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틈
월요일. 경기 다음 날.
교실은 조용했다. 야구부 외에 이마트배 예선 결과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고교 야구 시즌 초반 예선전은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천량고 신입생 28구 무실점'이라는 글이 올라왔지만, 댓글 30개짜리 글을 읽는 사람과 교실에서 수학 시간에 졸고 있는 사람은 겹치지 않았다.
반 친구 하나가 쉬는 시간에 물어봤다.
"야구부 시합 이겼다며?"
"네."
"니가 던졌어?"
"좀요."
"잘했네."
대화 끝. 고교 야구 투수가 교실에서 받는 관심은 이 정도다. 괜찮다. 알아야 할 사람은 스탠드에 있었고, 알아야 할 숫자는 노트에 있었다.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축구부가 연습하고 있었다. 야구장 쪽은 비어 있었다. 오늘은 야구부 휴식일이었다.
팔. 괜찮다. 28구의 흔적은 하루 만에 사라져 있었다.
* * *
점심시간. 급식실.
이민호가 트레이를 들고 옆에 앉았다. 반찬이 편식 없이 골고루 담겨 있었다.
"시우야."
"네."
"나 어제 에러 꿈 안 꿨어."
"그래요?"
"경기 전에 항상 에러 꿈을 꿨거든. 타구가 오는데 글러브가 안 움직이는 꿈. 발이 땅에 붙어 있는 것처럼. 근데 어제는 안 꿨어. 처음이야."
이민호가 밥을 먹으면서 웃었다. 가벼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가에 안도가 들어 있었다.
"좋은 신호예요."
"경기 잘해서 그런 거 같아. 3보 얘기 기억나? 그거 해봤거든. 투수가 와인드업 들어갈 때 1보. 릴리스에 2보. 타구 직전에 3보. 그거 하니까 진짜 손이 안 떨렸어."
"효과가 있었군요."
"야, 근데 진짜 신기하다. 네가 알려준 거 그대로 했더니 되더라. 너 전에 유격수였어?"
"아니요."
투수였다. 12년 동안.
"그냥 야구를 많이 봤어요."
"많이 본 수준이 아닌데..."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의심이 아니라 신기함이었다. 이민호는 의심을 잘 안 하는 타입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시우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네."
이민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웃음이 사라지고, 걱정이 올라왔다.
"건우... 괜찮을까?"
밥을 먹던 손이 멈췄다.
"왜요?"
"어제부터 안 보이더라. 연습에도 안 나오고. 단톡에도 아무 말 없고."
이민호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건우와 같은 반이었다.
"예비로 빠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알아. 근데 건우 성격에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잖아. 뭔가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이민호의 관찰이 정확했다. 건우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분노를 삼키는 타입이 아니라 분노를 행동으로 바꾸는 타입이다.
"지켜보죠."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 *
방과 후. 학교에 남았다. 휴식일이지만 불펜은 열려 있었다.
불펜으로 가려는데 입구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이 그물에 꽂히는 소리. 일정하지 않은 간격. 야구의 소리에는 리듬이 있다. 이 소리에는 리듬이 없었다.
건우였다.
혼자 불펜에서 던지고 있었다. 포수 없이. 그물에 대고. 스피드건도 없었다.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유니폼이 아니라 트레이닝복. 학교에 남아서 혼자 훈련을 한 것이다.
폼이 흐트러져 있었다. 팔꿈치가 어깨보다 내려가 있었다. 릴리스 포인트가 불안정했다. 공이 그물에 꽂히는 위치가 매번 달랐다. 이건 훈련이 아니라 배출이었다.
저 폼으로 계속 던지면 인대에 무리가 간다. 팔꿈치가 어깨 아래로 내려간 상태에서 릴리스하면 UCL에 비정상적인 부하가 걸린다.
다가갔다.
"건우."
건우가 멈추지 않았다. 한 구를 더 던졌다. 그물이 흔들렸다.
"뭐."
"팔꿈치가 내려가 있어. 그 각도로 던지면 인대에 부하가 걸려."
건우가 돌아봤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땀 때문이 아니었다. 잠을 못 잔 사람의 눈이었다.
"꺼져."
"건우, 내가 하려는 말은..."
"난 숫자로 야구 안 해."
공을 하나 더 집었다. 세게 던졌다. 그물이 출렁였다. 공이 정중앙을 벗어나 오른쪽 아래에 꽂혔다.
"넌 불펜이라도 들어갔잖아. 나는 예비야. 예비."
건우의 목소리가 낮았다. 분노보다 무거운 것이 들어 있었다. 억울함. 자기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향한 감정.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 구속? 컨트롤? 그건 다 키울 수 있어. 근데 감독은 숫자만 봐. 너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건우에게 필요한 건 분석이 아니라 자리다. 자기 이름이 화이트보드에 붙는 자리.
건우가 글러브를 벗었다.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손가락 관절도 부어 있었다. 글러브 없이 던진 적도 있는 것 같았다.
"너한테 랩소도 수치 보여달라는 거 아니야. 그냥... 꺼져."
건우가 불펜을 나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등이 작아질 때까지 봤다.
혼자 남았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물에 건우가 던진 공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전체에 퍼져 있었다. 목표 없이 던진 공의 궤적. 바닥에 공 세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구니에 남은 공을 세어봤다. 열두 개. 원래 서른 개. 18구.
18구. 혼자서. 포수 없이. 스피드건 없이.
건우에게 야구는 감정이었다. 나에게 야구는 숫자였다. 같은 공을 던지지만 출발점이 다르다.
건우의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는 원인보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전생의 기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건우에 대해 기억나는 게 세 가지. 집안이 부유했다는 것. 학부모회와 연결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팀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니었다.
* * *
밤. 원룸.
노트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자물쇠를 채웠다. 1050. 번호를 돌리고 잠기는 소리를 확인했다.
서랍 안에는 노트 한 권. 그 안에 용산공고 타자 9명의 약점. 차도윤의 80구 한계. 건우의 폼 문제. 정우진의 스트라이드 비율. 그리고 12년치 전생 지식의 조각들.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봤다.
2차전이 3일 뒤다. 상대는 인천기계공고. 작년 이마트배 4강. 용산공고보다 강한 팀.
데이터가 부족하다. 영상이 하나뿐이다. 분석 정확도는 50%.
50%의 데이터와 100%의 배터리 호흡. 그걸로 충분할까.
감독이 물었다. "데이터에 없는 타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답은 정했다. 철수와 함께 잡는다. 포수의 눈을 믿는다.
숫자가 아닌 것을 믿어야 한다. 28살의 내가 가장 못하는 것.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