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 협곡 너머로 빛의 기둥이 솟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열둘. 칼데라 외곽의 능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성광의 기둥들이 새벽녘의 마계를 낮처럼 물들였다. 벨리알은 작업대 위의 설계도를 내려놓고 관측창으로 다가섰다. 렌즈 너머로 은빛 갑옷의 행렬이 보였다. 수백은 족히 되는 병력이 협곡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선두에 금빛 법의를 걸친 자가 서 있었다.
대심판관 아르카디우스.
성황청이 직접 칼을 빼든 것이다. 토벌대 수준이 아니라 정규군이었다. 관측 룬에 잡히는 마력 파장만으로도 아르스 마그나의 외벽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린."
뒤편에서 지맥 측정 장치의 수치를 읽고 있던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벨리알은 관측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예상보다 이틀 빨라."
"알아요. 지맥 파동 패턴이 어제부터 바뀌었으니까."
에린이 측정 장치를 내려놓고 작업대로 왔다. 그녀의 목에 걸린 성물—선대 마왕을 찔렀던 무기의 파편으로 만든 펜던트—이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벨리알의 시선이 잠깐 그것에 머물렀다.
"저 빛의 기둥, 정화 마법의 전조예요." 에린이 관측창 옆에 서며 말했다. "열두 개가 완성되면 칼데라 전체를 성광으로 소각하는 금단 술식이 발동돼요. 마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시간은?"
"기둥 하나에 약 두 시간. 마지막 기둥이 완성되기까지 스물네 시간."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그리던 설계도의 선이 끊긴 자리에서 계산을 시작했다. 스물네 시간. 절대 방어선의 마지막 룬 각인에 필요한 시간은 여섯 시간. 충분한 여유가 있어야 했다.
문제는 여유가 아니었다.
"정화 마법의 범위가 레테아 강까지 미치나."
"미쳐요." 에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강물이 증발하면 망각의 안개가 칼데라 전체를 뒤덮어요. 그 안에서는 지맥 안정기도 버틸 수 없어요."
벨리알은 관측창에서 물러났다. 작업대 위에 펼쳐진 설계도의 여백에는 지난 전투에서 잃은 부하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그 위로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다. 절대 방어선의 최종 배치도였다. 아르스 마그나를 둘러싼 일곱 겹의 룬 진을 하나의 거대한 결계로 통합하는 설계.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펜을 놓지 않은 채 벨리알이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의 떨림은 없었다. 설계도의 선처럼 정확하고 건조했다.
"침입자에 대한 환경적 배제일 뿐이다."
에린이 그를 바라보았다. 벨리알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남기는 선의 굵기가 평소보다 깊었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절대 방어선의 마지막 룬을 새기기 위해 두 사람은 아르스 마그나의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지맥 안정기가 설치된 공간이었다. 원통형의 방 한가운데 거대한 수정 기둥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관통하고 있었고, 그 표면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맥동이 방 전체를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벨리알은 기둥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의 석판을 들어냈다. 그 아래로 드러난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룬 회로였다. 선이 끊긴 부분이 세 군데. 각인에는 극도로 섬세한 마력 제어가 필요했다.
"지맥 안정기의 현재 출력은."
"72퍼센트." 에린이 기둥 옆의 측정판을 읽었다. "정상 가동 범위 내예요. 방어선 전체를 기동하려면 최소 95퍼센트가 필요하지만."
"알고 있어."
벨리알이 각인 도구를 꺼냈다. 흑요석으로 깎은 침이었다. 끝에서 미세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첫 번째 끊긴 선에 침을 대는 순간, 수정 기둥이 요동쳤다. 보랏빛 맥동이 불규칙해지더니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하 기단에서 간헐적으로 감지되던 진동이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달랐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고, 벽면의 보조 룬들이 붉게 경고색을 띠었다.
"과부하!" 에린이 측정판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외쳤다. "외부 성광 기둥의 간섭이에요. 정화 마법의 파장이 지맥을 타고 안정기에 역류하고 있어요!"
벨리알의 침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각인하던 선이 0.3도 이상 틀어졌다. 즉시 침을 거두고 새겨진 선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처음부터 다시.
시간이 있는가.
수정 기둥의 맥동이 점점 빨라졌다. 72퍼센트였던 출력 수치가 요동치며 68, 64, 59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정기가 외부 간섭에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방어선을 가동하기는커녕 안정기 자체가 정지할 수 있었다.
