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0각 vs 5각
연무장의 모래가 발밑에서 갈렸다.
아침. 마력학 실기 평가. 연무장에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투명한 반구형. 내부의 파동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격리 결계. 결계 표면에 미세한 빛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 이전보다 강화된 결계. 지하 2층 결계 보강과 같은 시기에 연무장도 업그레이드되었다.
관전석에 전 등급 학생이 모여 있었다. S급부터 F급까지. 좌석이 등급별로 나뉘어 있었지만 오늘은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F급 학생이 학생회장과 붙는다는 소문이 이틀 전부터 돌았기 때문이다.
"진짜 붙는다고?"
"대진표 봤잖아. 레온 아르케인 vs 세르한."
"0각 대 5각이면 시합이 아니라 처형이지."
"근데 그 0각이 카일 파동을 고쳤다는 소문---"
"소문이 검을 막아주나."
속삭임이 관전석을 채우고 있었다.
교수진이 심판석에 앉아 있었다. 알테리온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 옆에 마력학 교수, 크레인 교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크레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 대진표 조작 의혹을 의식하는 얼굴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카이락스는 소매 안의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손목에 차갑게 감겨 있다. 작동 전.
30분. 허무 사용 불가. 심연의 감각 차단. 1각의 가짜 파동.
심연의 군주가 진짜로 1각이 되는 시간.
기본 과제가 먼저였다.
성흔 파동으로 수정구 3개를 동시에 점등하는 것. 3각 이상이 필요한 과제. 수정구가 받침대 위에 세 개 놓여 있었다. 투명한 결정체.
카이락스는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손목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허무의 근원이 억눌렸다. 세상이 좁아졌다. 월식의 숲의 맥동도, 관전석 학생들의 숨소리도, 알테리온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도 --- 전부 사라졌다.
좁은 세계.
수정구 앞에 섰다. 손을 올렸다. 1각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미약하다. 손바닥에서 수정구까지의 거리가 30센티미터. 그 짧은 거리조차 1각의 파동으로는 버겁다.
수정구 하나가 --- 겨우 빛났다. 희미하게.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빛. 나머지 둘은 반응하지 않았다.
관전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역시 0각이네."
"아니 1각? 어제까지 0각 아니었어?"
"1각이어도 저건 불합격이잖아. 수정구 하나밖에 못 켜다니."
속삭임이 파도처럼 퍼졌다. 카이락스는 수정구에서 손을 뗐다. 시험관이 점수를 기록했다. 최하위.
적당했다.
F급 좌석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멀어서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 아마 욕을 하고 있을 터다. '0각이 수정구도 못 켜다니'가 아니라 '저놈은 일부러 저러는 거야'에 가까운 욕. 카일은 이제 눈치채고 있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관전석에서 카일이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 아니, 보이지 않았다. 심연의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관전석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다만 카일이 앉아 있는 방향에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것이겠지.
기본 과제 종료. 대전 시험 시작.
1라운드. 레온 아르케인 vs 세르한 드 발크.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F급과 학생회장. 결과가 뻔한 대전이다. 관전석의 학생들은 처형식을 보러 온 표정이었을 터다 --- 카이락스는 그 표정들을 읽을 수 없었다. 심연의 감각이 없는 세계에서는 멀리 있는 얼굴이 흐릿하다. 인간의 시력이란 이 정도인가.
세르한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차가운 눈. 심문실에서 봤던 그 눈이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분노만이 아니었다. 확인하려는 눈. 규정으로 넘어간 자의 실체를 --- 직접 보겠다는 의지.
"F급."
"네."
"규정으로 넘어간 것은 인정한다."
세르한이 검을 뽑았다. 날이 마력등 아래서 빛났다. 잘 갈려진 검. 매일 손질하는 자의 검.
"하지만 이곳은 규정이 아니라 실력이 말하는 곳이다."
세르한의 성흔 파동이 풀려나왔다. 5각. 결계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모래 위에 미세한 파문이 퍼진다. 모래알이 떨렸다. 관전석 앞줄의 학생 몇 명이 자리에서 밀려났다.
카이락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티팩트가 작동 중이다. 허무의 근원은 억제되어 있었다. 심연의 감각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카이락스는 진짜로 1각의 인간이었다.
5각의 위압을 --- 느꼈다.
