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데이터는 배신하지 않는다
미트 소리가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손바닥 감각이 증명한다.
*
야구부 장비 창고는 운동장 뒤편 컨테이너 안에 있었다.
새벽 6시 반. 야구부 아침 훈련 40분 전. 컨테이너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오른쪽 하단 패널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전생에도 이 틈으로 글러브를 빼돌린 후배가 있었다.
패널을 당기고 몸을 밀어 넣었다. 16살의 마른 체형이 처음으로 쓸모가 있었다.
안은 어두웠다. 폴더폰 조명을 켰다.
낡은 공. 글러브. 배팅 티. 스피드건.
그리고 구석에.
있었다.
랩소도.
먼지가 쌓인 받침대 위에 충전기가 꽂혀 있었다. 전원을 넣었다가 뺀 흔적.
2009년이면 초기 모델이 국내에 막 들어온 시점이다. 가격은 천만 원 이상. 문제는 아무도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전원을 넣었다. 영문 인터페이스. 세팅값이 초기 상태 그대로였다. 누군가 한 번 켜봤지만 메뉴를 이해하지 못하고 꺼버린 흔적.
나는 이해한다. 12년 뒤의 나는 이 기계의 모든 메뉴를 외우고 있었다.
Spin Rate. Velocity. Spin Efficiency.
투구의 모든 것이 숫자로 바뀌는 기계. 감독님은 세이버메트릭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영어학원 문의부터 하실 분이니까, 창고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감정이 아니다. 새벽 공기가 찬 것이다.
전원을 끄고 원래 자리에 놓았다. 먼지 위에 난 내 손자국을 소매로 닦았다. 패널을 제자리에 끼우고 밖으로 나왔다.
랩소도는 있다.
다음 문제. 접근 권한.
*
7시 10분. 야구부 아침 훈련이 시작됐다.
나는 울타리 밖에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 하지만 오늘은 관찰이 아니라 분석이었다.
투수 네 명이 불펜에서 투구하고 있었다. 고1 둘, 고2 둘. 전부 오버스트라이드. 전부 팔꿈치에 불필요한 부하.
그리고 그물 뒤편, 2학년 중 한 명이 달랐다.
키가 컸다. 팔이 길었다. 폼이 안정적이었다. 감독이 가르친 메카닉 위에서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는 투구였다. 현재 구속은 모르지만, 저 놈이 지금 팀의 에이스일 것이다.
3년 뒤 결승전에서 나는 저 녀석이 던졌어야 할 자리에서 팔을 태웠다.
입꼬리가 당겨지는 걸 느꼈다. 내리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 섰다.
묵직했다.
나보다 반 뼘 크고 어깨가 넓었다. 야구부 유니폼. 포수 장비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나를 봤다. 말은 하지 않았다. 불펜 쪽을 봤다. 다시 나를 봤다.
"야구부?"
짧았다.
"아직 아닙니다."
"근데 왜 여기 서 있어?"
좋은 질문이었다. 야구부가 아닌 학생이 새벽 7시에 불펜 울타리 앞에 서 있는 건 정상이 아니다.
"투구 보고 있었습니다."
포수였다. 포수는 관찰하는 포지션이다. 이 학생의 눈이 감정 없이, 정보를 수집하듯 나를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저 3번 투수, 스트라이드가 너무 넓어요. 저러면 팔꿈치 잡습니다."
포수가 나를 봤다. 눈이 약간 좁아졌다. 경계가 아니었다. 측정이었다.
"...넌 뭐 하는 앤데?"
"강시우. 1학년 3반. 투수입니다."
아직 야구부가 아닌 학생이 포지션을 말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투수다. 12년 전에도, 12년 뒤에도.
포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김철수. 1학년 5반."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에서 같은 학교였다. 정규 포수로 3년을 함께했다. 졸업 후에는 연락이 끊겼다. 내가 먼저 끊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늘 그랬으니까.
이번에는 끊지 않는다.
*
같은 날 오후. 야구부 입단 테스트.
신입생 지원자가 열두 명이었다. 내야수 다섯, 외야수 셋, 포수 하나, 투수 셋. 나는 투수 셋 중 하나였다. 김철수는 포수 하나. 그 하나.
테스트는 단순했다. 달리기, 캐치볼, 포지션별 기본 동작. 감독은 직접 보지 않고 불펜 쪽에서 2학년을 지도하고 있었다.
달리기에서 나는 중간. 캐치볼에서는 일부러 70%로 던졌다. 데이터가 없는 상태에서 풀파워를 보여줄 이유가 없다.
코치가 나를 봤다.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눈. 괜찮다.
테스트가 끝나고, 감독이 신입생들 앞에 섰다.
강문석. 50대 초반. 이 학교에서 15년째 감독. 3년 뒤에 나에게 150구를 던지게 할 사람.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아직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
그 사실이 불편했다.
"야구는 근성이다."
첫 마디.
"기술이 먼저가 아니야. 체력이 먼저가 아니야. 근성이 먼저다. 내가 이 학교에서 15년 동안 선수를 키운 방식은 하나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한계를 넘는 놈이 살아남는다."
옆에 서 있던 신입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스마 있는 말이었다.
틀린 말이었다.
"투수는 특히 그렇다. 팔이 끊어져도 던지는 게 투수야. 정신력이 팔을 이긴다."
3년 뒤에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고 45구를 더 던졌었다.
이번에는 던지지 않는다.
"입단 결과는 내일 발표한다. 해산."
감독이 돌아섰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1초. 교복을 입은 마른 학생 하나.
하지만 나는 봤다.
감독의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약간 내려가 있었다. 2cm 정도.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미세하게 찡그리는 표정.
오래된 부상의 흔적이었다.
투수 출신이었나.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포기했을까.
그건 전생에서도 몰랐던 정보다.
*
그날 밤. 원룸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쳤다.
12년 치의 데이터를 기억나는 대로 적었다.
이상적 스트라이드 비율: 신장의 77~83%.
UCL 안전 투구 수: 단일 경기 105구.
회전 효율 90% 이상이면 타자가 느끼는 공의 체감 구속이 올라간다.
적으면서 손이 멈추지 않았다. 재활 시절 외운 수치들. 2군에서 읽었던 논문. 방출 직전까지 매달렸던 피치 디자인 이론.
구단 사정상 재계약이 어렵습니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난다. 서류 위 사인. 그때 내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 대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공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데이터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사람만 거짓말을 한다.
노트를 닫았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주면 안 된다. 아직은.
먼저 야구부에 들어간다. 그 다음 랩소도에 접근한다. 데이터를 뽑는다. 데이터로 증명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순서를 틀리면 미친놈이 된다.
폴더폰을 열었다. 시간을 봤다.
23시 47분.
아버지는 아직 택시를 몰고 계실 것이다. 월 100만 원 야구부 회비와 200만 원 레슨비. 전생에서도 아버지는 그 돈을 대기 위해 밤을 새웠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새벽 1시가 넘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냉장고 문 여는 소리. 컵에 물 따르는 소리.
그리고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그 돈이 헛되지 않게 한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랩소도 화면이 떠올랐다. 영문 인터페이스. Spin Rate. Velocity. Spin Efficiency.
숫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입단 결과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