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균열의 소리
카일의 파동이 달라지고 있었다.
저녁. F급 기숙사.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방 안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카이락스는 알테리온 연구실에서 가져온 자료를 읽고 있었다. 지하 2층 서고의 오래된 문서. 학당 건설 당시의 결계 설계 기록. 양피지가 바스라질 듯 얇았고, 잉크는 50년의 세월 동안 갈색으로 변해 있다. 조심스럽게 넘기지 않으면 찢어질 것 같았다.
카일은 방 한쪽 바닥에 앉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두 손을 맞댄 자세. 성흔 파동을 순환시키는 기본 수련 자세였지만 --- 카일이 하고 있는 것은 기본이 아니었다. 마력학 수업에서 카이락스가 알려준 '2번째 회로 방향 전환'을 매일 밤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교수가 과제로 낸 것도 아니다. 카이락스가 '해봐'라고 한 것은 한 번뿐이었다. 이후로 카일이 스스로 매일 밤 이 훈련을 반복한다.
"...하."
카일이 숨을 내뱉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바닥에 앉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등을 세웠다. 집중하는 얼굴.
근성이 있군. 재능보다 중요한 것.
카이락스는 자료를 읽으면서 카일의 파동을 듣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들린다. 심연의 군주에게 인간의 성흔 파동은 방 안의 소음과 같았다. 시계 소리처럼 --- 무시할 수도 있고,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었다.
카일의 파동이 안정적으로 흘렀다. 2번째 맥점의 방향이 시계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좋은 흐름. 첫날보다 안정도가 올랐다. 몸이 기억하기 시작한 것.
3분이 지났다. 파동이 꺾이기 시작했다. 역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 집중이 흐트러지면 몸이 옛 습관으로 돌아간다. 잘못된 방향이 오래된 길이라 --- 의식이 느슨해지면 물이 그쪽으로 흘렀다.
카이락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에 카일의 집중이 끊겼다. 파동이 멈추었다. 리셋. 카일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카일은 눈치채지 못했다. 찻잔 소리가 자신의 훈련을 리셋시켰다는 것을.
5분 뒤 다시 꺾였다. 카이락스는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카일이 다시 멈추었다. 리셋.
7분. 또 꺾였다. 카이락스가 기침을 했다. 리셋.
카일이 잠깐 눈을 떴다.
"야, 감기야?"
"아니."
"물 좀 마셔. 찻잔 거기 있잖아."
카이락스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차. 쓴맛이 혀에 남았다. 카일이 다시 눈을 감았다. 훈련을 재개했다. 방향이 올바르다. 리셋이 성공한 것.
10분. 이번에는 꺾이지 않았다. 10분 30초. 11분. 파동이 안정적으로 흐른다. 이전보다 오래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성흔에 손을 대지 않는다. 허무의 파동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흐름이 굳어지기 전에 끊어준다. 찻잔 소리로, 책장 소리로, 기침 소리로. 카일의 의식을 리셋시켜 --- 몸이 올바른 방향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
침묵으로 교정하는 방법.
백오십 년 전 심연에서 마족 장수들을 훈련시킬 때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말로 가르치면 말에 의존한다. 몸으로 깨우치면 몸이 기억한다. 가장 오래 남는 교육은 --- 가르쳤다는 것을 모르게 가르치는 것.
"...됐다."
카일이 중얼거렸다. 눈을 떴다. 손바닥 위에서 파동이 안정적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2각의 불안정한 떨림이 줄어들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 방향이 맞아들고 있다. 탁한 회색빛이 아니라 옅은 청색이 도는 파동.
걸렸군. 하지만 아직 40% 수준이다.
카일이 손을 쥐었다 폈다. 자신의 변화를 느끼는 표정.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성취감. F급에 배정받은 이후 처음 느끼는 종류의 감정일 터다.
이 감정이 중요하다.
카이락스는 그것을 알았다. 성취감은 다음 훈련의 연료가 된다. 한 번 맛본 변화가 다음 변화를 부른다. 심연에서 마족 병사를 훈련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처음 기술을 익힌 날, 살아남은 날, 처음 적을 벤 날. 그 감각이 병사를 전사로 만들었다.
카이락스는 시선을 자료에 돌렸다. 카일은 그 시선을 몰랐다. 자신의 성장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을.
"야."
카일이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땀을 수건으로 닦는다.
