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104구 이후
단톡이 새벽부터 울렸다.
폴더폰 화면에 읽지 않은 메시지 14건. 야구부 단체 문자였다. 2009년에는 카카오톡이 없었다. 문자가 올 때마다 폴더폰이 덜컥거렸고, 나는 그걸 알람 대신 들으며 천장을 보고 있었다.
새벽 5시 38분.
열어봤다.
'104구에서 빠지는 놈이 어딨냐'
'진짜 대단한 건지 제정신이 아닌 건지'
'근데 이긴 거 아니야?'
'정민이가 마무리 잘 던진 거지'
'감독님 표정 봤냐 ㅋㅋ'
'강시우 걔 원래 저런 애임?'
열네 개 중 내 이름이 직접 들어간 건 네 개였다. 나머지는 빗겨갔다. 옆에서 쏘되 정면은 피하는 방식. 고교 야구부의 문법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직접 욕하면 책임이 생긴다. 간접적으로 쏘면 책임이 없다.
폴더폰을 닫았다.
이불 속에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 다섯 개가 전부 움직였다. 팔꿈치를 눌렀다. 안쪽. 내측 상과. UCL이 붙어 있는 자리.
통증 없음. 당김 없음.
105구 규정 안에서 던졌기 때문이다. 선을 지키면 몸이 돌아온다. 선을 넘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12년 전, 150구를 넘긴 내 팔꿈치가 증명한 사실이었다. 14개월의 재활. 137km로 돌아온 구속. 6라운드 지명. 2군 3년.
맞는 선택이었다.
세수를 했다. 거울 속 얼굴. 16살. 볼에 아직 살이 남아 있었다. 턱선이 둥글었다. 28살의 기억이 깃든 16살의 눈동자. 아직 그 차이를 들킨 적은 없다.
교복을 입었다. 가방을 챙겼다. 현관에 아버지의 택시 열쇠가 걸려 있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이다. 방문이 닫혀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월 100만 원 회비와 200만 원 레슨비를 벌기 위한 야간 근무의 소리.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어젯밤 관찰자의 메모. 'Spin Efficiency 측정 요청.'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고교 야구 경기에서 Spin Efficiency를 적을 줄 아는 사람이 스탠드에 있었다. 2009년에. 그건 평범한 일이 아니다.
* * *
교실에 들어서자 시선이 왔다.
야구부 동기 둘이 뒤에서 뭔가를 말하다 멈췄다. 입이 닫히는 타이밍이 내가 문을 연 타이밍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입이 아니라 결과다.
자리에 앉았다. 칠판에 '1교시 수학'이라고 적혀 있었다.
쉬는 시간에 이민호가 왔다.
유격수. 수비 범위는 넓지만 송구가 불안정한 선수. 긴장하면 릴리스가 흔들리는 타입. 전생에서 이민호는 고2까지 야구를 하다 그만뒀다. 멘탈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민호가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앉는 방식이 조심스러웠다. 경계가 아니라 배려의 조심스러움.
"시우야."
"네."
"어제 경기 봤는데. 잘 던졌더라."
"감사합니다."
"근데... 왜 나왔어? 한 타자만 더 잡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톤이 건우와 달랐다. 건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었다. 이민호의 목소리에는 궁금함이 있었다. 같은 질문이라도 동기가 다르면 답이 달라진다.
"팔이 한계였어요."
"한계? 근데 아파 보이진 않던데."
"아프기 전에 멈춰야 합니다. 아프고 나면 늦어요. 팔꿈치 인대는 한번 끊어지면 1년 넘게 재활해야 해요. 운이 나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진 걸 느꼈다. 전생의 기억이 목소리에 실렸다. 의식적으로 톤을 올렸다.
이민호가 눈을 깜빡였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표정이었다. 아프기 전에 멈추는 투수를 이 시대의 고교 야구에서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감독이 "계속 가"라고 하면 계속 가는 게 당연한 세계니까.
"넌 좀... 이상하다."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근데."
이민호가 덧붙였다.
"이상한 게 나쁜 건 아니야."
그 말이 예상 밖이었다. 철수는 '이상하다'에서 끊었다. 이민호는 '나쁜 건 아니야'를 붙였다. 같은 관찰이지만 결론이 달랐다.
팀 안에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공기가 달라진다. 사람이 만드는 공기를 측정하는 기계는 없다. 하지만 공기가 바뀌면 경기가 바뀐다.
* * *
오후 훈련. 운동장에 전원이 모였다.
감독이 앞에 섰다. 코치가 옆에서 클립보드를 들고 있었다. 3월 끝자락의 바람이 스탠드 쪽에서 불어왔다. 불펜 쪽 흙이 어제 비로 약간 젖어 있었다.
"이마트배 예선. 다음 주 목요일부터다."
선수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고교 야구 시즌 첫 대회. 등 뒤의 긴장이 느껴졌다. 엔트리 18명. 투수는 셋. 선발은 하나.
"엔트리 명단은 목요일에 발표한다. 연습 빠지는 놈은 자동 탈락이다."
