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빚쟁이의 선물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정확히는 --- 카이락스는 잠들지 않았다. 허무의 근원으로 손끝의 검은 얼룩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틀째. 얼룩은 검지 끝에서 손톱 아래까지 물러났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새벽 2시. 달빛이 창틀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틀 아래에서 --- 손 하나가 올라왔다. 검은 장갑. 두꺼운 손가락. 창문 테두리를 잡는 힘이 정확했다. 소리를 최소화하면서도 체중을 완전히 지탱하는 악력. 전투 훈련을 받은 자의 손.
벨제르.
카이락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문이 있다."
"감시 결계가 강화되었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바람 소리에 섞여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음량이었지만, 카이락스의 귀에는 선명하다.
"교수동 야간 순찰이 2배로 증가했습니다. 정문과 후문 모두 감응석이 추가 설치되었고, 창문 경로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사각입니다."
어젯밤 지하 결계 손상의 여파. 학당 전체의 경비가 한 단계 올라갔다.
"들어와."
"폐하가 계신 곳에 발을 들이는 것은---"
"들어오라니까."
벨제르가 소리 없이 창문을 넘었다. 3층 창문 밖에 매달려 있던 몸이 방 안으로 착지했다.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칠죄 군단장의 은밀 행동. 무릎을 꿇었다.
카일의 침대 쪽을 확인했다. 코 고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벨제르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 확인.
가방을 열었다. 두 가지. 보고서와 작은 상자.
보고서 먼저.
벨제르의 필체는 군대식이었다. 간결하고,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다. 여백에 감정이 없었다. 보고서란 그래야 한다고 카이락스는 생각했다.
핵심 내용은 세 가지.
첫째, 지하 3층 봉인 주변을 감시한 결과, 카이락스가 봉인을 닫은 이후에 다시 접근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접근 방향은 알테리온 연구실 쪽이었다. 하지만 잔향의 결이 알테리온 본인과 달랐다. 알테리온의 공간을 경유하되 알테리온이 아닌 자.
"첫째 항목. 접근자의 파동은 읽었나."
"미약하여 완전한 기록은 불가했습니다. 다만 성흔 기반이면서도 결이 다른 --- 혼합형 파동이었습니다."
혼합형. 성흔과 심연의 도구를 동시에 다루는 자.
둘째, 학당 내부에 심연 제조 물품이 유통되고 있을 가능성. 월식의 숲 외곽에서 채취 가능한 보라색 광석이 학당 내 비공식 거래 경로에서 포착되었다. 채취자와 구매자는 불명.
셋째, 마계 측 동향. 그림자 의회에서 카이락스의 잠입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태의 군단장과 분노의 군단장이 소집을 요구했다. 벨제르가 무마 중이지만 한계가 있었다.
카이락스는 보고서를 접었다.
"둘째는 보류. 거래 경로는 내가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다."
"알겠습니다."
"셋째는 필요하면 의회에 내 이름으로 전해라. '아직 유희 중이다'라고."
벨제르가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숙인 채.
"...폐하, 의회가 '유희'라는 말로 납득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한다."
"예."
벨제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만 --- 분노의 군단장이 직접 이 세계에 넘어오겠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으나."
분노가 넘어오면 학당이 남아나지 않는다. 성질을 참을 줄 모르는 자. 심연의 칠죄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존재.
"그 건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반론이 없었다. 백오십 년째 변하지 않는 관계.
상자를 열었다. 금속 팔찌. 표면에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심연 제조 아티팩트. 달빛 아래서 문양이 검붉게 빛났다. 심연의 대장간에서만 만들 수 있는 가공. 인간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합금이다. 손목에 올려보았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는다. 허무의 파동이 눌리는 느낌.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성흔 위장 보조 장치입니다. 허무의 근원을 억제하고, 대신 인간의 성흔 1각에 해당하는 가짜 파동을 생성합니다."
카이락스는 팔찌를 돌려보았다. 정밀한 가공이다. 문양 사이사이에 미세한 결계가 겹쳐져 있었다. 벨제르가 심연에서 가져온 기성품이 아니라 별도로 제작한 것.
"직접 만들었나."
"폐하를 위한 것이니 당연합니다."
"제한은."
"연속 작동 30분. 이후 냉각 시간 6시간이 필요합니다."
30분. 마력학 실기 시험을 치르기에는 빠듯한 시간.
