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성녀의 선택
촛불이 흔들렸다.
성녀 후보실. 밤. 창문은 닫혀 있다. 바람이 아니었다. 예언서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낼 때 --- 공기가 진동했다. 촛불의 불꽃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왁스가 녹아 촛대 위에 고였다. 방 안에 밀랍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하다.
리아 벨 루미너스는 책상 앞에 앉아 예언서를 펼치고 있었다. 오래된 책이다. 가죽 표지. 금박 장식이 닳아 있다. 이 책은 성녀 후보에게만 열리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의 손에서는 빈 페이지만 보인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나 있었다.
'군주가 봉인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군주가 봉인 자체다.'
리아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며.
의미를 분해했다. 군주가 봉인을 지키고 있다 --- 그것은 며칠 전 밤에 직접 보았다. 레온 아르케인이 지하 봉인에 양손을 대고 파편의 맥동을 눌렀다. 성흔의 빛이 아니다. 빛을 흡수하는 어둠이었다. 어둠을 어둠으로 눌렀다. 균열이 닫혔다.
그러나 군주가 봉인 자체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봉인을 지키는 것과 봉인 자체인 것은 다른 의미다. 레온의 존재 자체가 봉인이라면 --- 레온이 사라지면 봉인도 사라진다는 뜻인가. 레온이 학당에서 떠나면 --- 파편이 풀려나는가.
촛불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왁스 한 방울이 책상에 떨어졌다. 리아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아직 따뜻한 왁스가 손끝에 남았다.
예언서를 덮고 손을 맞잡았다.
지난 며칠을 정리했다. 머릿속에 장면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마력학 수업. 레온이 카일의 성흔 회로를 맨눈으로 진단했다. '보이니까'라고 했다. 0각이 성흔의 미세 결함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기 시험. 레온이 5각 학생회장의 전력 일격을 손가락 하나로 꺾었다. 팔꿈치를 0.5도 틀어 궤도를 교정했다. 검술이 아니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한 자의 행동.
지하. 봉인을 막는 레온의 양손에서 흘러나온 힘. 빛이 아니라 어둠. 성흔이 아닌 무언가.
레온 아르케인은 0각이 아니다. 확신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봉인을 막은 것은 레온이다. 직접 보았다.
예언서의 '심연의 군주'가 레온인지는 --- 아직 판단을 보류했다.
이유는 하나.
심연의 군주라면 봉인을 '열어야' 했다. 파편을 '깨워야' 했다. 학당을 '멸해야' 했다. 예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 '심연의 군주가 학당에 들어왔다.' 들어왔다는 것은 파괴하러 왔다는 뜻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 막았다. 봉인을 닫았다. 파편을 눌렀다.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지만, 열릴 경우를 대비해 리아에게 신성력 준비를 지시했다. 파괴가 아니라 보호.
예언의 논리와 모순.
리아는 손을 맞잡은 채 눈을 감았다. 신성력이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예언서를 읽은 뒤에는 항상 이랬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촛불의 열기가 얼굴에 닿는 것까지 느껴진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다. 예언서가 보여주는 미래의 무게가 --- 몸에 남는 것.
예언서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리아가 성녀 후보로 발탁된 이후, 예언서의 문장은 매번 실현되었다. '봄에 재앙이 온다' --- 왔다. '황금 상단에 배신자가 있다' --- 있었다. 사소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
하나. 레온은 심연의 군주가 아니다. 예언서의 '군주'는 다른 존재를 가리킨다. 레온은 단지 강력한 힘을 숨기고 있는 별개의 존재이고, 진짜 군주는 아직 학당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 이미 들어와 있되 레온이 아닌 다른 형태로.
둘. 레온은 심연의 군주이고, 예언은 맞다. 하지만 '들어왔다'가 '파괴하러 왔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군주가 학당에 들어온 목적이 리아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어느 쪽이든 --- 앉아서 추측하는 것은 성녀의 방식이 아니다. 예언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맞서는 것이라고 선대 성녀가 가르쳤다. 문장이 주어지면 해석하고, 해석이 부족하면 직접 확인한다.
