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벨리알은 눈을 떴다. 시야가 회색빛 잔해로 가득했고, 코끝에 탄 돌가루 냄새가 달라붙어 있었다. 등 아래로 갈라진 대리석의 모서리가 척추를 눌렀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성광의 잔향이 시야 끝에서 파르르 떨렸다.
에린이었다. 양팔을 벌린 채 성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백금빛 보호막이 반원을 그리며 둘을 감싸고, 그 너머로 대심판관의 잔당 세 명이 정화 마법을 연달아 쏟아붓고 있었다. 에린의 어깨가 충격파에 밀릴 때마다 발끝이 바닥에 반 뼘씩 홈을 팠다.
"일어나."
에린의 목소리는 짧았다. 떨리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한계에 가깝다는 증거였다. 보호막 표면에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지고 있었고, 성물의 빛이 맥박처럼 명멸했다.
벨리알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른손. 검지. 중지. 바닥에 닿는 차가운 대리석의 촉감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이 돌이 무엇인지, 어떤 결로 깎였는지, 어떤 룬이 새겨져 있었는지. 손끝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잔해였다.
그의 성이 아직 여기 있었다. 무너졌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벨리알은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갈비뼈 사이로 날카로운 통증이 관통했으나, 그는 그 고통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부러진 곳은 없다. 금이 갔을 뿐.
"에린."
"말하지 마. 집중이 흐트러져."
그녀의 발 아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보호막에 가해지는 압력이 지면까지 전이되고 있었다. 에린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성물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벨리알은 주위를 훑었다. 공중에 정지한 성의 파편들. 거대한 석재 블록, 뒤틀린 철골, 반쯤 부서진 샹들리에. 중력을 잊은 듯 떠 있는 것들이었다. 마지막 순간 발동된 지맥 안정기의 잔여 출력이 성의 잔해를 붙잡고 있었다.
벨리알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비탄의 회랑이 무너지던 밤. 은빛 갈기의 시체 위로 천장이 쏟아지고, 자신은 그 잔해 속에서 왼쪽 상반신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 그때 나는 생명력을 동력으로 썼다. 지맥과 내 피를 섞어 성을 유지하려 했다. 어리석었다. 피로 세운 벽은 피가 마르면 무너진다.
함정이 아름다워야 죽이는 것처럼, 성이 완벽해야 사는 것이다.
동력은 생명이 아니었다. 동력은 완성도 그 자체였다.
벨리알은 무릎을 세웠다.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주머니가 허벅지를 때렸다. 그 안에 접혀 있는 것. 첫 번째 설계도. 아르스 마그나의 최초 도면이었다. 여백마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그의 유일한 기도문.
손가락이 주머니를 스쳤다. 종이의 질감이 전해졌다. 얇고, 오래되었으며,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웠다.
"에린, 30초만 버텨."
"15초."
그녀는 정확했다. 벨리알은 그 정확함을 신뢰했다. 그래서 15초 안에 끝내기로 했다.
벨리알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에 선을 그었다. 검지 끝에서 마력이 아닌 것이 흘렀다. 의도. 구조. 비례. 황금비로 절단된 공간의 분할선이 보이지 않는 잉크로 허공에 새겨졌다.
석재 블록 하나가 떨렸다.
벨리알은 두 번째 선을 그었다. 수직. 수평. 대각. 세 개의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잔해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진동이 아니었다. 설계자의 의지에 재료가 답하는 호응. 건축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였다.
보호막이 뚫렸다.
쾅. 백금빛 장벽이 산산이 깨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에린이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등이 벨리알의 가슴에 부딪혔다. 충격에 벨리알의 손이 흔들렸으나, 허공에 그린 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잔당 중 가장 앞에 선 기사가 성검을 치켜들었다.
에린이 뒤로 팔을 뻗어 벨리알의 허리를 잡았다. 동시에 성물을 기사를 향해 던졌다. 백금빛 조각이 회전하며 날아갔다. 깡. 금속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비명이 폐허를 갈랐다. 기사의 자세가 찰나 흐트러졌다.
그 틈.
벨리알이 마지막 선을 그었다.
원. 완전한 원.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닫힌 도형.
