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황금의 제안
정원 벤치에 처음 보는 학생이 앉았다.
실기 시험 전날 오후. 카이락스는 본관 앞 정원 벤치에서 벨제르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교복 안쪽에 끼워 성적표처럼 위장한 채.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벤치 위로 떨어졌다. 참나무 잎이다.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마르기 시작한 것이 ---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젯밤 창문 너머로 본 실루엣이 떠올랐다. 금발. A급 견장. 야간에 보라빛 상자를 운반하던 자. 그 실루엣의 주인이 지금 --- 맞은편 벤치에 앉는 소리를 냈다.
가볍고 정확한 동작. 소리의 양을 계산해서 앉는 자의 움직임. 치마 자락을 한 번에 접으며, 등을 세우고, 다리를 꼬는 동작이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자리에 앉는 것 하나에도 연습이 깔린 몸짓. 귀족 가문의 교육.
금발. 보라색 눈. 교복 위에 황금빛 브로치. A급 견장. 미소가 있었지만 눈에는 없었다. 입술의 각도가 정확히 15도. 호감을 주되 친밀하지는 않은 --- 상인의 미소.
에리나 폰 하르트.
황금 상단의 후계자. 학당 내 경제 활동의 상당 부분이 이 가문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잠입 준비 단계에서 파악한 정보다. 전투 능력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유형. 학당에서 검을 드는 대신 장부를 드는 학생.
예감이 맞았군. 어젯밤 창문 너머의 보라빛 상자. 그리고 오늘 오후, 정원에서의 접근. 준비된 만남이다. 이 여자는 카이락스를 관찰한 뒤에 왔다. F급의 행동 패턴, 이동 경로, 혼자 앉는 습관까지 파악한 뒤에.
상인은 손님의 습관을 먼저 읽는다.
카이락스는 보고서를 접지 않았다.
"앉을 곳이 없습니까."
"있어요. 여기가 좋아서 앉은 거예요."
에리나가 주머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벤치 위의 나뭇잎을 치우고 앉았다. 실크 손수건. 가장자리에 금실 자수.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동작이다.
"레온 아르케인 씨. F급이시죠?"
"그렇습니다."
"F급인데 학생회장이 직접 심문하고, 황태자가 관심을 보이고, 성녀 후보가 따라다니고."
에리나가 카이락스를 보았다. 보라색 눈이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견장 없는 교복, 닳은 어깨, 주머니에 넣은 손 ---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무엇.
"재미있는 포트폴리오예요."
포트폴리오. 상인의 용어다. 사람의 관계를 자산으로 평가하는 눈. 카이락스는 이런 유형을 심연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힘이 아니라 정보와 거래로 권력을 쌓는 자. 칠죄 중 '탐욕'이 그런 유형이었다.
"무슨 용건입니까."
"단도직입적이시네요. 좋아요. 저도 돌려 말하는 건 싫거든요."
에리나가 주머니에서 작은 광석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엄지손톱보다 작은 결정체. 어두운 보라색. 표면에 미세한 빛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빛줄기의 패턴이 --- 맥동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느리게. 하지만 살아 있는 리듬으로.
카이락스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월식의 숲 광석.
어젯밤 에리나가 운반하던 상자에서 새어나온 보라빛. 같은 물질이다. 심연의 파동이 오랜 시간 토양에 침투하면서 만들어내는 결정체. 인간에게는 희귀한 마력 증폭 재료. 카이락스에게는 --- 파편과 같은 근원의 물질. 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 같은 것.
"아름답죠?"
"아름답다기보다는."
"뭔가요?"
"익숙하다."
에리나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광석을 '익숙하다'고 말한 학생은 처음인 듯했다. 이 결정체를 본 적이 있는 인간은 학당에 거의 없을 터다. 하지만 금세 미소가 돌아왔다. 상인은 의문을 삼키고 거래를 이어가는 법.
"황금 상단이 이 광석의 학당 내 거래 루트를 원합니다."
"거래."
"월식의 숲 외곽에서 채취합니다. 금지구역이라 공식적으로는 반입이 불가능해요. 채취 자체는 저희 쪽에서 처리하지만, 학당 안으로 들여오는 과정이 문제예요. 감시 결계가 물품의 마력 잔향을 스캔하거든요."
에리나가 카이락스를 보았다.