"넌 맨날 그 자료 읽으면서 뭘 하는 거야."
"공부."
"무슨 공부를 밤마다 해. 0각인데."
"0각이니까 하는 거지."
카일이 코를 킁 했다. 납득은 안 되지만 반박할 말도 없다는 표정.
"나 좀 달라진 것 같아."
"뭐가."
"파동. 오늘은 좀 더 오래 갔어. 전에는 1분도 못 버텼는데 오늘은 한 7분? 8분?"
3분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거 있어."
"말해봐."
"네가 기침하거나 찻잔 소리 낼 때마다 집중이 더 잘 돼. 우연인가? 뭔가 리듬이 맞는 느낌이야."
카이락스는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인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 감각적으로는 알아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묵의 교정이 완벽하려면 상대가 끝까지 모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카일의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성장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
"우연이다."
"그래? ...근데 진짜 신기해. 네 옆에서 훈련하면 더 잘 되는 느낌이야."
착각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찻잔 소리로 리셋된 뒤의 시간을 카일은 연속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끊어졌다는 것을 모르니까 ---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다고 느끼는 것.
"좋은 징조다."
"그치? 뭔가 감이 오는 것 같거든. 물이 흐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막혀 있던 데가 뚫리는 것 같은."
"맞는 표현이다."
카일의 눈이 밝아졌다. 칭찬에 약한 얼굴. 이 인간은 누군가의 인정에 목마른 자다. F급에 배정받은 뒤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을 터다.
"내일은 좀 더..."
카일이 담요를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말이 담요 속으로 사라졌다.
카이락스는 그 중얼거림을 들었다. '좀 더.' 매일 밤 같은 말. 이 인간은 잠들기 전에 내일을 약속한다. 아무에게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그 반복이 회로를 바꾸고 있었다. 찻잔 소리보다, 책장 소리보다 --- 이 인간의 의지가 교정의 핵심이다.
2분 뒤 잠들었다. 코 고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규칙적인 리듬. 성흔 파동이 잠결에도 흘러나오고 있다. 아까보다 안정적이다.
야간. 본관 지하 2층.
카이락스는 알테리온의 열쇠를 사용해 들어왔다. 조교 자격. 합법적 접근. 열쇠가 자물쇠에 맞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새로 박힌 감응석이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보강된 결계가 카이락스의 조교 등록을 확인하고 --- 반응하지 않았다.
연구실이 아닌 곳으로 향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야간 순찰은 30분 간격이다. 다음 순찰까지 22분. 충분하다. 감응석의 푸른 빛이 복도 바닥에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그림자가 빛줄기를 가로질렀다.
복도 끝. 서고.
오래된 나무 문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렸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래된 양피지와 가죽 표지가 만드는 냄새. 알테리온의 연구실과 비슷하지만 더 진하다. 서가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책등이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마력등 하나가 천장에서 흐릿하게 켜졌다 --- 인기척에 반응하는 자동 점등 장치.
출입 기록부를 찾았다. 지하 2층의 야간 출입 기록. 가죽 표지의 두꺼운 장부. 표지에 먼지가 없다 --- 최근에 누군가 열어본 것. 카이락스가 처음은 아니라는 뜻.
3개월치 기록을 훑었다. 손가락으로 기록을 짚어 내려갔다. 잉크의 농도가 달랐다. 오래된 기록은 갈색, 최근 기록은 검은색. 필체도 여럿이다. 기록을 작성하는 당직자가 매번 다르다는 뜻. 하지만 기록의 형식은 통일되어 있었다 --- 이름, 시각, 목적, 퇴실 시각.
야간에 지하 2층을 출입한 교수. 이름이 반복되는 것은 두 명이었다.
알테리온. 규칙적.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연구실 사용 기록과 일치한다. 밤에 홀로 전쟁 기록을 정리하는 습관. 야도르 산맥의 지도를 닦는 시간이기도 했을 터다. 의심할 이유가 없다 --- 지금으로서는.
두 번째.
카이락스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기록란에 이름이 없었다. 공백. 잉크가 번진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긁힌 것도 아니다. 결계로 은폐된 것이었다.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은폐 결계. 인간의 눈에는 빈칸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이락스의 눈에는 --- 결계의 결이 보였다. 투명한 실이 글자 위를 덮고 있는 것처럼.
