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마."
에린의 등이 흑요석 벽면에 부딪혔다. 충격이 어깨를 관통했다. 자상이 벌어지며 피가 솟았고, 뜨거운 액체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협곡의 칼바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열린 살점 위를 훑었다. 근육이 경련했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왔고, 시야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번졌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검도, 발톱도 아니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먼저 보였다. 그 손가락 끝에는 잉크와 마력석 분말이 엉겨 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설계 도면을 너무 오래 짚어 생긴 굳은살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
벨리알 아르스 노바.
에린은 허리춤의 성물에 손을 뻗으려 했으나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의 자상이 근육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왼손으로 성물의 자루를 더듬었지만, 벨리알의 시선은 그녀의 무기가 아닌 상처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절단면이 깨끗하군."
살의가 담긴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도면 위의 선분을 평가하듯 건조하고 정밀한 관찰이 담긴 음성. 에린의 왼손이 성물 자루 위에서 멈췄다.
"흑요석 바람의 각도가 올해 들어 동쪽으로 7도 틀어졌어. 4서클 방어막으로도 절개가 되는 건 그 때문이지."
에린이 이를 악물었다. 벨리알과의 거리는 세 걸음. 왼손으로 성물을 뽑아 찌를 수 있는 거리였다. 금색 홍채 안에 아무런 적의가 없었다. 독서에 몰입한 학자의 눈. 풀어야 할 방정식을 발견한 기술자의 눈.
"너, 죽이러 온 거 아니야?"
에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람 소리에 반쯤 묻혔다.
"죽일 거였으면 네가 벽에 부딪히기 전에 끝났어."
벨리알이 한 걸음 다가섰다. 에린의 왼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는 그녀의 무기를 빼앗으려는 동작 대신 외투 안주머니에서 얇은 마력 도구를 꺼냈다. 지혈용 룬 스탬프. 에린은 그것을 마계의 기술 보고서에서만 본 적이 있었다.
"왜."
"네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이 구역의 감지 결계를 오염시키고 있거든. 인간의 혈액은 마력 농도가 낮아서 결계 파장에 잡음을 만들어."
사무적인 이유. 에린은 그의 눈을 다시 살폈다. 거짓을 찾으려 했다.
"잡음이 싫으면 나를 여기서 밀어내면 되잖아."
"밀어내면 협곡 바닥이야. 거기서 죽으면 혈액이 바람을 타고 더 넓게 퍼져. 비효율적이지."
벨리알이 룬 스탬프를 에린의 어깨 가까이 가져갔다. 멈춘 건 그가 아니라 에린이었다. 왼손의 성물을 그의 목에 겨눈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물의 끝에서 희미한 성광이 맥동했고, 그 빛은 벨리알의 턱선 아래를 유백색으로 물들였다.
"이거 내려놓으면 지혈해줄게."
"내려놓을 것 같아?"
"안 내려놓아도 할 거야. 다만 각도가 불편해서."
에린의 눈이 좁아졌다. 벨리알은 진심이었다. 성물의 날이 자신의 경동맥 위에 걸려 있다는 사실보다 지혈 각도가 불편하다는 게 더 신경 쓰인다는 투였다.
왼팔을 2센티미터 내렸다. 성물의 끝이 그의 쇄골로 향했을 뿐 여전히 살상 범위 안이었지만, 벨리알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룬 스탬프를 상처 위에 가볍게 눌렀다.
마력이 스며들었다. 차가웠다. 인간의 치유 마법이 따뜻한 물을 부어주는 감각이라면, 이것은 얼음 결정이 상처의 가장자리를 봉합하는 느낌이었다. 피부 조직이 억지로 밀착되는 감각에 에린의 이가 맞부딪혔다.
"참어. 마족용이라 인간 피부에는 좀 거칠어."
그의 손가락이 상처 주변의 피를 닦아냈다. 외투 소매를 걷어 쓴 것이었고, 소매 안쪽에는 빼곡한 수식이 잉크로 적혀 있었다. 에린의 시선이 그것에 걸렸다.
"그 소매—"
"메모장 대용이야. 양피지 아까워서."
지혈이 끝났다. 룬 스탬프를 거두며 벨리알이 반 걸음 물러섰을 때, 에린은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자상 위로 얇은 마력의 막이 서리처럼 앉아 있었다. 출혈은 멈췄다. 통증은 남아 있었으나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눌려 있었다.
"……고마워."
그 말이 입에서 나온 뒤에야 에린은 자신이 마왕의 후계자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성물을 쥔 왼손의 관절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칼끝을 다시 올리지는 않았다.