공중에 정지해 있던 잔해 전체가 움직였다. 석재가 회전하며 기사들 사이로 쏟아졌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었다. 수평으로. 나선형으로.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며 세 명의 잔당을 에워쌌다. 돌이 돌을 물었다. 철골이 돌 사이를 꿰뚫었다. 즉석에서 감옥이 만들어졌다.
벽. 천장. 바닥.
3초 만에 완성된 완벽한 밀실이 잔당을 가뒀다.
내부에서 정화 마법이 터졌다. 빛이 돌 틈 사이로 새어 나왔으나, 벨리알이 만든 구조물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화의 에너지를 흡수하듯 룬이 돌 표면에 저절로 피어올랐다.
밀실 안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정화 마법이 자신을 가둔 벽에 반사되어 시전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벨리알의 무릎이 꺾였다.
에린이 그를 붙잡았다. 한 손은 허리를, 다른 손은 어깨를 지탱했다. 땅에 떨어진 성물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에린의 발치로 굴러왔고, 그녀는 발끝으로 그것을 걷어 올려 품에 넣었다.
"끝났어?"
"잔당은."
벨리알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공중에 떠 있는 성의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수천 개의 조각이 아직도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이 바닥나기 전에 끝내야 했다.
벨리알은 에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발바닥이 갈라진 바닥을 밟았다. 균열 속으로 푸른 빛이 맥동했다. 지맥이 살아 있었다.
"이 성은 내 피로 세운 게 아니야."
에린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그랬어. 설계가 완벽하면 재료가 스스로 자리를 찾는다."
벨리알이 양팔을 벌렸다. 열 손가락이 펼쳐졌다. 천천히,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듯 양손을 위로 올렸다.
지맥이 응답했다.
바닥의 균열에서 푸른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열. 스물. 백. 칼데라 전체에 매설된 지맥 회로가 동시에 점화되며 대지가 청색 혈관으로 뒤덮였다. 빛은 잔해로 흘러들었고, 돌과 철이 그 빛을 마셨다.
첫 번째 벽이 일어섰다.
바닥에 누워 있던 대리석 판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표면의 먼지가 털려 나가며 그 아래 감춰져 있던 부조가 드러났다. 날개 달린 뱀이 별을 삼키는 문양. 벨리알이 직접 조각한 것이었다. 대리석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정확한 각도로 기울어졌고, 옆에 떠 있던 다른 판과 맞물렸다.
이음새가 없었다. 접착제도, 모르타르도 쓰이지 않았다. 돌과 돌이 분자 수준에서 결합하며 단 하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벽면이 완성되었다.
두 번째 벽. 세 번째. 네 번째.
사방에서 벽이 솟아올랐다. 벨리알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잔해들이 궤도를 수정했다. 거대한 석재 기둥이 천천히 내려와 바닥에 뿌리를 내렸고, 그 위로 아치가 걸렸다. 아치의 곡선은 수학적으로 완벽한 현수선을 그렸다. 정점에서 키스톤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 구조 전체가 한 음계 높은 공명음을 냈다.
에린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성물을 움켜쥔 채 한 발 물러서며 올려보았다. 하늘이 아니었다. 천장이었다. 파편이었던 것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돔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천 조각의 흑요석과 백대리석이 교차하며 그린 문양은 아비스 칼데라의 지형도였다. 그 중심에 빛나는 점 하나. 아르스 마그나의 위치.
공명음이 커졌다.
단일한 음이 아니었다. 화음이었다. 벽과 기둥과 아치와 돔이 각각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며 하나의 코드를 이루었고, 그 소리가 칼데라 전체로 퍼져 나갔다. 흑요석 협곡의 바람이 잠들었다. 초속 30미터의 칼바람이 처음으로 멎었다.
벨리알의 코끝에 습기가 닿았다. 레테아 강에서 불어오는 안개였으나, 독성이 없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결계가 강물의 저주까지 걸러내고 있었다.
바닥에서 꽃이 피었다.
아니, 꽃이 아니었다. 마력 결정이 석재 틈을 비집고 자라나 꽃 형상을 이룬 것이다. 투명한 보라빛 결정이 빛을 받아 무지개를 흩뿌렸고, 그 빛줄기가 새로 세워진 벽면의 룬과 교차하며 복잡한 방어 회로를 활성화했다.
