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숫자의 지도
불펜에 혼자 남았다.
훈련이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접촉불량으로 깜빡이다 꺼졌다. 랩소도는 삼각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전원은 꺼 놓았다.
오늘은 내 공이 아니라, 상대의 배트를 분석할 차례였다.
폴더폰을 열었다. 2009년의 인터넷은 느렸다. 페이지 하나 여는 데 15초. 이마트배 예선 상대팀 영상을 찾는 데 20분이 걸렸다. 검색 결과 대부분은 텍스트였다. 영상은 고교 야구 커뮤니티에 하나 올라와 있었다.
용산공고. 작년 이마트배 8강. 올해 전력은 알려진 게 적었다. 정보의 사막이었다.
하지만 영상이 하나 있었다. 작년 가을 전국체전 16강 하이라이트. 2분 47초. 핸드폰 촬영. 화질은 열악했다. 타자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윙 궤적은 읽을 수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몸의 역학이다. 배트가 어디서 출발하고, 어디를 지나고, 어디서 끝나는지. 스윙의 궤적에는 약점이 들어 있다. 지문처럼. 한 명의 타자가 수천 번 스윙해도, 궤적의 형태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노트를 펼쳤다. 볼펜을 집었다.
1번 타자. 좌타. 다운스윙. 바깥 낮은 공에 배트 끝이 0.1초 늦게 도착한다. 카운트 2-1 이후 스윙 비율이 급격히 올라간다. 초구에 변화구를 던지면 허를 찌를 수 있다.
2번 타자. 좌타. 접촉율이 높다. 컨택 히터. 삼진을 잡기 어렵지만 장타력이 없다. 낮은 존으로 유도해 땅볼을 만드는 게 효율적이다.
3번 타자. 우타. 업스윙. 높은 공에 강하다. 하지만 높은 곳을 노리는 타자는 낮은 공에 약하다. 포심 낮은 곳으로 유인해 카운트를 잡은 뒤, 체인지업으로 마무리.
4번 타자. 우타. 파워 히터. 스윙이 크다. 배트 스피드는 빠르지만 궤적이 넓어서 인사이드에 취약하다. 몸 쪽 높은 직구로 밀어낸 뒤 바깥 낮은 변화구.
5번부터 9번까지도 적었다. 한 명당 3줄. 노트 두 페이지가 채워졌다. 볼펜 잉크가 줄었다.
이 분석의 정확도는 70% 정도일 것이다. 1년 전 영상이고, 성장기 타자의 스윙은 한 겨울 사이에도 변한다. 하지만 70%의 정보는 0%보다 낫다.
전생에서 0%의 정보로 마운드에 올라간 적이 수십 번이었다. 2군 패전 처리 투수에게 상대 타자 분석을 해 주는 코치는 없었다. 그때마다 몸으로 때웠다. 구속으로 밀고, 맞으면 다음 타자를 잡고, 또 맞으면 그냥 맞았다. 이번에는 머리로 간다. 머리는 팔보다 오래 쓸 수 있다.
* * *
다음 날 훈련 전. 장비 창고 안. 철수를 불렀다.
창고 안은 좁았다. 랩소도 삼각대와 글러브 선반과 공 바구니 사이에 두 사람이 서 있으면 어깨가 닿을 정도였다. 가죽과 먼지 냄새. 불펜 특유의 냄새와 비슷하지만 더 오래된 냄새.
노트를 펼쳐서 랩소도 옆에 올려놓았다.
"용산공고 타선 분석입니다."
철수가 노트를 받아 들었다. 한 명씩 넘기면서 읽었다. 읽는 속도가 느렸다. 한 줄을 읽고, 멈추고, 다시 읽었다. 포수는 투수와 읽는 방식이 다르다. 투수는 숫자를 본다. 포수는 숫자 뒤의 상황을 본다. 이 타자가 이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 이 코스로 미트를 내야 한다. 철수는 그걸 계산하면서 읽고 있었다.
"이걸 네가 다 봤어?"
"봤습니다."
"영상이 있었어?"
"작년 전국체전 하이라이트요. 2분 47초짜리. 화질은 나쁘지만 스윙 궤적은 읽힙니다."
"스윙 궤적을 영상으로 읽는다고?"
"배트가 출발하는 위치와 도착하는 위치를 보면, 어떤 존에 강하고 약한지 나옵니다. 스윙 궤적은 골격 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크게 변하지 않아요."
철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측정하는 눈이 아니었다. 납득하는 눈이었다.
"이 분석대로 리드하면 돼?"
"기본 전략입니다. 실전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은 포수가 판단해 주세요. 제가 마운드에서 보는 건 공뿐이에요. 타자의 스탠스 변화, 체중 이동, 눈동자 움직임은 포수 시야가 더 넓습니다."
