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연락
공명(Resonance)의 시대
카페는 에덴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었다.
3년 전과 같은 자리였다. 창가 구석. 도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커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목소리가 먼저 왔다.
"도하야!"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짧은 머리. 밝은 눈. 3년 전 사진 속 얼굴 그대로였다. 윤세린. 에덴 3기. B급 가이드. 도하가 11년을 보낸 곳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세린이 일어서다가 멈추었다. 도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야, 말랐다."
"원래 이래."
"아니야. 더 말랐어." 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밥은 먹고 다녀?"
"먹어."
"거짓말은."
도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두 잔 놓여 있었다. 한 잔은 세린 것. 한 잔은 도하 것. 얼음이 반쯤 녹아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린 것이었다.
"시켜놨어. 너 아메리카노 마시지?"
"응."
도하는 컵을 들었다. 차가웠다. 졸업 전날에도 세린이 사줬던 것과 같은 메뉴였다. 서류를 네 번 접어 주머니에 넣은 날. 세린이 아무 말 없이 커피를 건네며 옆에 앉았던 날.
세린이 도하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이 웃지 않았다. 살피는 눈이었다. 에덴에서 도하가 밥을 안 먹은 날, 세린이 그 눈으로 봤다.
"그래서."
세린이 컵을 내려놓았다.
"차강진이야?"
"응."
"S급."
"응."
"계약 결혼."
도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에 남았다.
"KCA에서 다 알아?"
"소문이야 소문. B급 가이드 사이에서 난리 났어." 세린이 빨대를 돌렸다. "S급 에스퍼한테 E급이 배정됐다고. 다들 믿지도 않더라."
"그럴 만하지."
"근데 진짜잖아."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이 도하를 보았다. 잠깐. 그리고 톤을 낮추었다.
"어때? 거기."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에덴에서 11년을 같이 보낸 사람이 하는 질문이었다. '어때'가 '괜찮아'를 대신하고, '거기'가 '그 사람 곁에서'를 대신하는.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가 뭐야." 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거야 싫은 거야."
"나쁘지 않은 거야."
세린이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한숨이었다. 에덴에서 도하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나오던 것.
"너는 진짜.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도하는 커피를 마셨다. 세린도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의 BGM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창 너머로 에덴의 담벼락이 보였다. 회색 벽.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색이었다.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하야."
톤이 달라져 있었다. 밝음이 빠지고 진지함이 남은 목소리.
"너 전화에서 물어볼 게 있다고 했잖아."
"응."
"뭔데?"
도하는 컵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파동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가, 아무것에도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감각.
"오라클."
세린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오라클 시스템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뭘 알고 싶은데?"
"매칭률이 조작될 수 있는지."
세린의 빨대를 돌리는 손이 멈추었다.
카페 안의 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졌다. 에어컨 소리. 커피 머신 소리.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 세린은 그 소리들 너머로 도하를 보았다.
"왜 그런 걸 물어."
"매칭률 0%인데, 가이딩이 돼."
세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초. 5초.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야." 세린이 도하의 눈을 보았다. "근데 하나 말해줄 건 있어."
"뭔데."
"너 에덴에서 나오기 전에. 기억나? 그때 그 사고."
도하의 손끝이 멈추었다.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왔다. 손끝의 뜨거움. 파동이 몸 전체를 통과하던 감각. 시야가 흐려지고, 무릎이 꺾이고, 바닥이 가까워지던 것. 에덴 졸업 한 달 전. 누군가를 구하려다 파동을 과사용했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에덴 의무실이었다. 교관이 서 있었다. "능력 과사용으로 인한 파동 손상. E급 재판정."
그날 이후 도하의 표면 파동이 뭉개졌다. 120Hz 이하로 고정된 것이 그때부터였다.
"기억해."
"그때 네가 구한 사람."
세린이 도하를 보았다. 오래. 에덴에서 밥을 살피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눈.
"누군지, 너 아직도 모르잖아."
도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은 파편이었다. 복도. 형광등. 누군가의 등. 떨림. 손을 뻗었다. 닿았다. 그리고 세상이 꺼졌다. 깨어났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교관은 누구를 구했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에도 없었다.
"몰라. 기록이 없어."
"알아." 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상한 거야."
"도하야."
세린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때 사고 보고서, KCA에 올라갔을 거야."
"그건 아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세린이 빨대를 놓았다.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나 KCA 소속이잖아. B급이면 열람 권한이 일부 있어." 세린이 잠깐 멈추었다.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열었다. "에덴 3기 사고 기록을 정리하는 업무가 있었어. 작년에. 거기서 네 건을 봤어."
도하는 세린을 보았다.
"거기에 수혜자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세린이 도하의 눈을 보았다. 똑바로.
"비어 있었어."
카페의 소리가 멀어졌다.
"수혜자 항목이 공란이었어."
세린이 컵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름이 없었어. 삭제된 건지, 처음부터 안 적힌 건지." 고개를 들었다. "사고 보고서에 수혜자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도하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넌 늘 그랬어."
세린이 말했다. 도하를 보면서.
"구하고 나서 잊어버려. 남이 아니라 네 자신을."
도하는 컵을 내려다보았다. 얼음이 거의 녹아 있었다. 투명한 물 위로 연한 갈색이 번지고 있었다. 경계가 흐려지는 것처럼.
"기억 안 나는 게 아니라."
도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어."
세린의 표정이 변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슬픔이 아닌 것이 왔다. 답답함에 가까운 것.
"그게 문제라는 거야, 이도하."