"차단해야 해." 벨리알이 일어섰다. "외부 파장의 역류 경로를 끊는다. 안정기와 지맥의 연결을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그러면 아르스 마그나 전체의 마력 공급이 끊겨요."
"30초면 된다. 30초 안에 역류 경로를 차단하고 재연결한다."
에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측정판 위에서 떨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산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에린이 말했다. "안정기 해제와 역류 차단과 재연결, 세 가지를 동시에 처리해야 해요. 한 사람의 마력 회로로는 제어할 수 없어요."
"방법이 있나."
에린은 목에 걸린 성물을 움켜쥐었다. 펜던트가 그녀의 손안에서 뜨거운 빛을 뿜었다. 성물의 맥동이 수정 기둥의 맥동과 겹치는 순간, 방 안의 진동이 미세하게 줄었다.
"마력 동기화." 에린이 말했다. "지난번 지하 기단에서 성물이 반응했던 걸 기억해요. 그때의 파동이 지금 안정기와 일치해요. 두 사람의 마력을 하나의 회로로 묶으면 세 가지 작업을 분담할 수 있어요."
벨리알의 시선이 에린의 손에 쥐인 성물에 머물렀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무기의 파편. 그것이 마왕의 후계자인 자신의 마력과 동기화된다면, 이 성물은 단순한 파괴의 도구가 아니었다.
잠시 침묵했다. 허공에 설계도를 그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실패하면 네 마력 회로가 타버린다."
"성공하면 방어선이 완성돼요."
에린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벨리알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홍채 안에 성물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빛은 성황청의 성광과 같은 계통이면서도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정 기둥 앞의 마법진 위에 마주 섰다.
에린이 먼저 성물을 마법진 중앙에 내려놓았다. 펜던트가 석판에 닿는 순간 각인된 룬들이 금빛으로 깨어났다. 벨리알이 흑요석 침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검붉은 피가 마법진의 홈을 타고 흘러 성물을 감쌌다.
마력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었다. 벨리알의 마력은 심연의 것이었고, 에린의 성물에 깃든 힘은 성스러운 가호의 잔재였다. 두 힘이 부딪히자 마법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벨리알의 손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에린의 손등에 가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에린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손이 마법진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성물의 빛이 불안정하게 명멸했다. 동기화가 무너지려는 찰나.
벨리알이 에린의 손을 잡았다.
찬 손이었다. 마족의 체온은 인간보다 낮았고, 오랜 시간 흑요석 침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은 거의 얼음 같았다. 에린의 떨림이 그 차가움 속으로 전해졌다. 벨리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에린이 숨을 내쉬었다. 길고 느린 숨이었다. 그 호흡에 맞춰 벨리알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겹쳐지는 순간, 마법진 위의 빛이 안정되었다. 금빛도 보랏빛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 연결된 손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수정 기둥의 맥동이 그 새로운 빛에 맞춰 천천히 박자를 바꾸었다. 불규칙하던 진동이 잦아들었다. 벽면의 경고색이 하나씩 꺼졌다.
벨리알은 에린의 손가락 마디가 자신의 손등을 누르는 압력을 느꼈다. 작지만 확실한 힘이었다. 설계도의 여백에 적어두었던 이름들이 떠올랐다. 죽은 자들의 이름. 이 손의 온기는 그 목록에 추가될 이름이 아니었다. 지켜야 할 이름이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보랏빛과 금빛이 뒤섞인 빛이 천장의 석재 틈으로 스며들어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맥의 수분이 안정기의 열에 응결된 것이었다. 그 규칙적인 물소리가 두 사람의 호흡 사이를 채웠다.
에린의 떨림이 멈추었다. 벨리알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놓여 있는 손이 되었다.
출력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59에서 멈춰 있던 숫자가 71, 78, 84로 뛰었다. 에린의 성물이 지맥 안정기의 간섭 파장을 걸러내고 있었다. 성황청의 정화 마법과 같은 계통의 힘이기에 가능한 무효화였다. 벨리알은 그 원리를 즉시 파악했다.
성물이 방패가 되고 있었다. 성광의 역류를 흡수하고, 정화된 마력만이 안정기로 흘러들었다.
"에린. 성물의 공명 주파수를 유지해. 내가 각인을 마무리한다."
