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빛이 회랑을 삼켰다.
벽면의 룬 조각들이 비명처럼 갈라지며, 성스러운 가호의 파동이 아르스 마그나의 척추를 관통했다. 대리석 기둥에 새겨둔 방어 문양이 종이처럼 타들어간다. 벨리알은 동력실 중앙의 지맥 안정기에 양손을 짚은 채 이를 악물었다.
"주인님, 서쪽 회랑 완전 붕괴. 동쪽 방벽도 버티질 못합니다."
에린의 목소리가 통신 룬을 타고 흘러왔다. 벨리알은 대답 대신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지맥 안정기의 수정 표면 아래로 핏줄처럼 갈라진 균열이 번졌다. 출력이 흔들린다. 1화에서부터 미세하게 진동하던 지하 기단의 떨림이 이제는 발바닥을 타고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4서클 방어진 전부 소실. 남은 건 중앙 동력실과 대연회장뿐입니다."
에린의 보고에 감정은 없었다. 사실만을 나열하는 음성이 오히려 상황의 심각함을 드러냈다. 벨리알은 지맥 안정기에서 한 손을 떼어 허공에 설계도를 그렸다. 손끝이 떨렸으나 선은 정확했다.
대심판관 카엘리스. 성황청이 보낸 최고위 집행자.
그자의 가호는 벨리알이 지금껏 상대한 어떤 용사와도 차원이 달랐다. 일반적인 용사의 가호가 방패라면, 대심판관의 그것은 태양 자체였다. 마족이 가하는 모든 직접적 공격을 99%가 아닌 사실상 100% 무효화한다. 벨리알의 함정들조차 가호의 빛 앞에서 절반의 효율로 떨어졌다.
회랑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석분이 쏟아졌다.
벨리알은 지맥 안정기의 균열 사이로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었다. 피부 아래 혈관이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입술 사이로 쇳내가 번졌다. 동력실에 잠든 거대한 마력원이 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7화에서 연결한 그 고리가 지금 그의 몸을 태우고 있었다.
"카엘리스."
벨리알이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동력실의 모니터링 룬들이 일제히 붉은 빛으로 전환되며, 대연회장으로 진격하는 대심판관의 위치를 표시했다. 하얀 갑옷. 눈부신 성광의 잔상. 그 뒤로 아르스 마그나의 동쪽 벽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함정의 가동률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동력실 벽면에 걸어둔 설계도 뭉치 중 하나가 바람도 없이 펄럭였다. 그 여백에 적힌 이름들이 눈에 밟혔다. 지난 전투에서 잃은 골렘 병사들의 식별 번호. 그가 이름 대신 부여한 기호들이었으나, 필체는 유독 조심스러웠다.
"주인님, 저 지금 대연회장 북쪽 기둥 뒤에 있습니다. 대심판관이 중앙 통로로 진입합니다."
에린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벨리알은 설계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에린. 침묵의 연회장 바닥 아래, 골렘 채굴단이 뚫어놓은 수직 갱도가 있다. 그 경로로 동력실까지 와라."
"대심판관을 내버려두고요?"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벨리알의 손이 지맥 안정기 위를 훑었다. 수정 표면의 온기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가 이 안정기에 생명력을 쏟을수록 성의 지맥은 활성화되지만, 대신 그의 신체는 소모된다. 등가교환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일방적인 거래.
"성 자체를 쓴다."
짧은 선언이었다. 에린의 통신이 잠시 끊겼다가 돌아왔다.
"…무슨 뜻입니까."
"아르스 마그나의 구조체 전부를 하나의 살상식으로 전환한다. 벽, 기둥, 천장, 바닥. 이 성을 구성하는 모든 물리적 질량이 무기가 된다."
벨리알은 지맥 안정기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수정 파편이 박혀 있었고, 거기서 흘러내린 피가 안정기 표면을 적시며 새로운 룬 문양을 그렸다. 의도된 것이었다. 피가 촉매였다.
"신이 너희를 보호한다면, 나는 이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너희를 심판하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이었다. 동력실의 벽면이 울렸다. 성 전체가 그의 선언에 응답하듯 저주파의 진동을 토해냈다.
대연회장.
카엘리스 대심판관은 무너진 기둥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하얀 갑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성광이 그의 발밑에서 원형으로 퍼지며 바닥의 함정 룬들을 하나씩 정화했다. 수백 개의 기하학적 문양이 빛에 닿는 순간 재가 되어 흩어졌다.
"마왕의 후계자."
카엘리스의 음성이 연회장 전체에 울렸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 신관 특유의 절대적 확신이 음절마다 배어 있었다.
