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선발과 불펜
훈련 시작 전. 미팅룸.
미팅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야구부 창고 옆 다용도실이었다. 접이식 의자가 스무 개쯤 놓여 있었고, 앞에 화이트보드가 하나 있었다. 가죽과 땀과 먼지가 섞인 냄새. 야구부라면 어디든 같은 냄새가 난다.
감독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코치가 옆에서 자석 이름표를 들고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 손으로 쓴 것이었다. 코치의 글씨는 둥글었다.
"이마트배 예선 로스터. 지금부터 발표한다."
의자에 앉은 선수들 사이에서 긴장이 흘렀다. 어깨가 굳은 사람. 손가락을 꼬는 사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떨리는 사람. 이 순간이 고교 야구의 가장 잔인한 순간이다. 이름이 불리는 사람과 불리지 않는 사람.
코치가 자석 이름표를 화이트보드에 붙이기 시작했다.
투수: 차도윤(선발), 강시우(구원), 정민(마무리).
내 이름이 붙었다. 구원. 불펜.
포수: 김철수.
내야가 하나씩 채워졌다. 이민호. 유격수.
건우의 이름은 '예비' 칸에 붙었다. 엔트리 안에는 들어갔지만, 선발 라인업에서 빠져 있었다.
건우의 입술이 일직선이 됐다. 목의 힘줄이 두드러졌다. 숨을 참는 것인지 말을 참는 것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감독이 말했다.
"선발 투수는 차도윤. 구원은 강시우, 마무리는 정민. 타순은 코치가 개별 통보한다. 질문 있나."
질문은 없었다. 감독의 목소리에는 '이건 통보다'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었다.
해산.
건우가 먼저 나갔다. 문을 세게 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고리를 놓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작아졌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잠깐 남아 있었다. 화이트보드를 봤다. 자석 이름표가 포지션별로 배치되어 있었다. 9개의 이름이 다이아몬드 형태로 놓여 있었다.
내 이름은 다이아몬드 밖에 있었다. '불펜' 칸. 경기가 시작될 때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호출을 받으면 올라가는 자리.
괜찮다. 차도윤이 80구 이후에 무너진다. 그때 올라간다. 3이닝. 무실점.
선발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중요하다.
* * *
운동장 구석에서 건우가 혼자 러닝을 하고 있었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훈련 페이스가 아니었다. 분노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40분쯤 지났을 때, 코치가 전화를 받았다. 운동장 뒤편 관람석 그늘에서. 코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통화가 3분을 넘기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화를 끊고 감독에게 갔다.
"감독님, 학부모회에서..."
"전화 왔나."
"건우 어머니가... 연습 경기에서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냐고..."
감독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른쪽 어깨를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짜증이 날 때, 교체를 결정할 때, 뭔가를 참을 때 나오는 동작. 오래된 부상의 흔적이 남긴 습관.
"경기는 내가 짠다. 학부모한테 그렇게 전해."
감독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지친 것이다.
코치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나는 불펜 쪽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그 장면을 봤다. 20미터 거리.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몸의 각도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감독이 코치에게 등을 돌리고 마운드 쪽을 봤다. 어깨가 한 번 내려갔다 올라갔다.
실력이 아닌 것이 등판을 결정하는 세계. 어떤 감독은 거기에 넘어간다. 어떤 감독은 버틴다.
강문석 감독은 이번에 버텼다. 하지만 계속 버틸지는 모른다. 압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 * *
오후 훈련. 불펜.
철수와 리드 리허설을 했다.
"1번 타자. 좌타. 바깥 낮은 공에 늦음. 초구 직구 노리는 패턴."
철수가 미트를 냈다. 바깥 낮은 곳.
"첫 구는 몸 쪽 높은 곳으로 밀어냅니다. 타자의 초구 노림을 빗겨가는 거예요. 두 번째부터 바깥 낮은 곳."
철수가 미트 위치를 바꿨다. 몸 쪽 높은 곳. 공을 던졌다. 미트에 꽂혔다.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3번 타자. 우타. 높은 공에 강함. 낮은 곳으로 유인 후 체인지업."
"체인지업 몇 번이나 가지고 있어?"
"1경기에 15~20개 정도 던질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팔에 부담이 생겨요."
"체인지업도 팔에 부담이 있어?"
"직구보다 적지만, 손목 각도가 달라서 반복하면 부하가 쌓입니다."
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수는 투수의 공 종류별 부담까지 알아야 한다. 철수는 배우고 있었다.
이 리허설을 9명 전원 대상으로 했다. 40분. 철수가 미트를 벗을 때 손바닥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이런 거 처음이다."
"뭐가요."
"경기 전에 상대 타자를 한 명씩 코스 지정해서 연습하는 거. 보통은 그냥 '직구 위주로' '변화구 섞어서' 정도잖아."
"2020년대에는 프로에서도 합니다."
입을 닫았다. 2020년대. 이 시대에 그 단어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철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2020년대?"
"그렇게 될 거라는 뜻이에요. 야구가 점점 데이터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위기를 넘겼다. 12년 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가끔 시제를 틀린다. 조심해야 한다.
* * *
불펜 뒤쪽에서 감독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몰랐다. 돌아보니 그물 뒤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표정이 없었다. 코치는 옆에 없었다. 감독 혼자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2초. 감독이 먼저 돌아섰다. 말없이 걸어갔다.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인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무시도 아니었다.
관찰이었다. 감독이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은 인정의 전단계다. 전생에서 감독은 나를 관찰한 적이 없었다. "계속 가"와 "더 던져" 사이에 관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틈이 생겼다. 104구의 자진 교체가 만든 틈이었다.
* * *
경기 전날 밤. 원룸.
노트를 넘겼다. 용산공고 분석은 끝났다. 데이터를 다 적었고, 리허설도 했고, 팔 상태도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마트배는 토너먼트다. 예선을 통과하면 본선. 폴더폰으로 고교 야구 커뮤니티를 검색했다. 본선 예상 대진표 글이 하나 있었다. 로딩에 30초. 화면에 대진표가 떴다. 16강.
천량고가 8강까지 올라가면.
대진표 반대편에 이름이 하나 있었다.
해성고. 전북.
해성고 에이스. 정우진. 고1. 구속 148.
손가락이 멈췄다. 전생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우진은 고3이 되었을 때 155km를 찍었다. 전국 유일의 150 중반 고교생.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후보. 계약금 5억 이상이 거론됐다. 그리고 프로 2년 차에 어깨가 나갔다. 스트라이드가 너무 넓었다. 투구수 관리가 없었다.
재능이 몸을 이기지 못한 사례. 내가 아는 미래. 정우진은 아직 모르는 미래.
노트를 닫았다. 아직 만날 때가 아니다. 예선을 먼저 통과한다.
하지만 이름을 확인한 것만으로 위장이 조여왔다. 긴장이 아니었다. 기대였다. 재능과 설계가 마주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폴더폰을 닫았다. 시계를 봤다. 23시 14분. 내일 경기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정우진의 폼이 떠올랐다. 넓은 스트라이드. 긴 팔 스윙. 148km.
내 공은 142km. 하지만 회전효율은 98%.
숫자와 숫자가 맞붙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내가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