처음이었다. 인간의 감각으로 받는 5각의 위압. 공기가 물처럼 무겁다. 가슴이 눌렸다. 숨쉬기가 평소보다 어렵다. 심연의 군주로서는 한겨울 외풍 정도였던 것이 --- 1각의 몸으로는 수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릎이 꺾이지는 않았다.
백오십 년 동안 전장에서 단련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신족의 군세와 마주했을 때, 용사의 최후 일격을 받았을 때, 심연의 끝에서 세계의 의지와 충돌했을 때 --- 몸이 배운 것이 있다. 압력은 받아들이는 것이지,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물이 바위를 감싸듯이.
시간 확인. 아티팩트 작동 후 7분 경과. 남은 시간 23분.
세르한이 움직였다.
빠르지 않았다. 정확했다. 5각의 파동을 검에 실어 정면으로 베어 내렸다. 수직 참격. 검의 궤도가 깨끗하다. 교과서적. 하지만 그 뒤에 3연쇄 변환이 숨어 있었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수평에서 찌르기로. 패턴이 읽혔다 --- 심연의 감각이 아니라, 눈으로.
카이락스는 반보 옆으로 물러섰다.
검이 빗나갔다. 모래가 튀었다. 모래알이 교복 위에 떨어졌다.
세르한의 눈이 좁아졌다. 3연쇄 변환의 두 번째. 수평 베기. 빨라졌다. 파동이 실린 검풍이 공기를 갈랐다. 바람이 아니라 압력이다.
카이락스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검풍이 머리카락 끝을 스쳤다. 머리카락 세 올이 잘려 모래 위에 떨어졌다. 검은 머리카락.
세 번째. 찌르기. 궤도가 바뀌었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치올리는 역방향 찌르기. 교과서에 없는 변형. 세르한의 실전 감각.
카이락스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렸다. 검끝이 교복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 얇은 베임. 피는 나지 않았다.
3연쇄. 전부 빗나갔다.
관전석이 술렁였다. 소란이 아니라 --- 충격의 술렁임. F급이 5각의 3연쇄를 피했다. 성흔이 아닌 순수 신체 기동만으로. 파동 감지 능력 없이, 오직 눈과 몸으로.
세르한이 거리를 벌렸다. 검을 내린 채 카이락스를 보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관찰하는 표정.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위에 다른 감정이 얹혔다. 궁금함. 자신의 3연쇄가 전부 빗나간 것은 학생회장이 된 이후 처음일 터다.
검끝에 묻은 모래를 털지 않았다. 카이락스의 교복에서 찢어낸 천 조각이 모래 위에 떨어져 있었다. 닿기는 했다. 하지만 --- 닿는 것과 베는 것은 다르다.
"피하기만 할 셈인가."
"충분하지 않은가."
세르한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5각의 파동을 전부 실었다. 성흔 다섯 개가 동시에 검 위에서 빛났다. 공기가 갈라졌다. 결계가 진동했다. 결계 표면의 빛줄기가 요동쳤다.
알테리온이 심판석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손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 필요하면 중지시킬 준비.
전력 일격.
카이락스는 피하지 않았다.
세르한의 검이 내려오는 궤도 위에 --- 정확히 섰다. 관전석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검이 도달하기 0.3초 전.
카이락스의 오른손 검지가 세르한의 팔꿈치 바깥에 닿았다. 밀지 않았다. 잡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팔꿈치의 힘줄 위에 닿은 것뿐이다. 그리고 --- 방향을 틀었다. 0.5도. 검의 궤도가 미세하게 빗나갔다.
세르한의 검이 카이락스의 옆 바닥에 꽂혔다.
모래가 폭발하듯 튀었다. 검이 바닥 깊이 박혔다. 5각의 전력이 실린 일격이 땅속으로 쏟아졌다. 충격파가 모래 위에 원형 파문을 만들었다.
연무장이 --- 멈추었다.
세르한의 팔이 뻗은 채 떨리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일격이 빗나간 것이 아니다. 빗나게 만들어졌다. 손가락 하나에.
"팔꿈치가 0.5도 열려 있었다."
카이락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연무장 안의 모든 소리가 멈추어 있었기에, 낮은 목소리가 관전석까지 닿았다.
"그래서 빗나간 거다."
침묵.
