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첨탑 끝자락은 공기가 희박했다. 폐부 깊숙이 시린 감각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연우는 금색 자수가 촘촘하게 놓인 소매를 다듬었다. 무거운 황금 가면이 콧등을 짓눌러 숨이 막혀왔다. 가슴 중앙이 조여드는 압박감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광장 아래에서 수만 명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곳은 제국에서 가장 고결하다 칭송받는 성역이었다. 발아래 놓인 구름이 바다처럼 넘실거리며 장관을 이뤘다.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잿빛 하수구에서는 상상도 못 할 사치였다. 연우는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손톱으로 강하게 눌렀다. 살점이 패는 통증이 잠시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망각의 서약이 뇌리를 스쳤다. 이름도 과거도 지운 채 오직 껍데기로 살아야 했다.
왕은 신의 대리인이자 제국의 태양이었다. 연우는 그 가짜 신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서늘한 시선이 뒤통수에 박혔다. 발코니 상층에 앉아 있는 카이델 3세의 눈빛이었다. 그는 비스듬히 앉아 연우의 뒷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술을 잔에 채웠다.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연우의 사소한 실수를 기다리는 포식자의 형상이었다. 목 안쪽이 바짝 마르며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손바닥에 밴 식은땀이 환영의 장갑 안쪽을 적셨다.
벨로스 공작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잔이 들려 있었다. 잔 속의 액체는 성스러운 빛을 내뿜으며 일렁였다. 하지만 연우의 코끝에 비릿한 금속향이 먼저 닿았다. 그것은 분명 축복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기운이었다.
전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 시간입니다.
공작이 잔을 건네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뱀 같은 탐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은잔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을 타고 번지는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관중들의 시선이 모두 연우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자 소름이 돋았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타올랐다. 식도가 타개지는 감각에 눈앞이 일렁거리며 흐려졌다. 이것은 성수가 아니라 정제된 독기였다. 평민의 신체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에테르의 잔해였다.
에테르 감응력을 강제로 폭주시키는 금기였다. 연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지팡이로 간신히 지탱했다. 내장 마디마디가 꼬이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어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뜨거운 핏방울이 입안에서 터져 비릿함을 더했다.
혈관을 따라 검은 줄기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환영의 장갑이 주인의 위기를 감지하고 반응했다. 장갑 표면의 마력 회로가 붉게 달아오르며 진동했다. 손등의 피부가 지직거리며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살이 타는 악취가 가면 안쪽을 가득 채웠다.
연우는 제단 가장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관중들은 왕의 우아한 발걸음에 넋을 잃고 환호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처절한 사투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화려한 가면과 눈부신 황금빛 의복뿐이었다. 그 화려함 속에 썩어가는 육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숭배하는 신의 대리인이 내리는 축복이다.
연우의 목소리가 마력을 타고 광장에 울려 퍼졌다. 장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하늘을 일직선으로 갈랐다.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 광휘가 광장 전체를 덮었다. 동시에 연우의 생명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장갑은 주인의 생명력을 연료 삼아 기적을 빚었다.
허공에 흩뿌려진 빛은 완벽한 가짜 기적을 연출했다. 사람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연우는 그들의 맹목적인 숭배가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 가슴 속 낙인이 달궈진 인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불에 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다.
카이델이 공유하는 통증이 낙인을 타고 전해졌다.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금속 잔이 대리석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카이델의 미간이 고통으로 깊게 일그러지며 경련했다. 그가 의자 손잡이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연우는 이를 악물며 장갑의 출력을 높였다. 팔꿈치까지 검은 독기가 혈관을 타고 점령했다. 심장 부근이 강하게 조여오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타 들어가며 점차 좁아졌다. 한계치에 다다른 신체가 붕괴의 신호를 보내왔다.