허무의 실을 가늘게 흘렸다. 0.001%. 손끝에서 투명한 실이 기록부 위로 내려갔다. 은폐 결계의 패턴을 읽었다. 결계의 구조가 펼쳐진다. 실의 엮임 방식. 매듭의 위치. 파동의 잔향. 일곱 겹으로 꼬인 결계다. 꽤 정밀하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풀 수 없는 수준. 하지만 심연의 눈에는 --- 유리창 너머를 보는 것과 같았다.
눈이 좁아졌다.
이 결계의 결. 월식의 숲에서 파편을 건드리던 것과 --- 동일하다. 벨제르가 보고한 '학당 내부인이 파편을 자극하고 있다'는 정보. 그 자극의 패턴과 지금 눈앞의 은폐 결계 패턴이 같았다.
같은 자.
파편을 자극하는 자. 출입 기록을 은폐하는 자. 동일 인물.
결계 패턴의 결을 기억에 새겼다. 성흔이 아닌 힘. 인간의 것이 아닌 --- 하지만 심연의 순수한 파동과도 다른 무언가. 중간 지대의 힘. 심연의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결. 혹은 --- 인간의 껍질을 가진 다른 무엇의 결.
기록부를 닫았다. 서가에 돌려놓았다. 먼지의 위치를 원래대로 복원했다 --- 전장에서 배운 습관이다. 적진에 침투한 뒤 흔적을 지우는 기본.
네가 누구든, 흔적을 같은 방식으로 남기는군. 그것이 네 약점이다.
하나의 결계 패턴으로 두 가지를 했다. 파편을 자극하는 것과 기록을 은폐하는 것. 효율적이지만 위험한 선택. 같은 도구를 반복 사용하면 --- 추적자에게 서명을 남기는 것과 같다. 심연에서 그런 실수를 한 자는 오래 살지 못했다.
이 자는 추적당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고려하되 무시한 것인가. 전자라면 아마추어. 후자라면 --- 자신감. 자신을 추적할 자가 없다고 확신하는 자.
까다롭겠군.
기록부의 빈칸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은폐 결계 아래에 이름이 있다. 허무의 실을 더 깊이 흘리면 읽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0.001% 이상을 사용하면 잔향이 남는다. 그 잔향을 배후가 감지할 가능성이 있다. 추적자가 추적당하는 상황. 아직은 위험을 감수할 때가 아니다.
서고를 나왔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올랐다. 봉인된 문 앞은 지나치지 않았다. 아직이다. 다음에 그 문을 열 때는 --- 배후의 이름을 알고 열어야 한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카일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성흔 파동이 잠결에도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낮보다 오히려 잠들었을 때가 더 안정적이다. 의식이 간섭하지 않으니까. 몸이 올바른 방향을 기억하기 시작하면 --- 의식이 방해하지 않을 때 더 빠르게 교정된다.
곧이겠군.
카일이 잠꼬대를 했다. "...시계 방향..." 훈련의 잔상이 꿈에까지 스며든 것. 몸이 기억하기 시작하면 잠에서도 반복한다. 좋은 징조다.
3각 각성. 며칠 안이다. 카일의 몸이 준비되고 있었다. 물이 차오르고 있다. 댐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
카이락스는 창가에 서서 월식의 숲을 보았다. 파편의 맥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잠잠하지만 죽지 않은 맥동.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파편도, 배후도.
배후의 윤곽이 좁혀지고 있다. 결계 패턴이라는 단서를 얻었다. 교수 권한을 가진 자. 알테리온 연구실 방향에서 접근한 자. 심연의 도구를 사용하는 자. 하지만 아직 이름은 없다.
학당에 교수는 열두 명. 그중 지하 2층 출입 권한을 가진 자가 다섯. 다섯 중 야간 출입 기록이 있는 자가 둘 --- 알테리온과, 이름이 지워진 자.
다섯에서 하나를 뺀 넷. 알테리온이 아니라면.
알테리온이라면 --- 그것은 다른 문제다.
아직 판단하지 않았다. 증거가 부족하다.
파편은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전장에서 패배보다 나쁘다. 잘못된 적을 치면 진짜 적이 숨을 곳을 얻는다.
기다린다. 조금 더.
카일의 파동과 파편의 맥동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나는 안정을 향하고, 하나는 각성을 향하고 있다. 방향이 반대다. 카일이 성장하는 속도와 파편이 깨어나는 속도. 어느 쪽이 먼저인가.
그 '조금'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 파편만이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