"F급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잖아요. 아무도 F급 학생이 뭘 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견장도 없고, 추적 감응도 없고. 투명한 존재."
사각지대. 틀린 말은 아니다. F급은 학당의 바닥이었다. 감시 결계도, 교수진의 관심도, 학생들의 시선도 F급을 지나친다. 그 무관심이 카이락스에게는 최고의 위장이었고, 에리나에게는 최고의 운반 경로.
"대가는."
"성휘 포인트 200점. 고위 마법서 세 권에 해당하는 금액이에요. 월 2회, 정해진 장소에서 수거해서 학당 내 보관소까지. 나쁘지 않죠?"
"무엇을 운반하는가."
에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거절이 아니라 조건을 묻는 것. 예상과 다른 반응. 200포인트에 즉시 수락하리라 계산했을 터다. 하지만 카이락스는 돈이 아니라 물건을 물었다.
"이 광석입니다. 월식의 숲 외곽에서 채취한 것. 운반 경로와 시간은 제가 지정합니다."
"구매자는."
에리나의 미소가 멈추었다. 0.5초. 금세 돌아왔지만 --- 그 0.5초의 공백을 카이락스는 읽었다. 구매자를 묻는 것은 운반책의 영역이 아니다. 물건을 나르는 자가 사는 자를 알 필요는 없다.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
"그건 황금 상단의 기밀이에요."
"그렇겠지."
카이락스는 에리나의 눈을 보았다.
이 여자는 광석의 진짜 용도를 알고 있는가. 보라색 눈. 계산은 있었지만 심연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광석이 심연 에너지의 결정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 광석이 무엇인지보다 얼마에 팔리는지가 중요한 자. 탐욕의 순수한 형태.
하지만 이 광석을 학당 안에서 '누가' 사는지. 그것은 다른 문제다. 심연 에너지에 반응하는 광석의 구매자가 --- 배후일 가능성이 있었다. 운반을 수락하면 거래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구매자를 특정할 수 있다.
돈이 목적이 아니다. 경로가 목적이다.
"생각해 보겠다."
에리나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눈에도 웃음이 있었다.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을 읽은 것.
"기다리고 있을게요, 레온 씨."
자리에서 일어나며 교복을 정돈했다. 나뭇잎이 또 떨어졌다. 에리나가 그것을 한 발짝으로 피하며 걸었다. 먼지를 밟지 않는 걸음.
"그 말투, 몰락 귀족이 아니라 전직 상인 같아요."
에리나가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금발이 오후 햇살에 반사되었다. 향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달콤하지만 계산된 향. 만남의 여운을 남기는 기술.
카이락스는 광석이 놓여 있던 벤치를 보았다. 에리나가 가져간 자리에 미세한 잔향이 남아 있었다. 심연 에너지의 흔적.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카이락스에게는 선명하다. 고향의 냄새와 비슷했다.
정원 건너편 기둥 뒤에서 --- 리아가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카이락스는 느끼고 있었다. 성녀의 감각이 아니라 시선의 무게로. 에리나와 카이락스 사이에 오간 광석. 보라빛의 맥동. 성녀의 감각이라면 광석의 이질적인 파동을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리아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 카이락스가 비합법 거래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한다. 둘, 카이락스가 거래를 이용해 무언가를 추적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어느 쪽이든 리아의 다음 행동이 달라진다.
이 학당에서 눈이 많아지고 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본관 앞 게시판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내일 실기 시험 대진표가 붙어 있었다. 흰 종이에 검은 잉크. 1라운드 대전 배정표.
카이락스는 걸음을 멈추고 대진표를 읽었다.
등급별 무작위 추첨이라고 했다. 하지만 F급과 A급 이상의 매칭이 세 건이나 있었다. 전체 학생 수 대비 등급별 분포를 고려하면 --- 무작위에서 이 조합이 나올 확률은 0.3% 미만. 우연이라 부르기엔 낮은 수치.
카이락스의 이름 옆에 적힌 1라운드 상대.
세르한 드 발크. 5각. 학생회장.
카일이 옆에서 대진표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얘져 있었다.
"야, 이거 완전 처형식이잖아."
"..."
"0각 대 5각? 이게 무작위야? 교수진이 짠 거 아니야?"
주변 학생 하나가 끼어들었다. C급 견장.
"레온 아르케인? 그 0각? 학생회장이랑?"
