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사내는 낯선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 같았다. 금사로 촘촘히 수놓인 예복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어젯밤 카이델이 남긴 이빨 자국이 깃 너머에서 화끈거렸다. 환영의 장갑을 낀 손끝이 잘게 떨렸다. 장갑은 이미 주인의 생명력을 허기진 듯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슴 중앙에 새겨진 낙인이 맥박에 맞춰 박동했다. 명치 끝이 비틀리는 감각에 호흡이 짧게 끊어졌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날카롭게 공명했다. 황금 의자의 거대한 문이 서서히 좌우로 갈라졌다. 육중한 돌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지나치게 밝아 눈가가 시렸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날아와 박혔다. 독침을 품은 시선들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단상 위 고도가 높은 자리에 앉은 귀족들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연우는 발끝에 힘을 주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장갑 속 피부가 타들어 가는 환각이 일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벨로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친절했으나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는 품 안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도난당했던 위조 서신이 공작의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거렸다. 공작이 서신을 높이 쳐들자 의회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공작의 입술이 비릿한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제국의 태양께서 이토록 조잡한 필체를 쓰실 리 없습니다.
공작의 목소리가 천장에 닿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우는 의자 손잡이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금속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턱 끝에 맺혔다. 공작은 확신에 찬 걸음으로 연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향수 냄새가 비강을 찔러 속이 뒤틀렸다.
잿빛 하수구의 쥐새끼가 감히 왕좌를 더럽히고 있구나.
낮게 깔린 속삭임이 연우의 고막을 긁었다. 공작은 비웃음을 담아 연우의 예복 자락을 툭 쳤다. 주변의 귀족들이 수군거리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경멸이 섞인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와 발등을 적셨다. 연우는 입안의 살점을 짓씹으며 비명을 삼켰다. 비릿한 혈향이 혀끝을 타고 번지며 감각을 일깨웠다.
당장 고도 인장을 증명하여 결백을 밝히시지요.
공작의 요구에 장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연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품 안의 가짜 인장으로 향했다. 카이델이 미리 준비해 둔, 마력의 잔재가 남은 정교한 모조품이었다. 그것만 내밀면 이 소동은 일단락될 터였다. 그러나 연우가 인장을 꺼내기도 전에 묵직한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증언대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체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이었다. 연우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착각이 일었다. 시안은 평소의 가벼운 차림이 아닌, 정갈한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생기 넘치던 장난기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연우는 시안과 눈을 맞추려 했으나, 그는 차갑게 시선을 외면했다. 시안은 배심원석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제가 본 것은 왕이 아니라, 왕의 옷을 훔쳐 입은 가련한 광대였습니다.
시안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단호했다. 연우의 귀에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믿었던 유일한 조력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칼날이 되어 가슴을 난도질했다. 폐부 깊숙한 곳이 얼어붙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낙인이 새겨진 가슴만이 뜨겁게 타올랐다.
시안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주머니가 터지며 연우의 여동생, 연희의 낡은 리본이 튀어나왔다. 땟자국이 묻은 분홍색 천 조각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초라하게 뒹굴었다. 연우의 눈동자가 리본을 따라가다 멈췄다. 위장이 뒤집히는 통증에 상체를 숙일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저자는 평민도 아닌 하수구의 불가촉민입니다.
시안의 뒤를 이어 귀족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사방에서 손가락질이 쏟아지며 연우를 옥죄어 왔다. 공기 중에 섞인 독기가 환영의 장갑을 타고 혈관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핏줄이 손등 위로 툭툭 불거져 나왔다. 연우는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의 낙인이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을 내뱉었다.
카이델의 통증이 공유되고 있었다. 왕이 근처에 있다는 신호였다. 연우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시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안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뺨 위로 투명한 액체가 느리게 흘러내렸다. 시안은 입술을 짓이기며 연우에게만 보일 듯 말 듯한 수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과거 잿빛 하수구에서 위급 상황 때 쓰던 신호였다. 도망쳐, 혹은 숨어라는 뜻이 아니었다. 시안의 손가락은 '기다려'라는 의미를 반복해서 그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의회의 거대한 후문이 박살 나듯 열렸다.
먼지 구름 사이로 길게 뻗은 그림자가 홀 안을 덮쳤다.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지며 귀족들의 비명을 잠재웠다. 에테르의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자 환영의 장갑에 미세한 금이 갔다. 연우는 폐를 찌르는 압박감에 바닥을 짚고 무너져 내렸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 들어오는 사내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였다. 카이델 3세였다. 그는 증언대 위에 선 시안을 지나쳐 연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이델은 무릎을 굽혀 앉으며 연우의 턱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 차가운 금속 장갑의 감촉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내 장난감을 마음대로 심판대에 올린 건 누구지.
카이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의회장을 휘감았다. 그는 연우의 입술에 묻은 피를 엄지로 닦아내며 벨로스 공작을 응시했다. 공작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카이델은 연우의 허리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체온이 예복 너머로 전해지며 연우의 떨림을 억눌렀다.
카이델은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고개를 들어라, 연우야.
그는 연우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쿵, 쿵. 일정한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왕의 심장이자, 이제부터 연우가 짊어져야 할 거대한 저주의 무게였다. 카이델은 바닥에 떨어진 연희의 리본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들의 눈을 전부 뽑아버리면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겠지.
카이델은 연우의 환영 장갑을 거칠게 벗겨내 바닥으로 던졌다. 맨살이 드러난 연우의 손등에는 기괴한 검은 문양이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공작의 비명과 시안의 억눌린 신음이 뒤섞여 장내를 가득 채웠다. 카이델은 연우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얽어 넣으며 의회를 향해 선포하듯 소리쳤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자 중, 내 대역의 얼굴을 본 자는 단 한 명도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