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봉인 아래 남은 것
손끝이 검었다.
카이락스는 창가에 서서 오른손을 펼쳤다. 새벽빛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손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끝에 미세한 검은 얼룩. 피부 위에 번진 잉크 같았지만 잉크가 아니었다. 허무의 근원을 1%까지 끌어올린 대가. 심연의 힘은 쓰면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깊은 바다에서 올라온 것이 피부에 스며드는 것처럼. 백오십 년 동안 이 대가를 치른 적이 드물었다. 대개 전력을 쓸 일이 없었으니까.
허무의 베일을 접어 얼룩 위에 덮었다. 0.001%. 얼룩이 희미해진다. 완전히 지우려면 이틀. 그때까지는 주머니든 장갑이든, 손을 감춰야 한다.
번거롭군.
F급 기숙사 3층. 카일의 침대에서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지하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봉인도, 파편도, 리아와의 대화도. 이 방에서 유일하게 잠을 자는 사람이 가장 평화로워 보인다.
카일이 잠결에 뒤척였다. 이불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성흔 파동이 잠든 상태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2각. 불안정한 진동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 어제보다 진동 폭이 줄었다. 2번째 회로의 역류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교정되기 시작한 흔적.
매일 밤 반복하는 훈련의 효과인가.
카이락스는 이불을 집어 카일 위에 덮었다. 손이 닿는 순간 검은 얼룩이 보일 뻔했다. 재빨리 소매를 내렸다.
창밖으로 월식의 숲이 보였다. 조용한 풍경. 파편의 맥동은 어젯밤 이후 잠잠해져 있었다. 허무를 2%까지 사용해 닫은 봉인이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봉인은 닫았을 뿐. 그 아래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정체는 사람 머리 크기로 자라 있었고, 실험 기록부에는 빨간 잉크로 '대상 입학 확인'이라 적혀 있었다.
설계도에 없는 지하 3층. 오래된 금속 문 손잡이의 닦인 먼지. 자신 외에 누군가 그 문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젯밤 --- 후드를 쓴 그림자.
'파편이 완전히 깨어나면, 당신이 원하던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죽음을 미끼로 내밀었던 자.
세면대에서 찬물로 손을 씻었다. 녹물이 3초간 나온 뒤 투명해진다. 물이 손끝을 적셔도 검은 얼룩은 남는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니까. 수건으로 닦아도 마찬가지. 씻는 시늉만 하고 소매를 내렸다.
교복을 입었다. 견장 없는 검은 교복. F급에게는 새 교복이 지급되지 않는다. 단추 하나가 느슨하다. 심연의 왕좌에서 어깨에 걸치던 망토는 대륙에서 가장 고급진 암흑 비단이었는데 --- 지금은 단추가 흔들리는 교복이다. 벨제르가 보면 심연이 들끓을 광경.
"야."
카일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넌 맨날 언제 일어나는 거야. 내가 한 번도 널 자는 꼴을 못 봤어."
"안 잤다."
"또? 안 자면 죽어."
카이락스는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그러면 좋겠군."
카일이 베개를 끌어안으며 찡그렸다. 이 룸메이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아직 적응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넌 그런 말 진지하게 하는 게 더 소름이야."
"일어나라. 늦겠다."
"누가 걱정을 해. 본인이 0각이면서."
"0각도 지각하면 벌점이다."
카일이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맨발이 나무 바닥에 닿으며 삐걱거렸다. 찬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인지 몸을 움츠렸다.
"아 추워. 이 기숙사 난방 진짜 개판이야."
"F급이니까."
"F급이면 얼어 죽어도 되냐고."
카이락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본관 지하 2층 복도는 달라져 있었다.
교수진이 결계 보강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복도 양쪽 벽에 새로운 감응석이 박히고 있었다. 푸른 빛을 내는 결정체. 보조 마법사 둘이 무릎을 꿇고 결계선을 그리는 중이다. 잉크가 아니라 액상 성흔 용매. 바닥에 스며드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금속과 약초가 섞인, 날카로운 냄새. 어젯밤 봉인 손상을 감지한 뒤의 대응.