카페를 나왔다. 오후 햇살이 보도블록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세린이 도하 옆에 서서 걸었다. 에덴의 담벼락을 지나고 있었다. 회색 벽 위로 햇살이 비껴 들었다. 3년 전에도 이 길을 같이 걸었던 적이 있다. 졸업 전날. 서류를 접은 날.
"조심해."
세린이 걸으면서 말했다. 앞을 보면서.
"뭘."
"차강진이든 KCA든."
세린이 앞을 보며 걸었다.
"네가 뭔가를 파기 시작하면, 파묻힌 것들이 올라와." 잠깐 멈추었다. "그때 네가 다치는 거야."
도하는 걸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린이 멈추었다. 도하도 멈추었다.
"보고서 얘기." 세린이 도하를 보았다. "나한테 들었다는 거, 아무한테도 하지 마."
세린의 눈이 진지했다. KCA 소속 가이드가 비인가 열람을 인정한 것이었다. 세린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말해준 것이었다.
"안 해."
"약속이야?"
"약속이야."
도하가 답했다. 세린의 눈이 풀렸다. 약속이라는 단어를 도하가 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에덴에서도 도하는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키지 못할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말한다는 것은 지킨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세린이 도하를 보았다. 이번에는 살피는 눈이 아니라, 3년 동안 기다린 사람의 눈.
"다음에는 3년 걸리지 마. 전화해."
도하는 세린을 보았다. 밝은 눈. 짧은 머리. 에덴의 6인실에서 도하 옆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줬던 사람. 파동이 낮아서 아무도 찾지 않는 밤에, 그냥 옆에 있어줬던 사람.
"응."
한 글자. 하지만 3년 만에 나온 한 글자.
세린이 웃었다. 이번에는 눈도 웃고 있었다.
"가. 금방 온다며."
도하는 돌아섰다. 걸었다. 에덴의 담벼락이 등 뒤로 멀어졌다.
아크의 엘리베이터가 52층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렸다. 현관에 불이 켜져 있었다. 도하는 신발을 벗었다. 슬리퍼를 신었다. 260. 자신의 사이즈. 처음 왔을 때 비닐이 씌워져 있던 것. 지금은 바닥에 눌린 자국이 있었다. 한 달치.
거실로 나왔다.
강진이 서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유리 앞에 서 있었다. 등이 보였다. 넓은 어깨. 꼿꼿한 자세. 하지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었다. 오른손이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두통. 도하가 나간 지 3시간이 지나 있었다.
강진이 돌아보았다.
도하를 보았다. 재는 시선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돌아왔는지를 확인하는.
"어디 갔었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3시간. 강진은 시간을 세고 있었다. 몸이 세고 있었다. 도하가 없는 3시간 동안 두통이 돌아왔다는 것을 미간의 주름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금방이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길어져서."
"3시간이 금방이야?"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3초. 관자놀이에서 손을 내렸다. 힘을 빼는 동작이 아니라, 도하 앞에서 두통을 보이지 않으려는 동작이었다.
도하는 그것을 알았다.
"가이딩 할까요?"
"됐어."
"두통인데요."
"금방 온다며."
도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은 지금 두통보다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금방 온다며'가 '왜 3시간이야'를 대신하고 있었다. 세린이 '어때'로 '괜찮아'를 대신하는 것처럼. 이 사람도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세린은 걱정을 숨기고, 강진은 결핍을 숨기는.
도하는 주방으로 갔다. 컵 두 개를 꺼냈다. 물을 따랐다. 테이블에 놓았다. 강진 쪽에 하나. 자신 쪽에 하나.
강진이 물컵을 보았다. 그리고 도하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컵을 들었다. 마셨다.
도하도 마셨다.
물이 차가웠다.
강진이 컵을 내려놓았다. 소파에 앉았다. 관자놀이를 다시 누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간의 주름은 아직 거기 있었다. 3시간치.
도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강진 씨."
"뭐."
"가이딩 하겠습니다."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됐다고 했잖아."
"두통이 3시간째입니다."
강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간을 알고 있었다. 도하가 나간 시간을. 자신의 두통이 돌아온 시간을. 그 두 시간이 같다는 것을.
강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말 대신 손이 먼저인 사람.
도하가 손을 올렸다. 손끝이 닿았다.
저주파를 보냈다. 120Hz 이하. 승인 목록에 없는 주파수. 모니터에 기록될 것이었다. 비승인.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이 사람의 미간에 파인 3시간이 먼저였다.
파동이 스며들었다. 벽 아래로. 늘 그랬듯이. 강진의 방어기제가 열리지 않아도 도하의 주파수는 그 아래를 흘렀다. 지하수처럼.
강진의 미간이 풀렸다. 호흡이 깊어졌다. 어깨가 내려갔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도하는 손을 뗐다. 강진의 눈이 감겨 있었다. 도하는 조용히 일어섰다. 자신의 방으로 가려 했다.
"도하."
낮은 목소리.
"네."
"3시간은 길어."
도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멈춰 서서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이 '다음에는 빨리 와'라는 뜻인지, '없으면 아프다'는 뜻인지. 강진 자신도 모를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도하가 답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책상 위에 승인 양식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교본. 교본 사이에 에덴 사진.
도하는 사진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강진의 손에 닿았던 손끝. 파동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낮고, 느리고, 따뜻한 잔열.
그리고 세린의 말이 떠올랐다.
수혜자 항목이 공란이었어.
7년 전. 에덴. 누군가를 구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졌다. 도하의 파동은 뭉개졌다. E급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
도하는 교본을 덮었다.
어둠 속에서, 강진이 한 말이 남아 있었다.
3시간은 길어.
도하는 그 말의 무게를 재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