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 암벽에 손톱이 박혔다.
에린은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렸다. 레테아의 강물이 발목 아래로 찰랑거리며 희뿌연 안개를 토해냈다. 한 방울이라도 피부에 닿으면 끝이다. 그걸 모를 리 없기에 에린의 팔뚝에는 핏줄이 밧줄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암벽 중턱에 매달린 채 숨을 고르는 동안, 그녀의 허리춤에서 희미한 백광이 맥박치듯 깜빡였다. 성물이었다. 주먹 반 크기의 은빛 결정이 가죽 주머니를 뚫고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움직임이 빨라."
벨리알은 작업실 중앙에 펼쳐진 대형 도면 위로 허리를 숙였다. 붉은 잉크가 담긴 만년필 끝이 양피지 위를 미끄러졌다. 에린의 이동 경로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으로 그려졌다. 흑요석 협곡 서쪽 사면, 레테아 강의 제3 지류를 피한 우회 루트, 그리고 지금 막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지점.
손가락 끝이 도면의 한 점에서 멈추었다. 양피지의 거친 결이 지문 사이로 파고들었고, 붉은 잉크가 마르지 않은 선의 끝에서 미세한 습기가 피부로 번졌다. 마왕성 아르스 마그나의 외곽 결계선까지 직선거리 1.7킬로미터. 그 숫자가 손끝의 감촉과 겹쳐지는 순간, 벨리알의 시야에 도면 위의 붉은 점이 에린의 체온으로 바뀌었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여자의 손가락 마디가 양피지 섬유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환각. 그녀가 정상에 올라서면 결계의 마력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거리에 진입한다.
벨리알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환각이 걷혔다.
"이 경로는 우연이 아니야."
그가 도면 위의 붉은 선을 손등으로 짚었다. 선은 곡선을 그리면서도 일관되게 지맥 안정기의 출력 중심축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나침반이 북극을 가리키듯.
만년필을 내려놓고 작업대 서랍에서 마력 측정기를 꺼냈다. 수정으로 깎은 원뿔형 기구의 내부에서 푸른 빛이 맴돌았다. 기구를 도면 위에 올려놓자 바늘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 파동. 0.003초 간격으로 반복되는 미약한 진동이 결계 바깥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감지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급 마족은커녕 상급 마도사조차 놓칠 만큼 희미한 파동.
에린의 성물이 그걸 읽고 있었다.
"분석해야 해."
벨리알은 도면을 걷어내고 그 아래 숨겨둔 두 번째 양피지를 펼쳤다. 지맥 안정기의 설계 원본. 아버지가 남긴 것이 아니라 벨리알이 처음부터 새로 그린 것이었다. 잉크 자국 사이사이에 빼곡한 수식과 룬 배열이 미세한 글씨로 적혀 있었고, 설계도 여백 한구석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카스탈. 지난달 외곽 순찰 중 용사에게 목이 잘린 정찰병.
벨리알의 시선이 그 이름 위를 스쳐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만년필을 집어 든 손가락 끝이 아주 잠깐 종이 위에서 떨었다.
"지맥 안정기의 제7출력선이 문제야."
혼잣말을 내뱉으며 설계도의 특정 구간에 원을 그렸다. 안정기는 12개의 출력선을 통해 칼데라 중심부의 마력 폭풍을 억제한다. 그중 제7출력선은 외곽 결계와 맞닿아 있는 유일한 접점이었다. 출력 파동이 새는 지점도 바로 거기.
"성물이 제7출력선의 잔향을 추적하고 있다면…"
도면 위에서 손가락이 선을 따라 움직였다. 결계 바깥으로 새어나간 파동, 그 파동을 감지한 성물, 성물이 에린을 이끄는 방향. 하나의 직선으로 연결되었다. 마왕성의 정확한 좌표가 특정되기까지 에린에게 남은 거리는 80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벨리알의 턱이 굳었다.
"지맥 안정기를 끄면?"
불가능하다. 안정기가 멈추는 순간 칼데라의 마력 폭풍이 되살아나고, 아르스 마그나의 모든 건축물이 36시간 내에 붕괴한다. 3년간의 작업이 먼지가 된다.
"출력선을 재배치하면?"
최소 이틀. 에린이 정상에 도달하기까지는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벨리알은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링 룬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칼데라 전역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다. 그중 하나에 에린의 모습이 잡혔다. 암벽 중턱에서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하는 장면.