"나한테 맡겨?"
"데이터는 제가 줍니다. 실전 판단은 포수 몫이에요."
이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면, 투수와 포수가 하나의 시스템이 된다. 데이터를 수집하는 쪽과 데이터를 실행하는 쪽. 기계가 아니라 역할 분담. 그게 배터리의 본질이다.
철수가 노트를 다시 봤다. 천천히. 한 명씩.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속으로 외우는 것이다.
"근데 이거... 감독님한테 보여줘도 돼?"
"보여줄 겁니다."
"반응이 어떨 것 같아?"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는 무시. 하나는 관심. 어느 쪽이든 경기 결과가 나오면 데이터가 설득합니다."
"숫자가 설득 못 하면?"
"결과가 설득합니다."
철수가 잠깐 나를 봤다. 3초.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는 숫자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숫자가 있으면 다른 건 더 잘 되겠지."
그 말이 포수의 언어였다. 숫자가 야구의 전부가 아니라 야구를 돕는다는 관점.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그 차이가 오히려 배터리를 만든다.
노트를 닫았다.
"내일 훈련 때 리드 리허설 하죠. 용산공고 타순 순서대로. 9명 전원."
"9명 전원?"
"네."
철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부담의 한숨이 아니라 할 일이 생긴 사람의 한숨.
"알았어."
철수가 창고 문을 열고 나갔다. 햇살이 잠깐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나는 잠시 남아 노트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차도윤.
투구수 80구 이후 회전효율 급락. 6이닝 이후 Spin Rate 평균 150rpm 하락. 피로 누적 시 릴리스 포인트가 0.8cm 내려감. 내려간 릴리스에서 공의 궤적이 변한다. 역회전 축이 기울어진다. 타자가 읽기 쉬워진다.
에이스의 한계가 숫자로 적혀 있었다.
알려주면 팀에 이득이다. 에이스가 자기 한계를 알면 보정할 수 있다. 80구 한계를 90구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팀 전체의 투수 운용이 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에이스에게 "당신의 한계는 80구"라고 말하는 신입생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도 안다. 도움이 아니라 도발로 읽힐 수 있다. 약점을 지적당한 사람은 고마워하기 전에 주먹을 쥔다.
결정을 미뤘다. 경기가 답을 줄 것이다.
* * *
밤. 원룸.
책상 위에 노트를 펼치고 타자 분석을 다시 정리했다. 깨끗한 페이지에 옮겨 적었다. 글씨를 최대한 정돈했다. 감독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 감독이 읽기 싫은 글씨를 읽어줄 리가 없다.
정리를 마치고 스트레칭을 했다. 어깨 회전. 팔꿈치 굴신. 손목 돌리기. 투수의 밤 루틴.
볼펜 잉크가 거의 떨어졌다. 편의점에서 새 볼펜을 사야 한다. 천 원. 천 원짜리 볼펜으로 타자 9명의 약점을 적는다. 랩소도가 수천만 원이고, 트랙맨이 수억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볼펜으로 적은 노트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봤다. 새벽 1시 12분.
발소리. 신발 벗는 소리. 천천히. 냉장고 문 여는 소리. 컵에 물 따르는 소리. 그리고 조용해졌다.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택시 열쇠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점퍼를 벗지 않은 채였다. 피곤할 때 옷을 벗는 것조차 미루는 사람.
아버지의 손이 컵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갈라져 있었다. 핸들을 잡는 자리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투수의 손과 택시 운전사의 손은 닮아 있었다.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잡는 사람들의 손.
"밥 먹었냐."
"먹었어요."
안 먹었다. 하지만 안 먹었다고 하면 또 라면을 끓이신다. 새벽 1시에.
"야구부 잘 되고 있어?"
"네. 다음 주에 대회 있어요."
"대회?"
"이마트배요. 예선전."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트배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셨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야구 대회는 전부 '시합'이었다.
"시합이구나."
물컵을 내려놓으셨다. 갈라진 손가락으로 택시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더 묻고 싶은 사람의 손이었다.
"...선발이냐?"
야구를 모르는 아버지가 '선발'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셨다. 어디서 들었을까. 택시 손님에게서인지, 라디오에서인지.
"불펜이에요. 구원 투수요."
"그게 좋은 거냐."
"충분히 좋은 겁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좋다'는 말에 얼굴이 풀렸다. 월 100만 원 회비. 200만 원 레슨비. 합산 300만 원. 아버지의 한 달 수입에서 절반 이상이 내 야구에 들어가고 있었다.
"잘해."
두 글자. 그게 아버지의 응원이었다. 두 글자에 300만 원어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네."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그 돈이 헛되지 않게 한다. 그 손이 헛되지 않게 한다.
노트를 닫았다. 내일. 리드 리허설. 9명 전원.
철수의 미트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