벨리알은 감사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이 에린의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정확히는, 에린이 쥐고 있는 성물 자체를 향해.
"그것 좀 보여줘."
"미쳤어?"
"안 뺏어. 네 손에 쥔 채로 봐도 돼."
에린의 손가락이 성물의 자루를 감싸 쥐었다. 은빛 금속 위로 성황청의 축복문이 새겨져 있었고, 칼날의 중심에는 미세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벨리알의 결계를 타격했을 때 생긴 것이다.
벨리알이 무릎을 꿇었다. 에린의 손 높이에 자신의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금색 홍채가 성물의 균열 위를 더듬듯 훑었고, 그의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며 뭔가를 세고 있었다.
"파편 접합이 서툴러."
"뭐?"
"이 칼날, 원래 하나의 금속이 아니야. 최소 세 조각을 성력으로 이어 붙인 건데, 접합부의 응력 분포가 고르지 않아. 여기—" 그의 손가락이 칼날의 중앙 균열을 가리켰다. "—이 지점에 하중이 집중돼. 강하게 한 번 더 쓰면 두 동강 나."
에린의 손이 떨렸다. 성물은 그녀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전해진 것이었다. 선대 용사가 마왕을 찔렀다는 전설의 파편. 성황청은 그것을 에린에게 하사하며 '마왕을 멸한 신성한 유산'이라 했다.
두 동강. 그 단어가 폐부를 눌렀다.
벨리알은 에린의 표정 변화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보고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성물의 구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 위에는 마왕성 어딘가의 단면도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고, 여백에는 인간의 언어로 된 주석이 빼곡했다.
에린의 눈이 그것을 잡았다. '응력 전이 구간', '파쇄 임계점', '미학적 하중 경로'. 마족의 문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공용어로, 성황청 학술원에서 쓰는 공학 표기법으로 적혀 있었다.
"너, 인간의 글을 읽을 줄 알아?"
벨리알의 손이 양피지 위에서 멈췄다. 찰나의 정지.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을 알아야 함정을 만들지."
대답이 아니라 회피였다. 에린은 그것을 알았으나 추궁할 여유가 없었다. 벨리알이 양피지 위에 에린의 성물 단면을 스케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확했다. 성황청의 감정사가 일주일 걸려 그리는 구조도를 그는 맨눈 관찰만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접합부 세 곳의 각도를 12도씩 틀어서 재배열하면 하중이 분산돼. 그리고 이 축복문—" 벨리알의 펜 끝이 칼날에 새겨진 성황청 문양을 가리켰다. "—장식이야, 이건. 구조적 기능이 전혀 없어. 오히려 금속 단면을 깎아먹고 있지."
에린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마왕의 후계자가 용사의 성물을 개선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신성 모독인지 기술적 호의인지, 그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양피지 위를 움직이는 동안 에린은 벨리알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협곡의 바람 소리가 멀어졌다. 아니,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귀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벨리알이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얕은 호흡음. 펜촉이 양피지를 긁는 사각거림.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마력의 냄새. 구리와 오래된 잉크가 섞인 듯한 건조한 향.
적의가 없었다.
에린은 전장에서 수백 번 적의 살기를 맡아왔다. 살기는 피부 위에 가시처럼 돋는 것이다. 지금 벨리알에게서는 그것이 없었다. 대신 있는 것은 문제를 풀어내는 데 몰입한 사람 특유의 무방비한 열중이었다. 금색 눈이 성물의 구조를 읽으며 미세하게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했고, 입술은 수치를 중얼거리며 움직였다. 왼손 검지의 잉크 자국이 양피지를 누를 때마다 번졌고, 그가 한참 뒤에야 알아채고 소매로 문지르는 것까지.
에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성물을 쥔 왼손의 관절이 풀렸다. 칼끝이 바닥을 향했다.
벨리알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혹은 눈치채고도 도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벽에 기댄 등에서 흑요석의 차가움이 전해졌으나 그것이 더 이상 위협의 감각이 아니었다. 단단한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물리적인 안정감.
"이 접합 기술, 누가 한 거야?"
벨리알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몰라. 성황청에서 받은 그대로야."
"허술해. 대장장이가 아니라 사제가 한 것 같군. 기도로 쇠를 붙이면 이 꼴이 나."
에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성황청 사제들의 기술력에 대해 에린이 품어온 의문과 정확히 같은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술원 시절, 성물의 내구도 보고서를 올렸다가 '신성한 유물에 공학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질책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개선안. 정말로 할 수 있어?"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안 했느냐가 맞는 질문이지. 구조를 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벨리알이 양피지를 에린 쪽으로 밀었다. 스케치 위에는 성물의 현재 구조와 개선안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개선안의 접합부에는 정교한 각도 표기가 달려 있었고, 불필요한 축복문을 제거한 자리에 구조 보강 룬이 제안되어 있었다. 마족의 문양이 아니라 중립적인 공학 룬.