성이 스스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벨리알은 더 이상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내렸다. 설계가 완벽했기에 나머지는 구조 자체가 해냈다. 기둥이 벽을 부르고, 벽이 천장을 부르고, 천장이 첨탑을 불렀다. 연쇄적인 자기 조립이 건축의 속도를 넘어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첨탑이 솟아올랐다.
칼데라의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검은 첨탑. 표면에 새겨진 나선형 룬이 회전하며 빛을 발했고, 꼭대기에서 터진 마력의 파동이 반경 수십 킬로미터를 뒤덮었다. 선언이었다. 이곳에 성이 있다. 이곳에 왕이 있다.
벨리알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르스 마그나는 이제 건축물이 아니다. 살아있는 마법 그 자체다."
에린이 그를 돌아보았다. 벨리알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평소와 같았다. 손끝만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한 박자 늦게 내려갔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벨리알의 왼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마력을 과다하게 소진한 마족의 체온은 돌처럼 떨어진다는 것을 에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물의 온기가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벨리알은 손을 빼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었다.
재건된 성의 테라스로 나가는 통로는 아직 먼지가 가시지 않았다. 발밑에서 작은 마력 결정들이 부서지며 유리 밟는 소리를 냈다. 테라스에 닿자 바람이 불었다. 협곡의 칼바람이 아니었다. 성벽 너머로 불어오는, 마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에린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벨리알은 그것을 보았으나 말하지 않았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섰다. 아래로 칼데라의 전경이 펼쳐졌다. 한때 용사의 흉터라 불리던 척박한 대지 위에 지맥의 푸른 빛줄기가 그물처럼 뻗어 있었다. 그 위로 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거대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자.
침묵이 흘렀다.
이전의 침묵과 달랐다. 전투 전의 긴장도, 전투 후의 탈진도 아니었다. 에린의 손이 벨리알의 손 위에 얹혀 있었고, 난간의 돌이 두 사람의 체온을 천천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멀리서 성의 자동 복구가 계속되는 소리가 들렸다. 돌이 돌에 맞물리는 둔탁한 울림. 룬이 점화되는 잔잔한 윙윙거림.
벨리알은 가죽 주머니에서 접힌 설계도를 꺼냈다. 펼치지 않았다. 다만 종이의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여백에 적힌 이름들. 읽지 않아도 알았다. 손끝이 글자의 요철을 기억했다.
"이 성이 서 있는 한."
벨리알이 말을 멈췄다. 에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칼데라 너머, 협곡 너머, 레테아 강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름을 적을 일은 없게 만들겠다."
에린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성물이 품 안에서 따뜻하게 빛났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무기의 파편이, 지금은 그 아들의 곁에서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첨탑의 마력 파동을 타고 소식이 퍼져 나갔다. 아비스 칼데라에 새로운 성이 섰다는 것. 흑요석 협곡의 바람이 잠들었다는 것. 레테아 강의 저주가 걸러지고 있다는 것. 칠흑의 원탁에 속한 대악마들이 가장 먼저 감지했고, 서큐버스 자치구의 조공 행렬이 발을 멈췄다.
벨리알은 테라스에서 몸을 돌렸다. 성 내부로 향하는 복도에 새로 활성화된 룬들이 줄지어 빛나고 있었다. 벽면의 부조가 살아 움직이듯 미세하게 변형되고 있었으며, 천장의 모자이크가 실시간으로 마계의 지형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에린."
"응."
"성황청이 이 파동을 감지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에린이 성물을 꺼내 들었다. 표면의 빛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성물은 성황청의 감지 네트워크와 같은 주파수를 공유한다. 그것을 에린은 이 순간 처음 깨달았다.
"이미 감지했어."
벨리알의 눈이 좁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에린이 성물을 뒤집었다. 뒷면에 새겨진 각인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감지가 아니라 추적이야. 내 성물이 여기 있는 한, 성황청은 아르스 마그나의 좌표를 실시간으로 받고 있었어."
테라스 너머 협곡의 끝에서, 수십 개의 빛기둥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에린이 성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