감독의 시선이 전체를 훑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은 사람의 시선이었다.
해산. 투수진은 불펜으로. 야수진은 배팅케이지로.
불펜에서 차도윤이 먼저 올라갔다. 2학년 에이스. 팔이 길었다. 스트라이드가 넓었다. 공이 나갈 때 미트 소리가 짧고 강했다. 142. 144. 145. 스피드건 수치가 올라갈 때마다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펜에서 투수는 서로를 관찰한다. 구속을 비교하고, 폼을 비교하고, 코치의 반응을 비교한다. 12년 전에도 그랬다. 그때는 구속만 비교했다. 지금은 다른 것도 본다.
차도윤이 내려오면서 나와 스쳐 지나갔다. 눈이 1초 마주쳤다. 표정이 없었다. 표정이 없다는 건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내 차례.
마운드에 올라갔다. 러버에 발을 올렸다. 로진백을 집었다. 가루가 손바닥에 묻었다.
포심 그립. 검지·중지 솔기 위. 간격 2cm. 압력 6:4. 이 그립을 잡는 순간, 28살의 손가락 기억이 16살의 손에서 작동했다.
철수가 미트를 냈다. 몸 쪽 낮은 곳.
첫 공. 세트 포지션. 하체 먼저. 스트라이드를 신장의 80%로 제한. 릴리스.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깨끗했다. 잡음 없이 역회전만 걸리는 느낌.
139.
두 번째. 같은 메카닉. 같은 감각. 140.
세 번째. 141.
숫자가 안정적이었다. 회전효율은 체크하지 않아도 손끝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97% 이상. 이 감각을 전생에서 3년 걸려 찾았다. 지금은 3초.
10구를 던지고 내려왔다.
감독이 불펜 그물 뒤에서 나를 봤다.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선의 길이가 달라져 있었다. 3초. 지난번 1초에서 늘어났다.
돌아서면서 감독이 코치에게 뭔가를 말했다.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클립보드에 뭔가를 적었다.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타자야. 한 타자만 더 던지면 끝이었잖아."
돌아보지 않았다.
한 타자. 전생에서도 그 말을 들었다. 한 타자만 더. 한 이닝만 더. 45구를 더 던진 뒤에도 '한 타자'였다. 한 타자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팔꿈치가 끊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건 탓할 수 없다. 경험하지 않은 고통을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건 야구가 아니라 종교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목요일.
엔트리 명단이 야구부 게시판에 붙었다.
선수들이 게시판 앞에 반원형으로 서 있었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서, 자기 이름을 찾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봤다. 어깨 너머로.
이름이 있었다. 강시우.
포지션 옆에 한 글자.
'불'.
불펜. 선발이 아니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선발: 차도윤. 불펜: 강시우, 정민.
예상대로였다. 감독 입장에서 고1 신입생을 첫 대회 선발로 올릴 이유가 없다. 차도윤이 에이스다. 2학년. 145km. 선발은 에이스의 자리다.
하지만 불펜이면 충분하다.
차도윤이 80구 이후에 무너진다. 그때 올라간다. 3이닝. 무실점. 선발보다 더 임팩트를 남길 수 있다. 불펜 투수가 경기를 구하면, 그건 선발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2군에서 배운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건우가 게시판을 봤다. 건우의 이름은 '예비' 칸에 있었다.
건우의 어깨가 굳었다. 주먹이 쥐어졌다. 손가락이 하얘질 때까지.
그리고 돌아섰다. 말없이. 발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뛰지는 않지만, 걷는 속도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게시판 옆에서 코치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몇 마디가 들렸다.
"네, 네... 학부모회 건은 감독님과 직접..."
코치가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쉬었다.
학부모회. 전생에서도 이 단어가 등판 순서를 바꾼 적이 있었다. 돈이 영향을 미치고, 학부모가 전화를 하고, 감독이 눈치를 본다. 실력이 아닌 것이 마운드를 결정하는 세계.
건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았다. 건우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 학부모회와 연결이 있다는 것. 전생의 기억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아직 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 *
돌아서서 불펜으로 갔다.
장비 창고 앞을 지나면서 문을 확인했다. 닫혀 있었다. 자물쇠는 없었다. 랩소도가 안에 있다. 내일 훈련 전에 상대팀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
불펜 입구에 서서 마운드를 봤다. 오후 햇살이 마운드 흙 위에 비스듬하게 떨어져 있었다. 흙이 말라가고 있었다.
이 마운드에 다시 설 것이다. 불펜 투수로. 차도윤이 무너진 뒤에.
숫자를 준비한다. 데이터를 정리한다. 상대 타자를 분석한다.
숫자가 설득하지 못하면 결과가 설득한다.
주머니에서 폴더폰을 꺼냈다. 단톡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14개.
'104구에서 빠지는 놈이 어딨냐'
있다. 여기 있다.
104구에서 빠지는 놈이 이마트배 예선에 불펜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숫자로 증명한다.
폴더폰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