성수에 섞인 독이 장갑의 핵과 충돌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찌직, 하는 불길한 파열음이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환영의 막이 흔들리며 본래의 가느다란 손이 비쳤다. 제국의 신성이 무너져 내리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여동생의 낡은 리본이 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그 미세한 감촉이 연우를 간신히 이승에 붙들었다.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는 강박이 전신을 감쌌다.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지팡이의 보석을 적셨다. 붉은 액체가 에테르와 섞여 기괴한 빛을 냈다.
관중들의 환호가 고통 섞인 비명처럼 들렸다. 빛의 기둥이 최고조에 달하며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다. 제단의 대리석 바닥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연우의 콧구멍에서 검붉은 선혈이 울컥하며 쏟아졌다. 가면의 아래쪽 틈새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가면 아래로 흐른 피가 턱 끝에 맺혀 떨어졌다. 장갑의 균열 사이로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에테르의 폭주가 이제는 통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공허의 신체가 비명을 지르며 밑바닥부터 무너졌다. 다리의 힘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카이델이 의자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분노인가, 아니면 공포인가. 그가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며 거대한 날개처럼 보였다. 그의 구두가 대리석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연우의 시야 속에서 카이델의 형체가 커졌다. 그의 손이 연우의 어깨를 붙잡으려 허공으로 뻗어왔다. 그 순간 장갑의 중심부가 산산조각이 나며 폭발했다. 폭발적인 백색 광휘가 연회장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모든 시야가 빛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소음이 일순간에 소멸하며 기괴한 정적이 찾아왔다. 수천 개의 촛불과 마법 조명이 동시에 꺼져버렸다. 완벽한 어둠이 태양의 첨탑 꼭대기를 지배했다. 연우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서서히 붕괴하는 것을 느꼈다.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카이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단단한 팔이 연우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가면 너머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는 연우의 귓가에 낮게 깔린 짐승 같은 목소리를 뱉었다. 서늘한 숨결이 닿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이 연우의 목줄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연우는 정신을 놓기 전 그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꺼진 조명 사이로 벨로스 공작의 비웃음이 들렸다. 왕의 품에 안긴 것은 황제가 아닌, 피 칠갑이 된 평민이었다. 깨진 가면 틈으로 연우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벨로스 공작이 등 뒤에서 등불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희미한 불빛이 연우의 창백한 뺨을 노골적으로 비췄다. 주위 귀족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으며 정적이 감돌았다. 카이델의 손등 위로 떨어진 연우의 피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공작의 입술이 비틀리며 기이한 호선을 그렸다.
이것이 제국의 태양이 숨겨온 진짜 얼굴입니까.
공작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카이델은 대답 대신 연우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어 자신의 가슴팍에 묻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연우는 알지 못했다. 카이델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기괴한 박동이 울려 퍼졌다.
연우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쿨럭거리는 핏덩어리뿐이었다. 카이델이 연우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 속에 일렁이는 것은 명백한 소유욕이었다. 그는 연우의 입술에 묻은 피를 엄지로 느리게 닦아냈다.
너는 내 허락 없이 숨을 멈출 수 없다.
카이델의 낮은 경고가 고막을 타고 뇌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연우의 손바닥에서 빠져나간 환영의 장갑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공작이 그중 하나를 구두 굽으로 지그시 짓밟으며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근위병이 칼을 뽑는 금속음이 울렸다.
공작은 품 안에서 낡은 리본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연우의 시야가 번쩍 뜨이며 초점이 리본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연우의 품 안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동생의 유일한 유품이 공작의 손가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펄럭였다.
이 비천한 물건의 주인을 찾으러 가야겠군요.
공작의 선언과 동시에 성벽 너머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잿빛 하수구 방향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구름 위까지 닿았다. 연우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카이델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으며 공작의 목을 겨냥했다.
연우의 몸이 경련하며 카이델의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가슴 속 낙인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붉은 빛을 내뿜었다. 카이델 역시 입가에 핏자국을 매단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연우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공작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손에 든 것을 당장 내려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