세르한의 손이 떨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의 전력 일격이 손가락 하나에 꺾였다는 사실을 뇌가 처리하고 있었다. 이해를 거부하는 시간. 발크 공작가에서 받은 검술 교육, 학생회장으로서 쌓은 실전 경험, 5각의 성흔이 보증하는 전투력 --- 그 모든 것이 손가락 하나 앞에서 무효가 되었다.
관전석에서 숨소리조차 멈춘 듯했다. 그리고 --- 천천히,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방금... 뭐야?"
"검이 빗나간 거야? 꺾인 거야?"
"손가락으로 궤도를 바꿨다고? 그게 가능해?"
"0각이 저걸 한 거야? 진짜로?"
알테리온의 눈이 카이락스를 관통하고 있었다. 나머지 교수진은 충격으로 얼어붙어 있었지만, 알테리온만은 달랐다. 분석하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눈이 말하고 있다.
저건 회피가 아니다. 저건 --- 교정이다. 상대의 기술을 고쳐주고 있다.
시간 확인. 아티팩트 작동 후 22분. 남은 시간 8분.
카이락스는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을 돌렸다. 모래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실기 평가 종료 아닙니까."
심판이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시간 초과 --- 아니, 항복 없음으로 --- 승자, 레온 아르케인."
모래 위에 세르한이 서 있었다. 검을 뽑지 못한 채.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는 얼굴로. 은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흘렀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되지 않는 말. '0.5도'라는 단어를 되뇌는 것처럼 보였다.
관전석 한쪽에서 --- 루시안이 팔짱을 풀었다.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금색 눈이 평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기대한 것을 봤다는 눈.
연무장 출구 통로.
카이락스가 통로를 걸어 나왔다. 아티팩트의 진동이 약해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 4분. 충분하다. 이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통로는 어두웠다. 돌벽 사이로 바람이 흘렀다. 땀 냄새와 모래 먼지가 섞인 공기.
통로 끝에서 --- 알테리온이 서 있었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심판석에서 나온 것이 카이락스보다 빨랐다 --- 통로의 다른 출구를 알고 있었던 것.
카이락스는 발을 멈추었다.
알테리온의 시선이 카이락스의 손목을 향하고 있었다. 소매 안. 아티팩트의 금속 테두리가 소매 사이로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네, 그 손목에 뭘 차고 있었나."
카이락스는 소매를 내렸다.
"시계입니다."
알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믿지 않는 웃음. 세 번째.
"시계가 성흔 파동을 내나."
대답하지 않았다. 아티팩트가 꺼질 때까지 2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아티팩트가 꺼지는 순간 허무의 근원이 돌아오고, 그 파동의 변화를 알테리온이 느낄 수 있다.
"수업에 늦겠습니다."
알테리온 옆을 지나갔다. 가죽과 금속 녹의 냄새가 스쳤다. 전장의 냄새.
알테리온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일 연구실로 와. 할 이야기가 있다."
명령이 아니라 초대에 가까운 톤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다. 전장에서 부하에게 명령하던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 동등한 자에게 말하는 목소리.
발소리가 멀어졌다. 통로를 빠져나와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에 들어선 순간 --- 아티팩트가 꺼졌다. 1각의 가짜 파동이 사라지고, 손목 안쪽에서 허무의 근원이 다시 차올랐다. 세상이 넓어졌다. 소리가 돌아왔다. 냄새가 돌아왔다. 파동이 돌아왔다.
넓은 세계. 다시. 모래의 냄새, 돌벽의 습기, 복도 끝의 햇살 속 먼지까지 --- 전부 돌아왔다. 좁은 세계에서 30분을 버틴 것이 몸에 남아 있었다. 피로가 아니라 기억. 인간의 감각으로 싸운다는 것의 무게.
복도 너머에서 관전석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카일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 '봤지? 내 룸메이트라고.' 자랑하는 목소리.
번거롭군.
8분 차이. 연무장을 나온 것이 8분 빨랐기에 무사했다. 아티팩트가 꺼지는 순간의 파동 변화를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사소한 간격. 하지만 눈 밝은 자에게는 치명적인.
알테리온은 그 간격을 놓치지 않을 자다. 전장의 눈. 숨기는 행위 자체를 읽는 눈. 내일 연구실에서 --- 그 눈 앞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