에린이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성물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그때였다. 칼날이 흑요석 바닥에 닿으며 낮은 금속음을 냈다. 벨리알의 시선이 처음으로 에린의 손을 보았다. 무기를 놓은 손. 그의 눈동자가 0.5초간 흔들렸으나,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양피지로 되돌렸다.
"이 룬 배치라면 성력과 마력의 간섭도 최소화할 수 있어. 네 축복이 깎이는 일 없이 순수하게 물리적 강도만 올라가지."
에린이 양피지 위의 수식을 따라 읽었다. 학술원에서 배운 공학 기초가 벨리알의 설계를 해독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적의 기술로 아군의 무기를 고친다. 성황청이 알면 이단 심판 대상이었다.
수식은 정확했다. 틀린 곳이 없었다.
"이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야."
벨리알이 펜을 접었다. 처음으로 에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부서지는 걸 못 보는 성격이라서."
그 한마디가 협곡의 공기 속에 머물렀다. 에린은 그 말이 성물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더 넓은 무언가에 대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금색 눈에 어떤 집요한 진심이 서려 있다는 것만은 읽을 수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에린이 먼저 느꼈다. 흑요석 협곡의 바람은 늘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었다. 지금은 동쪽에서 역풍이 밀려왔다. 바람 속에 섞인 것은 자연의 냄새가 아니었다. 정제된 마력석 연소 냄새. 성황청 비행정의 추진 연료.
벨리알이 일어섰다. 학자의 몰입이 지워지고 설계자의 냉정함이 돌아왔다.
"몇이야."
에린이 협곡 틈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레테아 강 너머, 검은 하늘의 경계선을 따라 불빛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열, 스물, 더. 비행정 편대가 횡렬로 전개하며 협곡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선두 비행정의 뱃머리에는 용사 협회의 금색 문장이 탐조등에 비춰 선명하게 빛났다.
대규모 토벌대.
에린의 손이 바닥의 성물로 향했다. 잡아야 했다. 일어서야 했다. 손이 닿기 전에 다른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벨리알의 손이었다. 잉크 자국이 묻은, 굳은살이 박힌, 차가운 손.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가면 죽어. 저건 수색대가 아니라 섬멸대야."
벨리알이 에린의 손목을 잡아 올려 세웠다. 성물은 그녀의 왼손에 쥐어졌고, 벨리알은 이미 등을 돌려 협곡의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암벽 사이의 좁은 갈라진 틈. 그 너머로 마력의 고요한 파동이 느껴졌다. 지맥 안정기의 영역.
에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행정의 탐조등이 협곡 입구를 훑기 시작했다. 빛의 원이 점점 가까워졌다.
"빨리."
벨리알의 목소리가 틈 안쪽에서 들려왔다.
에린은 성물을 허리에 꽂고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좁은 통로의 끝에서 벨리알이 손을 내밀고 있었고, 에린은 그 손을 잡았다. 잉크와 구리 냄새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벨리알이 에린을 끌어당기며 뒤쪽의 암벽에 손을 갖다 댔다. 룬이 빛났다. 돌벽이 미끄러지듯 닫혔다.
탐조등의 빛이 차단되었다. 어둠 속에서 에린의 귀에 들린 것은 벨리알의 숨소리와 닫힌 벽 너머로 멀어지는 비행정 엔진의 진동뿐이었다.
그리고 벽 안쪽,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의 천장에서 수백 개의 룬 등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드러난 것은 좁은 통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홀이었다. 천장의 높이는 가늠할 수 없었고, 흑요석과 백금으로 편조된 아치가 열두 개의 기둥 사이를 포물선으로 이었다. 기둥마다 마력 도관이 혈관처럼 표면을 타고 올라갔으며, 도관 속을 흐르는 푸른 빛이 홀 전체를 심해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미완성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조각상의 눈구멍마다 감지 룬이 박혀 있었고, 손에 쥔 창과 방패의 각도는 침입자의 동선을 기하학적으로 봉쇄하는 배치였다. 아름다웠다. 동시에,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자가 어떤 경로로 죽게 되는지를 선언하는 설계도이기도 했다.
아르스 마그나의 입구.
벨리알이 에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뒤쪽의 철문을 잡아당겼다. 경첩이 울며 문이 닫히는 순간, 에린은 자신이 마왕성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철문이 완전히 닫혔고, 조각상들의 눈구멍에서 감지 룬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