"네 아비의 성이 부서졌을 때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신의 심판이다."
그의 발이 연회장 중앙의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갈라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풀리는 소리였다.
카엘리스의 발밑에서 바닥 전체가 미끄러졌다. 연회장의 대리석 타일 수천 장이 일제히 경첩처럼 회전하며 아래를 드러냈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흑요석 협곡으로 이어지는 수직 30미터의 공허.
카엘리스의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광이 그의 발밑에 발판을 만들어 허공에 세웠다. 가호가 작동한 것이다. 바닥이 사라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천장이 내려왔다.
벨리알이 설계한 아르스 마그나의 구조체 자체가 움직였다. 대연회장의 천장을 지탱하던 열여섯 개의 기둥이 동시에 안쪽으로 기울었다. 수십 톤의 대리석과 흑요석이 혼합된 천장판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추락하기 시작했다. 압축된 공기가 연회장 전체를 짓눌렀다. 귀 안쪽이 터질 듯 팽창하는 기압 속에서, 석재와 석재가 맞부딪치며 고막을 찢는 마찰음이 쏟아졌다. 기둥 사이에 갇힌 바람이 비명을 질렀고, 천장판의 모서리가 벽면을 긁으며 치아가 떨릴 만큼 날카로운 진동을 뿜어냈다. 자연낙하. 마법이 아닌 물리. 가호가 막을 수 없는 영역.
카엘리스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성광이 격렬하게 폭발하며 방어진을 형성했으나, 떨어지는 것은 마족의 공격이 아니라 건축물의 잔해였다. 세계는 이것을 '붕괴 사고'로 판정했다. 가호의 피해 감소율은 적용되지 않는다.
첫 번째 충돌. 천장의 샹들리에가 카엘리스의 성광 방어막 위로 떨어졌다. 무게만 2톤. 미스릴 프레임에 박힌 룬 각인이 충격과 함께 활성화되며 성광을 갉아먹었다. 1화에서 요동치던 바로 그 샹들리에의 설계를 벨리알은 이 순간을 위해 남겨두었다.
카엘리스의 무릎이 꺾였다.
두 번째 충돌. 기울어진 기둥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하얀 갑옷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성광이 흔들렸다. 카엘리스는 성검을 뽑아 머리 위의 잔해를 베었으나, 잘려나간 돌덩이 두 조각이 양옆에서 그를 압박했다.
세 번째 충돌은 바닥에서 왔다.
에린이 수직 갱도를 통해 동력실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갱도의 사다리를 오르며 손톱이 세 개 빠져 있었고, 무릎에는 흑요석 파편이 박혀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동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벨리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지맥 안정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피로 바닥에 룬을 그리고 있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턱을 타고 떨어져 문양의 일부가 되었다. 왼손의 손가락 끝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지직거리는 마력의 잔향이 공기를 태웠다.
에린은 발을 멈추었다.
룬 문양은 벨리알이 늘 허공에 그리던 설계도와 달랐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 기하학이 아니라 서예에 가까운 필체. 설계도 뭉치 사이에 끼워져 있던 도면, 5화에서 에린이 발견했던 인간의 언어로 된 주석과 같은 필치였다. 그 주석의 의미를 에린은 이제야 이해했다. '최후의 미학'이라고 적혀 있던 문장.
벨리알의 피가 바닥의 돌 틈새로 스며들 때마다 동력실 전체가 맥박처럼 진동했다. 혈관이 아니라 지맥이 뛰고 있었다. 그의 생명력이 성의 뼈대로 직접 흘러드는 광경. 7화에서 연결된 마력원과의 고리가 역류하고 있었다. 성이 그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성에게 먹이고 있었다.
피 냄새가 동력실을 채웠다. 쇳내와 돌가루의 비린 향이 뒤섞여 혀끝에까지 닿았다. 벨리알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옷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의 핏줄이 검보랏빛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고, 호흡은 바닥에 닿을 듯 얕았다.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가 바닥을 긁으며 마지막 곡선을 완성할 때, 손끝에서 피부가 벗겨져 나갔다. 하얀 뼈가 아닌 붉은 살점이 드러났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곡선의 끝을 채웠다. 룬이 완성되었다. 바닥 전체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가, 순간 투명한 유리처럼 맑아졌다.
에린은 그제야 움직였다. 무릎의 흑요석 파편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벨리알 곁으로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차가웠다. 살아있는 마족의 체온이 아니었다. 그녀의 품에서 성물이 진동했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무기의 파편이 벨리알의 룬과 공명하며 푸른 빛을 토해냈다.
"물러나 있어."
