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이마트배 1차전
목동 야구장.
2009년 3월 마지막 주. 하늘이 흐렸다. 바람이 3루 쪽에서 1루 쪽으로 불고 있었다. 투수에게 유리한 바람이었다. 타구를 눌러준다.
스탠드가 절반쯤 찼다. 고교 야구 시즌 첫 대회. 관중 대부분은 학부모와 야구부 동기들이었다. 응원단은 없었다. 예선전이니까. 하지만 군데군데 다른 옷차림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점퍼를 입고 메모지를 든 사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 스카우트들이었다.
고1 첫 대회에서 스카우트를 의식하는 건 이른 일이다. 하지만 나는 28살이다. 저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지 안다. 구속. 제구. 체격. 투구 폼의 재현성. 그리고 무엇보다, 마운드 위에서의 태도.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것. 스카우트 용어로 '메이크업'이라고 부른다.
불펜에 앉았다. 정민이 옆에 있었다. 3학년. 과묵한 투수. 구속은 130대 후반이지만 컨트롤이 좋다. 글러브를 무릎 위에 놓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운드 위에 차도윤이 올라갔다.
* * *
차도윤의 공은 좋았다.
1이닝. 첫 타자. 직구 바깥 낮은 곳. 144. 스윙. 배트 끝에 맞았다. 유격수 정면 땅볼. 이민호가 잡았다. 깨끗한 송구. 두 번째 타자. 슬라이더 바깥. 삼진. 세 번째 타자. 플라이아웃. 14구. 삼자범퇴.
2이닝. 안타 하나를 허용했지만 후속 타자를 병살로 잡았다. 누적 28구. 릴리스 포인트가 일정했다.
3이닝. 삼진 하나. 깨끗한 이닝. 누적 40구.
4이닝. 선두 타자 볼넷. 공이 살짝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견제로 도루를 막고 후속 타자를 잡았다. 누적 54구.
여기까지는 좋았다.
5이닝. 용산공고 타선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1번 타자가 초구 직구를 쳤다. 안타. 내 노트에 적었던 패턴이었다. 초구 직구 노림. 차도윤은 초구에 직구를 던졌다. 데이터가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상대는 그 당연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볼넷. 주자 1, 3루. 적시타. 1실점. 누적 68구.
차도윤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없었다. 1실점은 에이스에게 허용 범위다.
하지만 나는 숫자를 보고 있었다.
68구. 다음 이닝이 6이닝. 12구만 더 쓰면 80구에 도달한다.
* * *
6이닝.
첫 타자에게 던진 직구. 스피드건에 143이 찍혔다. 5이닝까지 평균 145였다.
2km. 스탠드에서는 감지하기 어려운 변화다. 하지만 불펜에서 보면 달랐다. 공의 궤적이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뜨는 느낌이 줄었다. 릴리스 포인트가 내려간 것이다.
노트에 적었던 숫자. 80구 이후 회전효율 급락. 릴리스 포인트 0.8cm 하강.
지금 78구. 80구 직전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경기 긴장이 피로를 앞당긴 것이다.
두 번째 타자. 안타. 공이 높았다. 릴리스가 내려가면 공이 올라간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투구 역학이다. 손끝이 낮아지면 출발 각도가 달라지고, 낮은 곳을 겨냥했던 공이 존 중앙으로 올라온다.
세 번째 타자. 볼넷. 주자 1, 2루.
네 번째 타자. 4번. 파워 히터. 차도윤이 직구를 던졌다. 존 중앙. 높았다. 배트가 정확히 맞았다. 타구가 외야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주자 두 명이 홈을 밟았다.
2타점. 동점 3-3.
불펜에서 일어섰다. 워밍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5이닝 도중부터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차도윤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시작했다.
정민이 나를 봤다.
"아직 교체 지시 안 났는데."
"나올 겁니다."
6이닝이 끝났다. 5번 타자 땅볼. 6번 타자 플라이아웃. 하지만 2실점.
차도윤이 더그아웃 계단을 내려왔다. 고개가 숙여져 있었다. 자기 공이 달라진 걸 아는 사람의 자세.
감독이 코치를 봤다.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의 시선이 불펜 쪽으로 왔다.
"강시우."
"네."
"올라가."
* * *
마운드로 걸어갔다.
