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설계
케이스 손잡이가 차갑다.
컨테이너 문을 밀어 열면 새벽 공기가 쏟아진다. 랩소도 케이스를 양손으로 들었다. 전원 코드는 안쪽 포켓에. 삼각대는 케이스 옆에 묶었다.
무게는 12kg. 전생에서 수백 번 들어본 무게였다. 처음 2군 캠프에서 이 기계가 들어왔을 때, 아무도 세팅을 못 해서 하루 종일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내가 설명서를 읽고 켰다. 첫날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2009년. 내가 먼저다.
내가 훔치는 건 장비가 아니다.
내일의 권력이다.
*
불펜 마운드에서 정확히 12미터 뒤. 삼각대를 폈다. 나사를 손으로 조이고 수평계를 확인했다. 기포가 중앙으로 왔다. 랩소도 본체를 올렸다. 마운드 쪽으로 각도를 잡았다.
전원을 켰다.
영문 인터페이스가 떴다. 부팅 시간 20초. 세팅 메뉴로 들어갔다.
Unit: mph → km/h. Distance: 기본값 유지. Pitch Type: AUTO.
3분이면 충분했다. 옆에서 코치가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팀원들이 들어왔다. 투수 다섯, 포수 하나. 철수가 마지막으로 들어와 포수 장비를 착용했다. 마스크를 내리면서 나를 봤다. 눈이 한 번 움직였다. 확인이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차도윤이 들어왔다.
2학년 에이스. 팔이 길고 키가 크다. 감독이 3년째 키우는 투수. 이 불펜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사람. 랩소도를 보고, 나를 봤다. 그리고 아무 표정 없이 자기 자리로 갔다. 표정이 없다는 것은, 수치를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다. 모르는 사람은 비웃는다.
감독이 불펜 그물 뒤에 섰다.
"신입. 먼저 던져."
*
마운드에 올랐다.
로진백을 집었다. 손바닥에 가루가 묻었다. 공을 잡았다. 포심 그립. 검지·중지 솔기 위. 손가락 사이 간격 2cm. 압력 비율 6:4.
이 그립을 완성하는 데 전생에서 3년이 걸렸다. 지금은 3초.
철수에게 말했다.
"미트 위치 두 곳만. 몸 쪽 낮은 곳, 바깥쪽 낮은 곳. 고정해 주세요."
철수가 2초 동안 나를 봤다. 그리고 몸 쪽 낮은 곳으로 미트를 냈다.
좋다.
첫 공.
세트 포지션. 하체 먼저. 착지할 때 전방 경사각 제어. 팔꿈치가 어깨 높이를 넘지 않게. 릴리스 포인트 일정하게.
공이 나갔다.
미트 소리가 났다.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랩소도 화면이 떴다.
Velocity: 139. Spin Rate: 2,341 rpm. Spin Efficiency: 98%.
코치가 화면을 봤다. 아무 말도 안 했다.
10구를 다 던졌다. 평균 구속 139.4. 평균 Spin Efficiency 97.8%. Spin Efficiency가 높다는 건, 공이 타자 눈에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같은 139라도, 체감은 143에 가깝다.
차도윤이 화면을 오래 봤다. 랩소도 수치를 읽을 줄 아는 눈이었다.
공을 내려놓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
감독이 그물 안으로 들어왔다.
랩소도 화면을 봤다. 3초. 5초. 숫자를 읽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야구에 끼워 맞추는 시간이었다.
"Spin Efficiency가 뭐야."
"공이 얼마나 순수하게 역회전하는지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98%면 실제 투구 기준으로 최상위에 가깝습니다. 체감 구속이 4km 정도 높아집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아닌 확인이었다.
"그럼 내 방식대로 하체를 교정하면 더 나오겠네."
위장이 한 번 조였다. 그 방식을 안다. 스트라이드를 넓힌다. 지면 반발력을 강제로 올린다. 처음에는 구속이 오른다. 2~3km. 하지만 팔꿈치에 하중이 쌓인다. 보이지 않게. 쌓이다가 끊어진다.
12년 전의 내 팔꿈치가 그 결과다. 데이터는 몸이 기억한다.
"감독님."
감독이 나를 봤다.
"98이면 충분합니다. 교정보다 이 구조를 유지하는 쪽이 팔꿈치에 유리합니다."
감독이 1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치가 시선을 내렸다. 투수들이 각자 발끝을 봤다.
"내가 15년 동안 여기서 투수를 키웠다."
"내일부터 하체 세팅 교정 들어간다."
감독이 돌아섰다. 그물 밖으로 나갔다.
불펜이 조용했다.
증명했는데, 싸움이 시작된다. 예상한 수순이었다.