"내일 1라운드라고. 대놓고 공개 처형이네."
"근데 그 0각이 카일 파동을 고쳤다는 소문 있잖아."
"소문은 소문이지. 5각이랑 붙으면 소문이 무슨 소용이야."
카이락스는 대진표에서 시선을 떼었다.
교수진의 배치인가. 아니면 --- 배후의 배치인가. 8각급 출력 흔적을 발견한 교수진이 카이락스를 시험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배후가 카이락스를 무대 위에 올리려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내일 연무장에 서야 했다. 30분. 아티팩트의 제한 시간. 허무를 쓸 수 없는 30분. 5각의 학생회장.
카일이 게시판 앞에서 손가락으로 대진표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카일 로덴 vs D급 하루타... 이건 뭐 그나마 낫네."
"이기겠나."
"뭐?"
"D급이면 3각이다. 네가 지금 2각이니까."
카일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주먹을 쥐었다. 아직 3각이 아니지만 --- 매일 밤 훈련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손에 있었다. 카이락스는 그 주먹을 보았다. 며칠 안이다.
"밥 먹으러 가자."
"야!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밥이야?!"
"죽기 전에 먹어야 하니까."
카일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이 룸메이트는 내일 5각과 싸운다는 사실에도 밥을 먹자고 한다. 세상이 끝나도 밥을 먹자고 할 것 같은 인간이다.
카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 따라갔다. 항상 그랬다.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카이락스는 주머니 속의 아티팩트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복도 창밖으로 연무장이 보였다. 빈 모래 위에 석양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곳에 결계가 펼쳐진다. 관전석에 학생들이 앉고, 교수진이 심판석에 서고, 카이락스는 모래 위에 선다.
30분. 허무를 쓸 수 없는 시간. 심연의 감각이 차단된 채로 5각의 전력을 상대해야 한다. 파동을 읽을 수 없다. 공격의 궤도를 허무의 실로 추적할 수 없다. 눈과 몸 --- 백오십 년간 전장에서 단련한 것만으로.
세르한 드 발크. 5각의 검은 정확하고 빠를 터다. 하지만 교과서적이다. 전장의 검이 아니라 학당의 검.
학당의 검은 패턴이 있다. 패턴이 있으면 읽을 수 있다.
식당에 들어섰다. F급 전용 테이블은 구석에 있었다. 의자가 낡아 앉으면 삐걱거렸다. 양고기 스튜가 나왔다. 기름이 표면에 뜨고, 고기는 질겼다. 당근 몇 조각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심연의 진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 따뜻하기는 했다.
카일이 스튜를 퍼먹으며 말했다.
"내일 진짜 괜찮아?"
"뭐가."
"5각이라고. 세르한. 발크 공작가 장남이고, 학생회장이고, 실력도 학당에서 루시안 다음이라잖아. 그런 놈이랑 붙는데."
"알고 있다."
"알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카이락스는 스튜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질긴 양고기를 씹으며.
"맛있나?"
"...야,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맛이 없으면 걱정을 해야 하나."
카일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한숨 대신 스튜 그릇을 밀었다.
"너 진짜 이상한 놈이야. 근데... 내일 지면 창피한 거다. 내 룸메이트니까."
"지지 않는다."
카일이 카이락스를 보았다. 3초. 허세가 아닌 눈이었다. 0각이 5각에게 지지 않는다는 말이 --- 이 룸메이트의 입에서 나오면 허세로 들리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미친 놈."
그것이 카일의 응원이었다.
카일이 앞에서 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야, 뭐 해? 빨리 와."
"가고 있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카일이 먼저 침대에 누웠다. 담요를 덮고 ---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내일을 생각하는 얼굴.
카이락스는 창가에 섰다. 소매 안의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차가운 금속. 30분. 내일 연무장에서 이 금속이 심연의 군주를 1각의 인간으로 만든다.
5각의 검 앞에, 30분의 시간제한을 안고 서야 한다.
창밖으로 연무장이 보였다. 달빛이 빈 모래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 위에 피가 묻을 수도 있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면 --- 세르한의 피. 아니.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내야 한다. 정체를 숨기면서, 이기면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경계선이 좁다.
하지만 --- 죽으러 온 학당에서 시험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가장 큰 모순이다. 그리고 그 모순이 --- 싫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모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