카이락스는 평소처럼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검은 얼룩이 보이지 않게. 발소리를 의식적으로 울렸다. 소리 없이 걷는 것은 버릇이었지만, 인간 학생은 발소리를 낸다. 백오십 년 동안 소리를 지운 채 걸었으니 --- 일부러 소리를 내는 것이 더 어렵다.
보조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지나가도 됩니까."
"지하 2층은 당분간 통행 제한입니다. 용건이 없으면 올라가세요."
F급 견장 없는 교복을 확인하고 관심을 잃는 눈. 0각 학생이 지하 2층에 올 이유가 없으니까. 시선이 이미 결계선 위로 돌아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일정한 리듬. 군화를 신은 자의 걸음. 전장에서 오래 걸은 자의 발소리. 불규칙한 바닥에서도 보폭이 흔들리지 않는 --- 전선에서 수천 리를 행군한 몸이 만드는 리듬.
알테리온.
교수 예복 위에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오른쪽 눈 위의 칼자국이 마력등 아래서 선명하다. 결계 보강 현장을 직접 점검하러 온 것. 보조 마법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알테리온은 그들에게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카이락스를 보았다.
멈추지 않았다. 걸으면서 시선만 멈추었다. 눈이 카이락스의 손을 스쳤다. 주머니에 넣은 손. 보이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전장의 눈은 숨기는 행위 자체를 읽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자세가 추위 때문인지, 습관인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인지 --- 구별하는 눈.
"자네."
"교수님."
"어젯밤에 기숙사에 있었나."
질문이었지만 확인에 가까운 톤이다.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자의 목소리. 알테리온은 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 묻는 것은 --- 카이락스에게 기회를 주는 행위다. 진실을 말할 기회, 혹은 거짓을 선택할 기회.
"잠이 안 와서 산책을 했습니다."
거짓을 선택했다. 두 번째.
알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믿지 않는 웃음. '손이 추웠다'고 했을 때와 같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추궁하지 않는 웃음. 기록만 하는 표정.
"산책이 많은 학생이군."
"F급은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알테리온이 한 걸음 지나치다가 --- 멈추었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지 않은 채.
"지하 2층 결계가 어젯밤 손상되었다. 8각급 출력 흔적이 남았어."
카이락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계단 쪽으로 걸으면서.
"8각이면 대단하군요."
"사백 년 만이야. 이 학당 역사상."
알테리온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가 한 것이냐'에 가까운 무게. 하지만 직접 묻지는 않았다. 아직.
"산책하면서 뭔가 이상한 건 못 느꼈나."
"조용했습니다."
"...그래."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보조 마법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결계선의 밀도를 높이라는 지시.
카이락스는 계단을 올라갔다.
1%가 8각으로 읽혔다. 인간의 척도로는 그것이 한계다. 8각 이상을 측정할 장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알테리온은 척도의 정확성이 아니라 이상의 존재 자체를 짚어냈다. 전장의 눈이란 수치가 아니라 직감에 있다.
이 교수는 까다롭군.
1층 회랑으로 올라왔을 때, 리아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자세. 흰 의복. 은빛 견장. 아침 햇살이 금발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손에 서적을 한 권 안고 있었지만 읽고 있지는 않았다. 책등이 위를 향한다 --- 읽다가 덮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소품으로 들고 있었다는 뜻.
"좋은 아침입니다."
카이락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지하 3층으로 내려가기 전, 정원에서의 대화. '이 학당을 부수러 온 것은 아니다.' 리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 그리고 그보다 더 전, 봉인을 함께 막았던 밤. 예언서의 문장. '심연의 군주가 학당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간 뒤의 ---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이군."
적절한 대답이 아닌 것을 알았다. 하지만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에 대한 경험이 백오십 년의 생에서 부족하다. 심연에서는 아침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영원한 밤의 대륙에서 인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움직이는 미소가 아니었다. 눈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밑에 경계가 남아 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눈.
"손은 괜찮으세요?"
카이락스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멈추었다. 이 여자는 무엇을 본 것인가. 어젯밤 봉인을 닫을 때, 손끝에서 흘러나온 허무의 잔향을 감지한 것인가.