리아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 노트가 있다. 예언서와 별개로 리아가 직접 기록하는 관찰 일지. 레온 아르케인에 대한 기록이 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입학 첫날부터.
노트를 한 번 훑었다.
'입학 첫날 --- 성흔 측정 시 결계 떨림 0.1초. 성녀의 감각으로 감지.' '월식의 숲 사건 --- 미확인 인물과 접촉. 경계석을 무력화.' '봉인 사건 --- 지하 봉인을 막음. 성흔이 아닌 힘 사용 확인.' '마력학 수업 --- 카일의 성흔 회로를 맨눈으로 진단. "보이니까".' '실기 시험 --- 5각의 전력 일격을 손가락 하나로 교정.'
열 페이지의 기록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 이 사람은 0각이 아니다.
하지만 열 페이지의 기록 어디에도 --- 이 사람이 누군가를 해치려 한 장면은 없다. 막았다. 교정했다. 가르쳤다. 이겼지만 상처를 주지 않았다.
노트를 닫았다. 잠시 표지 위에 손을 얹었다. 열 페이지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기록하는 내내 --- 리아의 감각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이 사람은 성녀가 감시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지만 손이 기록한 것은 경고와 반대였다. 위험한 자의 행적이 아닌 --- 보호하는 자의 행적.
감각과 기록의 불일치. 그것이 리아를 이 밤에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선대 성녀의 말이 떠올랐다. '감각을 믿되, 감각에 갇히지 마라. 감각은 위험을 알려주지만, 의도까지 읽어주지는 않는다.' 리아는 그 가르침을 열 살에 받았다. 지금 스물하나. 열한 년이 지났지만 --- 이 순간만큼 그 말이 와닿은 적은 없었다.
감각은 경고한다. 기록은 반박한다. 그렇다면 --- 직접 눈으로 보는 수밖에.
리아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망토를 걸쳤다. 은색 천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성녀 후보실의 문을 열었다. 복도가 어두웠다. 마력등이 야간 모드로 희미하게 켜져 있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숨어서 가는 것이 아니니까.
직접 묻기로 했다. 성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행동. 감시도, 추적도, 보고도 아닌 --- 대면.
복도를 지나 중정을 가로질렀다. 야간 순찰과 마주치지 않았다. 성녀 후보의 야간 외출은 규정에 허용되어 있다. 예언서의 계시를 위한 기도가 야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기숙사 앞 정원.
밤이다. 별이 떠 있었다. 달은 반쯤 가려져 있었다. 구름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다.
정원의 벤치 하나에 카이락스가 앉아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다. 코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추워서가 아닌 것을 리아는 알았다. 이 사람은 밤에 항상 밖에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인지, 잘 수 없는 것인지.
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았다. 벤치의 나무가 차가웠다. 밤 이슬이 표면에 맺혀 있다.
카이락스가 시선을 내렸다. 리아를 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지 않은 것이 ---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누가 오든 상관없다는 뜻인지.
"늦었군."
"잠이 안 와서요."
"산책인가."
"아뇨."
리아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성녀의 감각은 거짓을 싫어하고, 리아 본인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찾으러 왔습니다."
카이락스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감시가 아니라 대면을 선택한 자의 직접성을 읽는 눈.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들어보지."
리아가 숨을 들이쉬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나무 사이로 별빛이 흘렀다. 풀벌레 소리가 정원을 채우고 있다. 벤치 사이의 거리는 두 걸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리아가 선택한 거리였다. 너무 가까우면 감각이 압도당하고, 너무 멀면 눈을 읽을 수 없다.
"당신은 위험한 존재입니까."
"누구에게."
"이 학당에."
카이락스는 별을 보았다. 2초.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아는 그 2초가 거짓말을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답을 찾는 시간. 혹은 --- 답을 선택하는 시간.
"이 학당을 부수러 온 것은 아니다."
부수러 온 것은 아니다. '아니다'라고 했다. '위험하지 않다'고는 하지 않았다. 리아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왜 왔습니까."
3초의 침묵. 정원의 풀벌레 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구름이 달을 가렸다가 벗어났다. 달빛이 카이락스의 얼굴 위로 돌아왔다.