차도윤이 내려오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차도윤의 오른손이 보였다. 손가락 끝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마찰의 흔적. 83구를 던진 손가락.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에이스가 마운드를 내줄 때의 감정을 나는 알고 있다. 마운드를 내려오는 발걸음은 무겁다.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자기 자리에 올라가는 걸 보는 건 더 무겁다.
러버에 발을 올렸다. 차도윤이 6이닝 동안 판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왼발 착지 위치에 구멍이 파여 있었다. 발끝으로 흙을 고르고 로진백을 집었다.
그립을 잡았다. 손끝이 솔기에 닿았다.
철수가 마스크를 올리고 마운드로 왔다. 미트를 왼쪽 허벅지에 탁 쳤다.
"바깥 낮은 곳부터?"
"바깥 높은 곳으로."
철수가 2초 멈췄다. 노트에 적었던 분석을 떠올리는 눈이었다. 7번 타자. 좌타. 높은 공에 약하다.
미트 위치를 바꿨다. 바깥 높은 곳.
첫 구. 세트 포지션. 하체 먼저. 릴리스.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갔다. 깨끗한 역회전.
포심. 바깥 높은 곳. 139.
타자가 스윙했다. 배트가 공 아래를 지나갔다. 헛스윙.
미트 소리가 울렸다. 맑은 소리. 공이 미트 정중앙에 꽂힌 소리.
2구째. 같은 코스. 이번에는 2cm 낮게. 파울. 배트 끝에 간신히 닿았다.
3구째. 바깥 낮은 곳. 체인지업. 같은 팔 스피드로 들어가지만 10km 느리고 떨어지는 공. 타자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삼진.
8번 타자. 땅볼. 9번 타자. 플라이아웃.
7이닝 끝. 3명. 10구. 무실점.
* * *
8이닝. 3명. 9구. 무실점.
팀 타선이 7이닝에 1점을 뽑았다. 4-3 리드.
팔. 괜찮다. 누적 19구. 회전효율은 손끝 감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9이닝. 마운드에 올라갔다.
상대 1번 타자부터. 데이터가 있는 타자. 초구 직구를 노리는 패턴. 첫 구를 변화구로 시작했다. 슬라이더. 바깥 낮은 곳. 타자가 봤다. 볼.
2구째. 몸 쪽 높은 직구. 뒤로 물러섰다. 볼.
0-2. 타자 유리.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넣어야 한다. 타자가 그걸 알고 있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도 타자는 안다.
3구째. 바깥 낮은 곳. 포심. 가장 자신 있는 코스. 타자가 스윙했다. 배트 아래에 맞았다. 약한 땅볼. 유격수 이민호 정면. 깨끗한 송구. 아웃.
2번 타자. 번트 시도. 파울. 직구 한 구 더. 스윙. 파울. 2스트라이크. 바깥 낮은 곳 체인지업. 배트가 늦었다. 삼진.
3번 타자. 카운트 1-2. 마지막 공. 체인지업을 던졌다.
파울이었다. 라인 위에 맞았다. 심판이 파울을 선언했다.
살아남았다.
투구수 27구. 여유는 있다. 하지만 이 타자는 적응하고 있었다. 체인지업의 궤적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공을 또 던지면 맞는다.
다시 세트 포지션. 공을 잡았다. 이번에는 포심. 타자가 체인지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같은 궤적에서 4km 빠른 공.
손끝에 힘을 집중했다. 검지 압력을 0.5 올렸다. 릴리스.
포심이 나갔다. 체인지업과 같은 궤적으로 들어가다가, 떨어지지 않았다. 타자가 기다렸다. 체인지업이 떨어질 타이밍에 공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트가 늦었다.
스트라이크. 삼진.
투구수 28구. 3이닝 무실점. 구원승.
경기 종료. 4-3.
* * *
철수가 마운드로 달려왔다. 미트로 내 글러브를 쳤다. 강하게. 가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팀원들이 모여왔다. 등을 치는 손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사이로 더그아웃 쪽을 봤다. 감독이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위아래로. 한 번.
정리 후. 차도윤이 다가왔다. 팀원들이 대부분 나간 뒤였다.
"네 공."
"네."
"80구 넘어서도 변하지 않던데."
80구라는 숫자를 꺼냈다. 자기 한계가 80구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이스가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건 약점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회전효율 관리입니다."
차도윤이 입을 닫았다. 5초. 돌아갔다.
스탠드 오른쪽 끝에서, 점퍼를 입은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메모지를 접었다.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 사람이 먼저 시선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