"추워서 넣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 거짓말. 알테리온에게는 '산책', 카일에게는 '안 잤다', 리아에게는 '손이 추워서'. 거짓말의 수가 늘고 있었다. 진실을 말할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리아는 더 묻지 않았다. 책을 가슴에 안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마력학 수업에서 봬요."
그것뿐이었다. 어젯밤의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봉인도, 심연도, 예언도, 배후도. 대신 --- 수업에서 보자는 말. 일상의 언어. 폭풍이 지나간 뒤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감시가 아니었다. 동행의 선언. 아직 완전한 신뢰가 아니라는 것은 눈동자 깊숙이 남은 경계가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적대를 거둔 것은 분명하다.
카이락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리아의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따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날카롭지도 않은 --- 이상한 온도.
복잡해지고 있군.
죽을 곳을 찾으러 온 학당에서. 성녀 후보가 인사를 하고, 교수가 의심을 하고, 봉인 아래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파편이 실험 대상이 되어 있다.
처리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죽으러 왔는데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 역설이다.
교실 문을 열었을 때, 교탁 위에 새로운 공지가 붙어 있었다.
흰 종이. 붉은 인장. 학당 행정부 직인.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아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1차 마력학 실기 평가 --- 3일 후. 전 등급 참가 필수. 성흔 운용 능력 실측. 기본 과제 + 대전 평가.'
카일이 뒤에서 들어오며 공지를 읽었다. 목소리가 교실 전체에 울렸다.
"야, 마력학 실기라고? 0각이 마력 실기를 어떻게 봐?"
카이락스는 자리에 앉았다. 창가 맨 뒷줄. 늘 같은 자리. 등을 벽에 기대고 다리를 뻗었다. 심연의 왕좌에 앉던 자세가 아닌 --- F급 낙제생의 자세로.
"앉아서 보면 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성흔 운용 능력 실측이라고. 성흔이 없는데 뭘 실측해?"
"없는 것도 실측이 되지 않겠나."
카일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표정. 이 룸메이트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말이 짧고,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을 하는데, 그 뒤에 뭔가가 숨어 있는 느낌. 한 발짝 뒤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처럼.
"...진짜 걱정 안 되냐?"
"안 된다."
"거짓말."
카일이 자기 자리로 가며 중얼거렸다. "0각이 걱정이 안 된다. 미친 놈이야 진짜."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다른 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다. 빈 교실에 두 사람의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카일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야, 근데 어젯밤에 또 나갔다 왔지?"
"왜."
"네 신발에 흙 묻어 있거든. 기숙사 복도는 돌바닥이야. 흙이 묻을 데가 없어."
제법이군. 카이락스는 신발 밑을 보지 않았다. 보면 인정하는 꼴이다.
"운동장을 걸었다."
"새벽에?"
"잠이 안 온다고 했지."
카일이 한숨을 뱉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넌 진짜 비밀이 많은 놈이야. 빚쟁이한테 쫓기는 몰락 귀족이 밤마다 돌아다니고, 0각인데 이상한 걸 알고 있고."
"이상한 것이라니."
"2번째 회로 역류. 그거. 교수도 모르는 걸 네가 알잖아."
카이락스는 창밖을 보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그 침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룸메이트는 대답하기 싫으면 창밖을 본다. 거짓말을 할 때는 짧게 말한다. 진실에 가까울 때는 --- 침묵한다.
"...몰라. 됐어."
카일이 교과서를 꺼내며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한 번 더 카이락스의 손 --- 주머니에 넣은 손을 스쳤다.
카이락스는 공지를 다시 보았다. '전 등급 참가 필수.'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0각에게 마력 실기 시험. 모순이다. 하지만 모순이 아닌 가능성도 있었다. 누군가 카이락스를 시험대 위에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 알테리온이 어젯밤 8각급 출력 흔적을 발견했다. 교수진이 결계를 보강하고 있다. 그리고 '전 등급 참가 필수'라는 공지.
우연의 수가 많아지면 그것은 의도가 된다.
3일.
창밖으로 연무장이 보였다. 빈 모래 위에 오전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모래를 흩뜨렸다. 3일 뒤, 저 위에 서야 한다.
0각으로.
심연의 군주가 아닌, F급 낙제생으로.
준비할 것이 있었다 --- 죽지 않을 정도의 거짓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