"또한 --- 작동 중에는 허무의 근원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티팩트가 근원을 완전히 억제하는 방식이라, 해제 없이 근원을 끌어올리면 장치가 파괴됩니다."
30분 동안 허무를 쓸 수 없다. 심연의 감각도, 파동을 읽는 능력도, 벽 너머의 소리를 듣는 능력도 전부 차단된다. 그 시간 동안은 진짜로 1각의 인간이 된다는 뜻.
"마력학 실기가 이틀 후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필요하실까 하여---"
"잘 가져왔다."
벨제르의 등이 미세하게 펴졌다. 칭찬에 반응하는 것은 백오십 년째 변하지 않는다. 칠죄 군단의 군단장이 한 마디에 등을 세우는 광경은 --- 이 기숙사의 좁은 방에서 보면 기묘하다.
"들어가라. 밝아지기 전에."
"폐하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벨제르가 소리 없이 창문으로 나갔다. 체중이 실린 손이 창틀을 잡았다가 놓아졌다. 그림자가 밤에 흡수되었다.
벨제르가 떠난 뒤 30초.
카일이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으음..."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코를 찡그렸다.
"또 뭔 냄새야. 금속 냄새인가? 밤마다 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야."
카이락스는 아티팩트를 소매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손목 안쪽에 닿는다.
"꿈이다."
"꿈에서 쇠 냄새가 나?"
"나쁜 꿈이었겠지."
카일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카이락스를 보았다. 3초. 새벽에 창가에 서 있는 룸메이트. 항상 잠들지 않는 룸메이트. 정체불명의 물건이 늘어나는 룸메이트.
"너 정말 빚쟁이한테 뭔가 받는 거 아니야? 학당 안에 암거래하는 사람 있다는 소문 들었거든. 금지 물품 거래하는 애들."
"가보다."
"지난번에도 가보라고 했잖아. 그 전에는 비상 식량이라고 했고. 몰락 귀족이 가보가 그렇게 많아?"
"...풍파가 많은 가문이었다."
"풍파라."
카일이 되뇌었다.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룸메이트의 눈이 멀리를 보고 있었다. '풍파'라는 단어를 말할 때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 연기 같지 않았다.
풍파. 틀린 말은 아니다.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전쟁을 풍파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전쟁을 일으킨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빼면 완벽한 설명.
카일은 반박하지 못했다. 마계 제조 아티팩트가 몰락 귀족가의 가보일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 카일이 그것을 판별할 능력은 없었다.
"...이상한 놈."
담요를 뒤집어쓰며 등을 돌렸다. '맨날 안 자고', '냄새나고', '0각이 무슨 귀족이야.' 투덜거림이 이어지다가 2분 뒤 코 고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카이락스는 아티팩트를 소매에서 꺼내 달빛에 비춰보았다. 금속 표면에 자신의 눈이 반사된다. 적색이 한 순간 빛났다가 꺼졌다.
30분. 허무 사용 불가. 심연의 감각 차단. 진짜 1각이 되는 시간.
이것으로 5각과 싸워야 한다.
다음 날 오후. 학당 안뜰 벤치.
노아가 왔다.
갈색 곱슬머리에 주근깨. 교복 단추를 두 개 풀어헤치고, 셔츠 자락이 반쯤 나와 있었다. 한 손에 사과, 다른 손에 접힌 종이. 벤치 맞은편에 앉으며 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안뜰에 울린다.
"형님. 결투 건, 후속이 나왔습니다."
카이락스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벨제르의 보고서를 교복 안쪽에 끼워 읽고 있었다.
"말해."
"루시안 선배와의 결투 전에 연무장 결계가 사전 설치되어 있었잖아요. 그 결계 --- 학생 권한으로는 만들 수 없는 종류였습니다."
노아가 사과를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씹으면서 말한다. 입 안의 사과가 단어 사이에서 오물거렸다. 예의 없는 태도였지만, 그 안에서 눈만은 웃지 않는다.
"연무장 관리 결계의 하위 프로토콜을 건드린 거예요. 그건 교수 권한이 있어야 접근 가능한 레이어입니다. 학생회장이라도 못 만져요."
교수 권한.
"교수가 셋이었지."
노아의 눈이 반짝였다. 한 번에 핵심을 짚었다는 반응.
"네, 형님. 그날 지하 2층에 머문 교수 셋. 알테리온, 연구파 소속 크레인 교수, 조교 자격의 고학년 학생 하나."