성물의 백광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벨리알은 모니터링 룬 앞에서 발을 멈추고 에린의 허리춤에 매달린 성물을 관찰했다. 백광의 파장이 일정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맥박이 아니라 무언가에 반응하여 점점 빨라지는 공명. 먹이를 향해 발버둥치는 탐지 장치 같았다.
"저건 단순한 성물이 아니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황청이 용사에게 지급하는 표준 성물은 순백색의 균일한 빛을 낸다. 에린의 것은 달랐다. 은빛 안에 미세한 검은 실금이 섞여 있었다. 모니터링 룬의 확대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자 결정 표면의 균열 패턴이 드러났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 균열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박혔다가 빠지면서 생긴 방사형 충격 흔적.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여섯 갈래의 금이었다. 벨리알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도해를 떠올렸다. 선대 마왕의 흉갑에 남겨진 상흔의 형태학적 분석도. 여섯 갈래. 똑같은 패턴.
"그 파편이…"
말이 끊겼다. 벨리알의 손이 작업대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참나무 표면에 손톱 자국이 파였다.
에린이 들고 있는 것은 성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관통한 용사의 창, 그 창끝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성황청이 그걸 성물로 가공하여 새 용사에게 쥐여준 것이다. 선대 마왕의 피를 기억하는 조각이니 후계자의 마력에 공명하는 것은 당연했다.
벨리알의 호흡이 달라졌다. 짧고 날카롭게 들이쉬는 숨이 작업실의 정적을 갈랐다. 모니터링 룬의 푸른 빛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고, 턱 아래 근육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관객이 무대 장치를 뜯어보려 하는군."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의 건조한 톤이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저음이 공기를 눌렀다.
"예의 없는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지."
벨리알은 모니터링 룬에서 등을 돌렸다. 작업실 안쪽, 먼지 쌓인 천으로 덮인 무언가를 향해 걸어갔다. 천을 걷어내자 검은 대리석으로 깎은 의자가 드러났다. 의자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하고 왕좌라 부르기엔 너무 부서져 있었다.
등받이의 오른쪽 상단이 통째로 깨져나가 있었다. 팔걸이 하나는 아예 없었다. 좌면에는 길고 깊은 칼자국이 대각선으로 파여 있었다. 여섯 갈래의 금. 에린의 성물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충격 패턴이 대리석 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벨리알이 부서진 왕좌 앞에 섰다.
먼지가 내려앉은 대리석 표면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지하 기단을 통해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종아리까지 번졌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이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떨림이 왕좌의 잔해를 통해 증폭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뻗어 왕좌의 좌면을 쓸었다. 손바닥 아래로 대리석의 차가움이 스며들었다. 칼자국의 가장자리가 날카로워서 손끝에 미세한 통증이 번졌다. 벨리알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끝으로 여섯 갈래 금의 중심점을 더듬었다. 그곳에 아버지의 피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지만.
작업실의 소음이 사라졌다. 모니터링 룬의 윙거림도, 벽면 환기구를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도 귀에 닿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의 차가운 돌과 손끝의 얇은 통증만이 세계의 전부였다.
어깨가 내려갔다. 등을 짓누르던 무형의 무게가 어깨뼈를 따라 팔로, 팔에서 손끝으로, 손끝에서 왕좌의 대리석으로 흘러내렸다. 열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서늘한 정적이 차올랐다. 호흡이 길어졌다.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는 사이의 간격이 늘어나면서 떨리던 손끝이 잠잠해졌다.
왕좌의 칼자국 위에 놓인 손가락은 이제 미동도 없었다.
벨리알이 손을 거두었다.
그의 눈에 왕좌가 아닌 다른 것이 비치고 있었다. 작업실 벽면의 설계도, 아르스 마그나의 전체 평면도, 그리고 그 위에 붉은 잉크로 그려진 에린의 이동 경로. 시선이 그것들을 훑으며 계산이 시작되었다.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언어로 돌아간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결계 수복."
벨리알은 왕좌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습관이었다. 설계의 결론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 확정되는 그만의 의식.
"제7출력선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역위상 파동으로 덮는다."
그가 설계도 앞으로 돌아왔다. 만년필 대신 은빛 에칭 펜을 집어 들었다. 도면용이 아니라 직접 룬을 각인하는 도구였다. 펜 끝에서 마력이 가는 실처럼 피어올랐다.