벨리알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숨이 끊어질 듯한 몸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력실에서 나가면 안전하다. 갱도를 타고—"
"싫습니다."
에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손이 벨리알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 그의 손목을 잡았다. 피로 미끄러웠다. 에린은 놓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품속의 성물을 꺼내어 벨리알이 그린 룬 위에 내려놓았다.
"이걸 쓰세요."
벨리알의 시선이 성물로 향했다. 푸른 빛. 8화에서 대심판관의 마법을 무효화했던 핵심 열쇠.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되었다.
"그건 네 방어 수단이다."
"주인님이 죽으면 방어할 것도 없습니다."
에린의 음성에 떨림이 없었다. 벨리알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동력실의 붉은 조명이 에린의 얼굴 절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성물의 푸른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대연회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카엘리스가 성검으로 잔해를 베어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모니터링 룬이 그 장면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없었다.
벨리알은 에린의 성물을 집어 들었다. 그의 피와 성물의 빛이 만나는 접점에서 기묘한 색이 태어났다.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새벽 직전 하늘의 색. 룬 문양 전체가 그 빛을 머금으며 동력실 바닥에서 벽으로, 벽에서 천장으로 퍼져나갔다.
아르스 마그나가 울었다.
성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진동했다. 대연회장에서 일어서던 카엘리스의 발밑에서 바닥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솟아올랐다. 바닥의 대리석 타일들이 칼날처럼 수직으로 세워지며 카엘리스의 성광 방어막을 사방에서 조여왔다.
'최후의 미학'이 발동한 것이었다.
가호의 맹점. 건축물이라는 물리적 질량. 자연재해로 판정되는 구조적 붕괴. 벨리알이 설계도 여백에 인간의 언어로 적어둔 발동 조건은 단 하나였다. 설계자의 피가 지맥과 하나가 될 것. 성과 사람의 경계가 사라질 것.
카엘리스의 성검이 솟아오른 대리석을 베었다. 잘렸다. 잘린 자리에서 새로운 타일이 솟아올랐다. 성 자체가 재생하고 있었다. 벨리알의 생명력을 먹고.
"이 마왕성이 살아 있다고?"
카엘리스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음성을 냈다. 성광이 격렬하게 타올랐으나, 타오를수록 주위의 벽이 더 거세게 조여왔다. 천장의 잔해가 그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손바닥처럼 모여들었고, 바닥의 칼날 타일이 양 발목을 잡았다.
세 번의 교환이 끝났다.
카엘리스의 성검이 마지막으로 허공을 베었으나, 칼끝이 닿기 전에 천장이 내려앉았다. 수백 톤의 물리적 질량이 대심판관을 덮었다. 성광이 한 번 폭발하듯 번쩍였다가, 잔해 아래에서 꺼졌다.
동력실이 조용해졌다.
모니터링 룬의 붉은 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벨리알은 바닥에 엎드린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은 여전히 룬 위에 놓여 있었고, 손끝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어 있었다. 에린은 그의 등에 손을 대었다. 미약한 온기. 호흡도 남아 있었다.
벨리알이 고개를 돌렸다. 아주 느리게.
에린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력실의 잔광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걸려 있었다. 성물의 푸른 빛은 이미 사그라들어 희미한 잔상만 남았고, 그 잔상이 에린의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벨리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설계의 완성을 확인할 때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톱니바퀴 각도를 검증할 때의 날카로운 만족도 아니었다. 입술 끝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으나 개의치 않는 듯한, 어딘가 어설프고 힘없는 미소. 눈가의 근육이 풀려 있었다. 경계가 사라진 얼굴. 새벽 작업실에서 혼자 설계도 여백에 이름을 적을 때조차 보이지 않던 표정이었다.
에린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차가운 손끝이 에린의 손등 위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의 돌 틈새로 스며든 피가 굳어가고 있었고, 동력실의 공기에서 쇳내가 서서히 옅어지며 그 자리를 먼지와 정적이 채웠다.
벨리알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에린은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부탁한다.'
눈이 감겼다.
에린이 그의 몸을 일으키려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순간, 동력실의 남쪽 벽이 하얗게 빛났다. 대연회장에서 올라오는 빛이 아니었다. 더 멀리서, 칼데라 외곽에서 쏘아 올린 것. 성황청의 정화 마법이 벽을 관통하며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에린의 품에서 벨리알의 몸이 밀려났다. 하얀 빛의 장벽이 두 사람 사이에 수직으로 세워졌고, 에린의 손끝이 벨리알의 옷깃을 스치며 허공을 잡았다.
정화의 빛 너머로, 벨리알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에린의 손톱이 빛의 벽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