"크레인 교수의 전공은."
"결계학입니다. 학당 내 결계 관리 총괄. 지하 2층부터 연무장까지 모든 결계 설계가 이 교수 소관이에요."
카이락스는 사과를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신맛이 혀를 찔렀다. 노아의 사과는 항상 시다. 과일 선택에도 취향이 드러나는 법.
"냄새가 점점 진해져요, 형님."
노아의 눈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장난기가 빠진 눈. 정보를 다루는 자의 본색.
"더 파라."
"어디까지요?"
"냄새의 끝까지."
노아가 사과 심을 벤치 옆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례 비슷한 동작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든요."
안뜰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곱슬머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뒤에서 보면 평범한 학생. 하지만 저 학생의 정보망은 학당의 어느 교수보다 넓다.
카이락스는 사과 한 입을 더 베어 물었다. 신맛이 입안에 남아 있었다.
교수 권한. 결계학 전공. 크레인이라는 이름. 벨제르의 보고서에는 없던 이름이다. 노아가 가져온 조각이 퍼즐의 빈칸에 맞아들기 시작한다.
사과 심을 벤치 옆에 놓았다. 노아가 놓은 것 옆에.
밤. 기숙사.
카이락스는 아티팩트를 손목에 감았다. 테스트.
금속이 피부에 닿자 허무의 근원이 억눌렸다. 갑자기 세상이 --- 좁아졌다. 심연의 감각이 차단되었다. 파동을 읽는 능력이 사라졌다. 벽 너머의 소리를 듣는 능력도, 공기의 질감으로 기운을 파악하는 능력도. 전부.
이것이 1각의 세계인가.
좁고, 어둡고, 제한되어 있었다. 벽 너머의 카일이 코를 고는지 안 고는지도 알 수 없다. 월식의 숲의 맥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가 이 방 안으로 축소된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벽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돌. 그것뿐이다. 허무의 감각이 있을 때는 돌 너머의 결계선, 복도의 온도, 건물 전체의 기운 흐름까지 읽을 수 있었는데 --- 지금은 돌의 차가움만 느껴진다. 귀를 기울여보았다. 심연의 청각으로는 학당 전체의 숨소리가 들렸지만, 1각의 귀에는 바람 소리와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뿐. 이 좁은 세계에서는 위험이 다가와도 모를 수 있다. 등 뒤의 적을 감지하지 못한다. 벽 너머의 기척을 읽지 못한다.
무방비. 이것이 인간의 일상이다.
인간이 이 좁은 감각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이 좁은 세계에서 서로를 찾고, 싸우고, 사랑하고, 죽는다. 심연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 좁은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이다.
거울을 보았다. 눈동자가 잠시 적색으로 빛났다가 꺼졌다. 아티팩트가 억제하는 것은 파동뿐. 눈의 색까지는 감추지 못한다. 실기 시험 중에 감정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뜻.
해제했다. 근원이 다시 차올랐다. 세상이 넓어진다. 카일의 코 고는 리듬, 복도 너머 학생들의 숨소리, 월식의 숲의 미세한 맥동까지 다시 감지되었다.
넓은 세계가 돌아왔다. 하지만 방금 느꼈던 좁은 세계의 감각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다.
30분이면 충분하다.
창밖으로 월식의 숲이 보였다. 맥동은 잠잠하다. 봉인은 닫혀 있었다.
모레가 실기 시험이다.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안뜰 쪽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금발. 학당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는 실루엣. A급 견장이 가로등 빛에 반사되었다. 에리나 폰 하르트. 이 시간에 안뜰을 지나가는 것은 --- 우연이 아닌 동선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걸음.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작은 상자. 가로등 빛이 닿는 순간 --- 상자에서 미세한 보라빛이 새어나왔다.
카이락스는 그 빛의 색을 알고 있었다. 월식의 숲 광석.
벨제르의 보고서 두 번째 항목. 심연 제조 물품의 학당 내 유통. 그리고 지금, 야간에 안뜰을 횡단하며 보라빛 상자를 운반하는 황금 상단의 후계자.
우연의 수가 또 하나 늘었다.
창문을 닫았다. 금속 아티팩트의 차가운 감촉이 소매 안에서 느껴졌다. 실기 시험과 광석 거래. 학당에서 동시에 두 가지 전선이 열리고 있었다.
내일은 --- 이 여자가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