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데이터 밖의 타석
버스 안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좌석이 낡았다. 창밖으로 올림픽대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노트를 펼쳤다.
28구. 3이닝. 피안타 0. 볼넷 0. 삼진 3. 무실점. 구원승.
숫자는 완벽했다. 하지만 완벽한 숫자 뒤에 불완전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9이닝. 3번 타자. 카운트 1-2에서 체인지업을 던졌다. 타자의 배트가 공에 닿았다. 파울. 아웃이 아니라 파울. 다음 구에 포심으로 삼진을 잡았지만, 그 파울의 감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노트에 적었다. '상대 타자의 실시간 적응. 같은 코스 3회 이상 반복은 위험.'
데이터대로 던졌는데 완벽하게 잡지 못한 순간. 70%의 분석이 100%가 아니라는 증거. 볼펜을 놓고 창밖을 봤다. 한강 위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데이터에 없는 타자. 대타. 핀치히터. 부상 교체. 분석할 수 없는 변수. 전생에서도 이런 상황은 있었다. 그때는 구속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구속이 139~142다.
답은 하나였다. 포수. 데이터에 없는 타자가 나오면, 투수는 탐색구를 던지고, 포수가 반응을 읽고, 다음 공을 결정한다. 결국 철수를 믿어야 한다. 숫자가 아닌 것을 믿어야 한다.
28살의 내가 가장 못하는 것.
* * *
다음 날. 점심시간. 급식실.
이민호와 밥을 먹었다.
"시우야, 어제 경기 진짜 좋았다."
"감사합니다."
"나도 좀 잘했지?"
이민호의 얼굴이 밝았다. 수비에서 좋은 플레이를 한 다음 날의 유격수는 어깨가 펴져 있었다.
"좋았어요. 1번 타자 땅볼, 송구 정확했어요."
"그거 네가 알려준 거잖아. 직구 다음에 땅볼 나올 거 같다고. 진짜 나왔어. 그래서 미리 포지션 잡고 있었거든."
"포지셔닝이 좋았어요. 실행한 건 이민호가 한 거예요."
이민호가 밥을 먹다가 멈췄다.
"근데 나 하나 물어봐도 돼?"
"네."
"너 긴장 안 해?"
숟가락을 멈췄다.
"긴장합니다."
"안 그래 보여서. 어제 마운드에서도 표정이 하나도 안 바뀌더라."
"긴장은 하는데, 다음 공을 뭘 던질지 생각하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긴장하면 손이 떨려. 유격수가 손이 떨리면 끝인데. 글러브 안에서 떨리는 거 관중은 모르거든. 근데 나는 알아. 그게 제일 무서워."
"타구가 오기 전에 3보 안에 포지션을 잡으면 됩니다. 몸이 준비되면 손이 안 떨려요. 떨릴 여유가 없어지거든."
"3보?"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가면 1보. 릴리스에 2보. 타구 직전에 3보. 그 3보가 끝나면 이미 몸이 자세를 잡고 있어요. 반응 시간이 0.3초 늘어나요."
이민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이 커졌다가 돌아왔다.
"넌 진짜 무서운 놈이다."
"..."
"근데 고마워."
무섭다. 근데 고마워. 밀어내지 않고 다가오는 사람. 건우처럼 분노하지 않고, 차도윤처럼 침묵하지 않는다.
"근데 시우야." 이민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건우... 괜찮을까?"
"왜요?"
"어제부터 안 보이더라. 연습에도 안 나오고. 단톡에도 아무 말 없고."
"예비로 빠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알아. 근데 건우 성격에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잖아. 뭔가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이민호의 관찰이 정확했다. 건우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지켜보죠."
* * *
방과 후 훈련.
감독이 불펜 쪽에 왔다. 어제 경기 결과 이후 처음 나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강시우."
"네."
"어제 투구수 몇 구였어."
"28구입니다."
"28구로 3이닝. 이닝당 9.3구."
감독이 숫자를 계산한 것이었다. 내가 계산하기 전에.
"타자별로 3구 이내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초구에 유리한 코스를 잡으면 볼카운트가 투수 쪽으로 기울어요."
감독이 나를 봤다. 5초.
"계산하고 던지는 거냐."
"계산하지 않으면 팔이 먼저 나갑니다."
감독의 미간이 움직였다. 반박이 올 줄 알았다. 오지 않았다.
"2차전도 불펜이다."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는데 감독이 한 마디를 더했다.
"근데 다음에 데이터에 없는 타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멈췄다. 버스에서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상대도 대비합니다. 네가 분석한 타순 그대로 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어."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놔."
감독이 돌아갔다. 답은 이미 찾았다. 포수. 하지만 증명하지 못한 답을 말하면 변명이 된다. 2차전에서 증명한다.
* * *
불펜으로 가는 길. 운동장 구석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이 그물에 꽂히는 소리. 일정하지 않은 간격. 리듬이 없었다.
건우였다. 혼자 불펜에서 던지고 있었다. 포수 없이. 스피드건도 없이.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유니폼이 아니라 트레이닝복.
폼이 흐트러져 있었다. 팔꿈치가 어깨보다 내려가 있었다. 공이 그물에 꽂히는 위치가 매번 달랐다. 이건 훈련이 아니라 배출이었다.
저 폼으로 계속 던지면 인대에 무리가 간다. 다가가려다 멈췄다. 건우의 등에서 말을 거부하는 온도가 느껴졌다. 이민호의 말이 떠올랐다. '건우 성격에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잖아.'
가만히 있지 않고 있었다. 혼자서. 목표 없이. 자기 팔을 태우면서.
돌아섰다. 장비 창고 쪽으로 걸었다.
* * *
장비 창고.
랩소도 앞에 앉아 경기 데이터를 정리하려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아침에 분명 닫고 갔다.
안으로 들어갔다. 랩소도 위치가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삼각대 각도가 2도쯤 틀어져 있었다. 수평계 기포가 중앙에서 벗어나 있었다.
배터리 잔량이 어제보다 줄어 있었다. 98%에서 91%. 랩소도를 켜고 데이터를 확인하는 데 7%가 소모되는 시간은 약 40분.
누군가 밤에 40분 동안 혼자 이 기계를 사용한 것이다.
사용 기록을 확인했다. 마지막 사용 시간: 어젯밤 11시 42분.
그 시간에 학교에 올 수 있는 사람. 기숙사생. 차도윤은 기숙사생이다.
에이스가 밤에 혼자 와서 데이터를 봤다. 6이닝만에 교체당한 날, 자기 공이 달라진 걸 느낀 날. 차도윤이 "80구 넘어서도 변하지 않던데"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 혼자 와서 확인한 것이다.
노트를 서랍에 넣었다. 자물쇠가 없었다. 서랍은 아무나 열 수 있었다.
이 노트에는 차도윤의 한계가 적혀 있다. 80구 이후 회전효율 급락. 릴리스 포인트 0.8cm 하강. 에이스의 약점이 볼펜으로 적혀 있다.
창고 문을 닫고 나왔다. 정문을 나서면서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편의점에 들어갔다. 번호식 자물쇠. 4자리. 2,500원.
번호를 설정했다. 1050. 105구의 0을 하나 더 붙인 것. 이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나뿐이다.
주머니 안에서 자물쇠가 손바닥에 닿았다. 차갑고 작았다.
내일 아침, 서랍에 건다. 그리고 2차전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