"볼 것이 있어서."
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 대답은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울림.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루시안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예언서에는 심연의 군주가 학당을 멸하러 왔다고 적혀야 합니다."
"적혀야 한다고?"
"예언이 그래야 합리적이니까요. 군주가 학당에 들어왔다면 --- 멸하러 온 것이어야 해요. 하지만---"
리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은 봉인을 막았습니다."
카이락스가 리아를 보았다. 금발이 달빛에 은색으로 빛나고 있다. 청색 눈동자 안에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 결심이 있었다. 두려움보다 결심이 앞에 있는 눈.
"예언이 틀린 적은 없나."
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도요."
"그럼 기다려 봐. 내가 멸하러 왔는지, 아닌지."
"기다리라는 건... 시간을 달라는 뜻입니까."
"아니. 지켜보라는 뜻이다."
지켜보라. 감시가 아니라 관찰이라는 뉘앙스. 리아는 그 단어 선택을 기억에 새겼다.
기다려 보라는 말. 답이 아니다. 하지만 거짓도 아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마치 ---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리아는 3초 동안 카이락스를 보았다. 성녀의 감각이 읽은 것. 공백. 이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성흔도, 악의도, 선의도. 빈 그릇 같았다. 하지만 빈 그릇이 봉인을 막았다. 빈 그릇이 5각의 궤도를 꺾었다. 빈 그릇이 카일의 성흔을 교정했다.
공백 안에 --- 무엇이 있는 것.
성녀의 감각은 만능이 아니다. 읽을 수 없는 것은 두 종류다. 하나, 아무것도 없는 것. 둘, 감각의 범위 밖에 있는 것. 레온 아르케인이 전자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후자라면 --- 성녀의 감각으로도 읽을 수 없는 존재가 학당에 있다는 뜻이다.
결론을 내렸다.
적대하지 않겠다. 아직은. '아직'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완전한 신뢰가 아니라 --- 유예. 지켜보겠다는 것. 다음 행동을 기다리겠다는 것.
"알겠습니다."
리아가 일어섰다.
"잘 자십시오."
카이락스는 그 인사를 받았다.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한 것이 느껴졌다. 백오십 년을 살았다는 존재가 '잘 자라'는 인사에 말을 잇지 못한다. 리아는 그것이 이상했고 --- 동시에, 가슴 한쪽이 눌리는 감각이 있었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무게.
"...그래."
리아가 기숙사 쪽으로 돌아갔다. 정원의 자갈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뒤에서 카이락스의 기척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았다.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다. 리아가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하늘로 시선을 돌렸는지.
성녀의 감각이 읽은 마지막 잔상. '그래'라고 대답할 때의 목소리. 낮고, 짧고 --- 오래 혼자였던 자의 목소리. 인사를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몇 걸음 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예언서를 꺼냈다. 달빛에 펼쳤다.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고 있다. 잉크가 아니라 빛이 글자를 만들었다. 성녀의 눈에만 보이는 빛.
'첫 번째 용사가 깨어난다. 군주가 이름 붙인 자로부터.'
군주가 이름 붙인 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것인가. 인정한다는 것인가. 존재를 각인시킨다는 것인가.
리아는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따라갔다. 빛이 손끝에서 따뜻했다. 예언서의 빛은 항상 따뜻하다. 내용이 두렵더라도.
리아는 카이락스가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침묵으로, 찻잔 소리로, 책장 소리로 --- 카일의 성흔을 교정하고 있다는 것을. 독설로 세르한의 검을 바로잡고 있다는 것을.
군주가 이름 붙인 자. 첫 번째 용사.
예언서를 가슴에 안고 돌아서서 걸었다. 밤바람이 금발을 흔들었다.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벤치에 카이락스가 앉아 있다. 다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혼자.
리아는 돌아섰다. 걸었다.
저 사람은 혼자 하늘을 보고 있다. 백오십 년 동안 --- 아마 계속 그랬을 터다.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넬 사람도 없이.
리아는 걸으면서 예언서를 가슴에 더 꽉 안았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하지만 예언서의 빛은 ---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