"성물이 제7출력선의 파동에 공명하고 있으니, 같은 주파수의 역위상을 쏘면 상쇄된다. 성물이 읽는 신호가 사라지는 거지."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계도 위가 아니라 작업대 표면에 직접 룬을 새기는 거칠고 급한 작업이었다. 참나무 표면 위로 에칭 펜이 지나간 자리마다 은빛 선이 타올랐다. 역위상 결계의 핵심 회로도.
세 번째 룬을 각인하던 순간이었다.
작업실 동쪽 벽의 모니터링 룬 하나가 붉게 점멸했다. 벨리알의 손이 멈추었다.
모니터링 룬이 보여주는 영상 속에서 에린이 암벽 정상에 올라서고 있었다. 예상보다 30분 빠른 도달. 그녀의 손에는 성물이 아닌 다른 것이 들려 있었다.
소형 석궁. 볼트 끝에 성물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백광이 볼트 전체를 감싸며 화살촉을 태양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성광 탄환."
벨리알이 중얼거리는 사이, 에린이 석궁을 들어올렸다. 조준 방향은 칼데라 중심부. 아르스 마그나의 외곽 결계가 위치한 정확한 좌표였다.
성물이 이미 위치를 특정한 것이다.
벨리알의 발이 작업대에서 떨어졌다. 에칭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링 룬 앞으로 달려가는 세 걸음 사이에 에린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백광의 궤적이 밤하늘을 갈랐다.
볼트가 결계에 도달하기까지 4초. 벨리알은 모니터링 룬 앞에서 두 손을 들어 긴급 방어 명령 시퀀스를 입력했다. 열 개의 룬이 동시에 점멸하며 결계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충돌은 소리가 아니라 빛으로 왔다.
파직. 모니터링 룬 열두 개 중 세 개가 동시에 터졌다. 수정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조각이 벨리알의 왼쪽 뺨을 베고 지나가 뒤편 석벽에 박혔고, 다른 파편 두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작업대 위의 도면을 찢었다. 작업실 전체가 한 차례 요동쳤다. 천장에서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머지 아홉 개의 모니터링 룬도 화면이 지직거리며 영상이 끊어졌다.
벨리알은 뺨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 않았다. 눈앞의 룬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모두 신호가 끊겼다. 일곱 번째에서 겨우 흐릿한 영상이 잡혔지만 에린이 있던 암벽 정상은 비어 있었다.
"시야가 없어."
이를 갈았다. 외곽 결계의 모니터링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것은 에린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계자가 눈을 잃었다.
그의 시선이 작업대 위로 돌아갔다. 깨진 모니터링 룬의 잔해 중 하나가 은은한 잔광을 품고 있었다. 성광 탄환의 충격파가 남긴 잔류 마력이었다. 벨리알은 그 파편을 집어 들었다.
수정 조각이 손바닥 위에서 미약하게 떨렸다. 성물의 파동이 아직 새겨져 있었다. 벨리알은 파편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수정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피부를 눌렀다. 통증이 아니라 압력이었다. 그 압력 속에 미세한 진동이 살아 있었다. 성물의 잔향. 에린의 위치를 가리키는 마지막 실마리.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수식을 읊조렸다. 파편에 남은 성광의 잔류 파장, 제7출력선의 역추적 좌표, 충돌 시점의 각도. 세 가지 변수가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손바닥 위의 떨림이 왼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다.
서북서 방향.
눈을 떴다.
"결계 서북서 구간. 제3감시탑 잔해 부근."
벨리알은 파편을 주머니에 넣고 작업실 구석에 세워둔 외투를 집어 들었다. 검은 천 안쪽에 소형 에칭 펜 세 자루와 비상용 룬석 여섯 개가 꿰매어져 있었다. 외투를 걸치는 동안 부서진 왕좌가 시야 한구석에 걸렸다. 여섯 갈래 칼자국이 작업실의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벨리알은 왕좌를 보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의 도면을 한 번 접어 외투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작업실 문이 열렸다. 칼데라의 건조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마력 폭풍이 잠든 중심부의 고요와 달리 외곽으로 갈수록 바람에 실린 흑요석 가루가 피부를 긁었다.
벨리알은 문턱을 넘으며 외투 주머니 속 깨진 룬 조각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파편의 떨림이 여전히 서북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작업실 안, 부서진 왕좌 위에 먼지가 다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벨리알의 발이 흑요석 지면을 밟았고, 칼데라의 어둠이 그의 등 뒤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