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전장의 눈
알테리온의 연구실은 전장의 냄새가 났다.
오래된 가죽과 잉크, 녹슨 금속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먼지 냄새도 있었다 --- 오래된 양피지가 만드는 종류의 먼지. 창문이 좁았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상 위에 직사각형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마력등은 꺼져 있었다. 자연광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마력등의 빛을 싫어하는 것인지.
벽에는 지도가 빼곡했다. 성휘 학당 주변 지형도, 대륙 전체도, 그리고 --- 전쟁 당시의 전선 배치도. 지도마다 핀이 꽂혀 있었다.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각각 아군, 적군, 교전 지점을 의미하는 군사 표기. 핀의 수가 많았다. 수백 개. 전쟁의 규모가 벽 위에 펼쳐져 있다.
책상 위에 어제 실기 평가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카이락스의 이름에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밑줄이 두 번. 강조 중의 강조. 기록지 옆에 찻잔이 식어 있었다 --- 밤새 이 기록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뜻.
알테리온이 문을 닫았다. 잠금 결계를 걸었다. 결계가 활성화되면서 벽의 지도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조치. 책상 앞에 앉았다.
카이락스는 서 있었다. 의자는 있었지만 앉으라는 말이 없었다. 심문의 자세. 세르한이 했던 것과 같은 구도. 다만 세르한은 분노로 심문했고, 알테리온은 관찰로 심문한다.
책상 위의 잉크병이 굳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채. 밤새 기록을 하다가 뚜껑을 닫는 것을 잊었다는 뜻. 이 교수는 어젯밤 이 방에서 카이락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찻잔의 차가 식을 때까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듣겠습니다."
"손목의 장치. 성흔 위장 아티팩트지?"
카이락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알테리온은 그 침묵을 읽을 수 있는 자다.
"거짓말은 됐고."
알테리온이 기록지를 집었다.
"기본 과제에서 1각 수준의 파동을 보였다. 하지만 대전에서는 5각의 전력 일격을 손가락 하나로 꺾었다."
기록지를 내려놓았다.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가죽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에 화상 흔적이 있었다 --- 마력 폭주를 맨손으로 억제한 적이 있는 손.
"1각의 신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파동을 읽지 않고 전력 일격의 궤도를 교정한다? 그건 상대의 검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팔꿈치의 미세한 각도 오차까지 눈으로 읽어낸다는 뜻이다."
알테리온의 눈이 카이락스를 찍었다.
"네가 어디서 그런 물건을 구했는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더 궁금한 건 --- 네 전투 기술의 출처다. 학당의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실전이다. 그것도 수천 번의 실전."
"교수님도 실전을 겪으셨으니까 아시는 거 아닙니까."
알테리온의 손이 멈추었다. 되묻는 것이 아니라 동류를 알아보는 말이었다. 1초의 침묵. 알테리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믿지 않는 웃음이 아니다.
"...제법이군."
카이락스는 알테리온의 눈을 보았다. 오른쪽 눈 위의 칼자국. 50년 전 전장에서 받은 상처. 칼날이 눈 위를 스친 흔적. 조금만 더 깊었으면 눈을 잃었을 터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상처.
"선택지를 주겠다."
알테리온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하나. 출처를 말한다. 모든 것을. 어디서 그 기술을 배웠고, 어디서 그 아티팩트를 구했는지."
"둘."
"내 보조 조교로 들어온다. 연구실 출입권과 F급 이상의 시설 이용권을 준다. 대신 내 수업 보조와 실전 훈련 기록 정리를 맡는다."
카이락스는 계산했다. 보조 조교. 연구실 출입권. 지하 2층 접근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진다. 출입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 배후를 추적할 경로가 열린다.
첫 번째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출처를 말한다는 것은 정체를 밝히는 것. '저는 심연의 군주이고, 백오십 년 동안 전쟁을 지휘하며 검술을 익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
"연구실 자료 열람 권한."
알테리온이 눈을 좁혔다. 0각 학생이 연구실 자료 열람을 요구하는 것. F급에게 서고 접근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 그 질문이 눈에 떠 있다.
"네 등급으로는 불가능하다. 서고는 B급 이상 접근 자격이야."
