이 숨기려 했던 진실입니까?"
레온하르트는 거대한 금빛 형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바닥에서 푸른 룬 문자가 폭발적으로 뻗어 나가며 대지의 금빛과 충돌했다. 문이 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델가드 시내의 하층민들의 몸에서 푸른 회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계약을... 재작성하겠다."
레온하르트의 선언과 함께 탑의 잔해가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그를 삼켰다. 빛이 모든 시야를 가리기 직전, 그는 문 너머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법의 집행자가... 드디어 도착했군."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아델가드의 대지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 틈새로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 기사단의 표식이 떠올랐다. 아이린은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레온하르트, 뒤를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