그 착각을 유지시켜 줘야 한다. 당분간은.
*
사흘째 교정 세션.
감독의 지시대로 스트라이드를 넓혔다. 발이 착지하는 위치를 5cm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골반 회전 타이밍을 0.03초 늦췄다. 팔꿈치에 걸리는 하중 구조는 건드리지 않았다.
감독은 "그렇지"라고 했다.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속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141. 어제는 142. 교정 덕분이 아니라 몸이 적응한 덕분이다. 16살 몸이 28살 메카닉에 맞춰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지금이다. 감독 눈에는 교정의 결과로 보인다.
계획대로였다.
*
오전 훈련이 끝나고, 철수를 불렀다.
불펜 바닥의 분필 선을 가리켰다.
"저 선까지는 같아야 해요. 구속도, 회전도, 릴리스 포인트도."
철수가 선을 봤다. 7미터.
"선 너머에서 뭐가 달라져."
"꺾입니다. 아주 조금. 하지만 타자는 이미 배트를 결정한 다음이에요. 초반 궤적이 같으면 예측이 틀린다. 배트가 내려간 방향에 공이 없다."
철수가 몇 초 동안 입을 다물었다. 포수는 생각할 때 눈만 움직인다.
"포심이랑 슬라이더가 같아 보여야 한다는 거야."
"맞아요. 7미터까지는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철수가 마스크를 착용했다.
"해보자."
*
감독이 2학년 타자 이민호를 불렀다. 타격 연습을 하던 선수. 외야 겸 대타. 배팅 폼이 안정적이고 타구 방향이 넓다.
오픈 스탠스. 바깥쪽 반응이 느리다. 초구 스윙 비율이 높다.
슬라이더로 시작한다.
첫 공. 세트 포지션. 포심과 완전히 같은 팔 각도. 같은 릴리스 포인트. 손목을 3도 비틀었다.
민호가 배트를 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공이 7미터 지점을 지나면서 바깥쪽으로 3cm 흘렀다. 배트 궤적이 이미 포심 코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코스에 공이 없었다. 배트가 내려갔다. 헛스윙.
미트 소리가 났다.
불펜이 조용해졌다.
3구째. 다시 슬라이더. 민호의 배트 궤적이 정확히 포심 코스를 향했다. 그 1미터 옆으로 공이 지나갔다.
완전한 헛스윙이었다.
민호가 배트를 내렸다. 타석 밖으로 나와서 자기 손을 봤다.
*
타임이 걸렸다. 철수가 마스크를 들고 나왔다.
낮게 말했다.
"방금… 공이 두 개였어."
"하나입니다."
"근데 두 개처럼 보였다고."
철수가 마스크를 다시 내렸다.
그게 목표였다. 같은 공처럼 출발해서, 다른 공처럼 도착한다.
*
감독이 그물 뒤에서 봤다. 훈련이 끝나고 말했다.
"우연이야."
짧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우연.
랩소도를 켰다. 오늘 슬라이더 수치를 확인했다. 포심과의 초반 8미터 구속 편차: 0.7km. 릴리스 높이 편차: 0.3cm.
우연이 아니다. 설계한 결과다.
차도윤이 랩소도 화면 옆에 섰다. 오래 봤다. 화면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장비 창고로 들어갔다. 이해한 것이다.
*
운동장을 나서는데 입구에 누가 서 있었다.
글러브가 새것이었다. 스파이크도 새것. 유니폼 번호 11번.
박건우.
건우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종류.
"140?"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장난감이지."
설명하면 진다.
먼저 시선을 끊었다. 걸었다.
등 뒤에서 건우의 발소리가 불펜 쪽으로 향했다.
라커룸이 달라진다. 소문이 퍼지고, 편이 나뉘고, 말이 자란다. 알고 있었다. 그것도 계획 안에 있었다.
*
그날 밤, 노트를 폈다.
현관문 비밀번호 소리가 났다. 아버지다. 늦었다.
발소리가 주방 쪽으로 갔다. 냉장고 문 소리. 물 따르는 소리. 그리고 조용해졌다.
아버지가 주방 의자에 앉아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노트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볼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 따르는 소리. 그 소리가 조용해지는 시간.
내일 슬라이더를 한 번 더 다듬는다.
준비는 충분하다.
*
이민호는 배트를 가방에 넣으면서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
헛스윙을 한 손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배트를 냈는데, 공이 거기 없었다.
그 1미터가 어디서 생겼는지 아직도 몰랐다.
누가 옆에 와서 물병을 건넸다. 민호는 받으면서 불펜 쪽을 한 번 봤다.
강시우가 랩소도 케이스를 들고 창고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