"그래서 조건입니다."
"뭘 찾으려고?"
"공부."
"거짓말치고는 성의가 없군."
"거짓말 아닙니다. 배울 것이 많은 학당이니까."
3초의 침묵. 알테리온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무가 삐걱거렸다. 카이락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전장의 눈. 상대의 의도를 읽으려는 눈.
판단이 내려졌다.
"내 조교라면 --- 예외가 가능하다."
카이락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테리온이 서랍을 열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한 가지만 더. 어제 대전에서 세르한의 검을 꺾었을 때 --- 네 심박이 올라가지 않았다."
"..."
"심판석에서 생체 감응을 보고 있었거든. 결계 안의 대전자 두 명의 심박 수치가 기록에 남아. 세르한은 전력 일격 직전에 심박이 120까지 올랐다. 자네는."
알테리온이 기록지를 뒤집었다. 숫자에 붉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62. 처음부터 끝까지 62야. 5각의 전력 일격이 눈앞으로 날아오는데 심박이 안정 상태라는 건 --- 두 가지 중 하나다."
카이락스는 말하지 않았다.
"하나. 자네가 겁을 모르는 인간이거나. 둘. 자네에게 5각의 일격이 위협이 아니거나."
"셋도 있습니다."
"뭔가."
"원래 심박이 낮은 사람이거나."
알테리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네 번째 웃음. 하지만 이번에는 믿지 않는 웃음이 아니라 --- 재미있다는 웃음.
"좋아. 심박이 낮은 학생."
알테리온이 기록지를 덮었다. 62라는 숫자 위에 손이 얹혔다. 그 숫자의 의미를 교수는 이해하고 있었다. 심박 62. 전장에서 전우가 옆에서 쓰러져도 심박이 변하지 않는 자가 있다. 공포가 아니라 --- 익숙함이 심장을 평온하게 만드는 자. 그런 자를 알테리온은 본 적이 있을 터다. 전장에서. 자신의 옆에서. 혹은 거울 속에서.
카이락스는 그 손을 보았다. 화상 자국 위에 올려진 손. 기록지의 62를 덮는 손. 이 교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확인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확인하면 --- 조교로 쓸 수 없으니까.
전장의 눈은 볼 것과 보지 않을 것을 구별하는 눈이기도 했다.
알테리온이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래된 금속 열쇠. 표면이 마모되어 문양이 희미해져 있다. 열쇠고리에 작은 금속판이 달려 있었다 --- '연구실 + 지하 2층 서고'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열쇠가 책상에 놓이는 소리. 가볍지만 방 안에 울렸다.
"나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알테리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이상 심문의 톤이 아니다. 사적인 것에 가까웠다. 열쇠를 건네는 행위가 심문을 끝내고 다른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
"전장의 눈으로 사람을 본다. 성흔의 등급이나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 눈빛, 걸음걸이, 손의 버릇, 공기를 가르는 방식. 그것으로 사람의 내력을 읽는다."
카이락스는 열쇠를 집으며 손을 멈추었다.
"자네 --- 전쟁을 겪었지?"
전쟁을 겪었느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을 만든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가까웠다. 알테리온의 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비슷한 것을."
"비슷한 게 어디 있나. 겪었든, 안 겪었든이지."
대답하지 않았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금속이 다른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아티팩트와 열쇠가 주머니 안에서 닿았다.
나가려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벽에 걸린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지도와는 다르게 유리 액자에 넣어져 있었다.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 유리에 먼지가 없다 --- 자주 닦는다는 뜻.
북부 전선 지도.
액자 안의 양피지는 가장자리가 그을려 있었다. 전장에서 불을 피했다는 흔적. 접힌 자국도 있었다 --- 군복 안쪽에 접어 넣고 다녔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가져온 것. 이 양피지는 전쟁이 끝난 뒤 50년 동안 이 벽에 걸려 있었다.
50년 전 심연 전쟁 당시의 것이었다. 변색된 양피지 위에 핀이 여러 개 꽂혀 있다. 붉은 핀은 아군 진지. 푸른 핀은 교전 지점. 검은 핀은 --- 적군 진격로.
검은 핀의 경로.