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 중앙에 앉아 양손으로 성물을 감싸 쥐었다. 금빛이 안정적으로 맥동했다. 벨리알은 연결된 마력의 일부를 분리하여 흑요석 침에 실었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호흡이 고르고 침의 끝이 정확했다.
첫 번째 끊긴 선을 이었다. 룬이 살아나며 바닥 전체로 빛의 맥이 뻗어나갔다.
두 번째 선. 수정 기둥의 맥동이 한층 깊어졌다. 출력이 89퍼센트를 찍었다.
세 번째 선에 침을 대는 순간, 아르스 마그나 전체가 울렸다. 외벽의 방어 룬들이 일제히 기동했다. 절대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출력 수치가 97퍼센트에서 안정되었다.
벨리알이 침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피가 굳어 있었다. 소매로 닦지 않았다. 대신 수정 기둥에 손을 얹어 진동의 패턴을 확인했다. 완벽한 공명.
"방어선 구축 완료."
관측 룬이 붉게 점멸했다. 외부 영상이 수정 기둥의 표면에 투사되었다. 흑요석 협곡을 넘어온 성광의 기둥 열두 개가 동시에 빛을 뿜었고, 그 중심에서 대심판관 아르카디우스가 금빛 성검을 뽑아 들었다. 성검의 끝이 대지를 가리켰다.
쿠구구구!
칼데라의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성 내부가 통째로 흔들렸고, 에린의 몸이 마법진 위에서 옆으로 미끄러졌다. 천장의 석재 이음새에서 가루가 쏟아졌다. 수정 기둥에 투사된 영상 속 균열이 협곡을 가로질러 아르스 마그나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정화가 아니었다. 지맥 자체를 베어내고 있었다.
절대 방어선의 룬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외벽에서 충격파가 밀려왔다. 방어막과 성검의 힘이 충돌하며 아르스 마그나의 벽체에 균열이 갈렸다. 벨리알은 수정 기둥에서 손을 떼고 관측 영상을 응시했다. 성검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지맥의 맥동이 끊겼고, 끊긴 자리로 성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어선이 버텨냈다. 첫 번째 충돌. 룬이 빛나며 성광을 굴절시켰다. 두 번째 충돌에서 외벽의 균열이 넓어졌지만 구조는 유지되었다. 세 번째 충돌. 에린의 성물이 폭발적으로 빛났다. 대심판관의 성검에서 뻗어나온 정화의 파장이 성물의 공명에 부딪혀 상쇄되었다. 아르카디우스의 발이 한 걸음 뒤로 밀렸다.
벨리알이 그것을 보았다. 성물이 대심판관의 마법을 무효화하고 있었다. 같은 성스러운 힘이기에 가능한 상쇄. 이것이 열쇠였다.
기쁨은 없었다. 출력 97퍼센트를 유지하던 안정기의 수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맥이 베어지고 있었다. 안정기가 연결된 지맥 자체가 사라지면 출력도 방어선도 의미가 없어졌다.
벨리알은 설계도를 펼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도면이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기단부 구조, 지맥과의 연결점, 최하층의 거대한 마력원. 자신의 생명력과 연결된 그것.
"에린."
"네."
"성 전체를 부양시킨다."
에린의 손이 성물 위에서 굳었다. 벨리알은 이미 수정 기둥의 제어판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지맥에서 분리하면 안정기의 동력원이 사라져요."
"지맥 대신 마력원을 쓴다. 지하 최심부의 것을."
"그건 당신의 생명력과—"
"알고 있어."
벨리알의 손가락이 제어판의 룬을 하나씩 눌러갔다. 출력 경로 전환. 지맥 연결 해제 준비. 부양 술식 기동. 각 단계가 실행될 때마다 수정 기둥의 색이 보라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관측 영상 속에서 대심판관의 성검이 다시 빛났다. 이번에는 칼데라의 중심을 향해 곧장 내려찍었다. 쿠구구구! 지면이 쪼개지며 성광의 칼날이 아르스 마그나를 향해 전진했다. 에린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성 전체가 울리는 진동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벨리알은 에린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차갑지 않았다. 마력원과의 연결이 시작되면서 그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손바닥의 굳은 피가 녹아내렸다.
제어판의 마지막 룬을 눌렀다.
아르스 마그나의 기단부에서 폭발적인 빛이 쏟아졌고, 성 전체가 대지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