카이락스의 시선이 그 위에 멈추었다. 검은 핀이 찍힌 곳은 --- 심연군이 북부 산맥을 넘어 인간 영토로 진격했던 루트 위에 정확히 놓여 있었다. 카이락스 본인이 이끌었던 군대의 경로. 삼만의 마족 병사가 산맥을 넘어 평원을 불태우며 지나간 길.
그 경로 위에 --- 붉은 핀 하나. 옆에 작은 글씨. 잉크가 바래 있었지만 읽을 수 있었다.
'제3소대 최후 진지. 야도르 산맥 동쪽 능선. 생존: 4/30.'
삼십 명 중 네 명.
알테리온의 소대. 야도르 산맥 동쪽 능선. 카이락스는 그 지명을 기억했다. 북부 진격 루트에서 가장 좁은 구간이었다. 삼만의 마족이 산맥을 넘을 때 --- 능선 위에서 저항하는 인간 소대가 있었다. 하루를 버텼다. 마족의 선봉 부대가 그 소대를 우회하라고 보고했지만, 카이락스는 명령했다. 돌파하라. 시간이 아깝다.
돌파되었다. 삼십 명 중 스물여섯이 죽었다. 네 명이 살아남았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 명령을 내린 자가 지금 그의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열쇠의 금속이 손안에서 차가웠다. 스물여섯 명.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도. 전장에서 죽은 자는 수만이었다. 그중 삼십 명의 소대 하나. 카이락스에게는 전선의 점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알테리온에게는 --- 전부였다. 지도를 닦는 손. 50년 동안 반복한 행위. 그 반복의 무게를 카이락스는 처음으로 가늠했다.
시선을 떼고 문을 열었다.
"레온."
알테리온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자네'가 아니라.
"앞으로 화요일, 목요일 저녁. 연구실에서 기다리겠다."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이 교수는 그 전장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전장을 만든 자에게 열쇠를 건넸다. 죽은 스물여섯 명의 부하를 만든 자의 손에. 알지 못한 채. 알테리온이 밤마다 이 지도를 닦는 이유를 --- 카이락스는 이해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것이 인간을 보호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했다.
복도를 걸으며 열쇠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 누군가의 신뢰가 담긴 무게. 죽은 스물여섯 명의 무게가 섞인 금속.
이 열쇠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질문은 1초 만에 접었다. 자격을 따질 여유는 없다. 배후를 추적해야 했다. 파편이 커지고 있었다. 봉인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 열쇠의 무게가 주머니 안에서 느껴졌다. 예상보다 무거웠다. 금속의 무게가 아니었다. 다른 무게.
복도 끝의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지나갔다. 웃고 떠들며. 전쟁을 모르는 세대. 전장의 냄새를 맡아본 적 없는 아이들. 알테리온이 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스물여섯 명이 죽은 전장을 기억하면서.
복도 벽에 학당 역사 연표가 걸려 있었다. '50년 전 --- 심연 전쟁 종결. 대용사의 희생으로 휴전 협정 체결. 성휘 학당 건설.' 두 줄의 문장이 50년의 전쟁을 요약하고 있었다. 삼만의 마족이 진군했던 루트도, 야도르 산맥의 삼십 명도, 스물여섯 개의 죽음도 --- 두 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짧았다.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의 시간은 항상 길었다.
카이락스는 계단을 내려갔다. 열쇠의 무게를 느끼면서.
계단 중간에서 카일과 마주쳤다. 카일이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야! 어디 갔다 온 거야. 알테리온 교수한테 불려간 거지?"
"조교 제안을 받았다."
"뭐? 조교? 0각이?"
카일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과 자부심이 섞인 표정이다. '내 룸메이트가 교수 조교' --- 그 사실이 주는 위상 변화를 이미 계산하는 얼굴.
"진짜 대단하다, 너."
"대단할 것 없다."
카이락스는 카일 옆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카일이 뒤에서 뭔가 더 말했지만 ---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오십 년 동안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사치였다. 마왕에게 죄책감이란 검에게 녹과 같다 --- 기능을 해치는 불순물. 하지만 지금, 주머니 안의 열쇠가 무겁다.
이것이 인간의 세계에 오래 머문 대가인가.
답은 --- 아직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백오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