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재능과 설계
야구부 장비 창고.
랩소도 앞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내 데이터가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캡처한 영상이 있었다.
해성고 에이스 정우진.
2분 47초짜리 하이라이트. 화질은 폴더폰 수준이었지만, 폼은 읽을 수 있었다. 세 번 반복해서 봤다. 세 번째에는 0.25배속으로.
스트라이드가 넓다. 신장 대비 87%. 이상적 범위 77~83%를 넘어서 있었다. 어깨 회전이 크다. 팔 스윙이 길다. 몸 전체의 운동에너지를 한 점에 모아서 공에 실어 보내는 방식. 전형적인 파워 피처.
구속 148. 고1. 같은 1학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숫자다.
영상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릴리스 순간 팔이 채찍처럼 휘어지고, 타자가 배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트 소리가 난다.
하지만 빠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빠른 공에는 대가가 있다.
노트에 적었다.
정우진. 추정 회전효율: 88%. 추정 VAA: -5.0° 이하. 스트라이드가 넓으니 릴리스 포인트가 앞으로 나와 있고, 그만큼 공의 진입 각도가 가파르다.
내 공과 정반대였다.
나: 139~142km. 회전효율 98%. 공이 덜 떨어진다. 같은 존에 도달하지만, 공이 평평하게 들어간다.
정우진: 148km. 추정 88%. 빠르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진다. 속도로 밀어붙이는 공. 타자가 속도에 눌리면 이기고, 적응하면 맞는다.
같은 스트라이크 존에 도달하는 두 가지 방법. 속도로 밀거나, 효율로 속이거나.
그리고 나만 아는 미래. 정우진은 프로 2년 차에 어깨가 나갔다. 스트라이드 87%의 대가. 투구수 관리 없이 매 경기 120구 이상을 던진 대가.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 관리의 부재 앞에서 무너졌다.
정우진은 아직 모른다. 정우진의 감독도 모른다.
* * *
뒤에서 기척이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발소리가 가볍고, 문을 여는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볼일 있어?"
차도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샤워하고 온 것이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글러브도, 공도. 맨손으로 왔다. 던지러 온 게 아니라 말하러 온 것이었다.
랩소도 화면을 보고, 나를 봤다.
"정우진?"
"본선 대진표에 해성고가 있어서."
"분석하는 거야?"
"다음 상대니까요."
차도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랩소도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정우진의 투구 영상이 정지 상태로 걸려 있었다. 릴리스 직전의 프레임. 팔이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
"148."
"고1 기준으로 비정상적인 수치입니다."
"나도 145 던지는데."
"선배는 회전효율이 다릅니다."
차도윤이 입을 닫았다. 5초. 에이스가 다른 에이스의 영상을 보는 눈이었다. 비교하는 눈. 경쟁하는 눈. 그리고 그 뒤에,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어하는 눈.
"네 데이터."
"네?"
"네 데이터... 나한테도 되는 거야?"
기다리던 말이었다.
12화에서 노트에 적었던 한계. 알려줄 것인가, 쥐고 있을 것인가. 그때 결정을 미뤘었다. 경기가 답을 줄 거라고.
경기가 답을 줬다. 1차전. 차도윤이 6이닝에서 무너지고, 내가 올라가서 3이닝을 막았다. 2차전. 4이닝에서 무너지고, 내가 4이닝을 막았다. 3차전. 감독이 나를 선발로 올렸다.
에이스가 무너지면 팀이 무너진다. 팀이 무너지면 본선이 없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됩니다."
차도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에이스의 눈이 아니었다. 배우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눈.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전생에서 나는 끝까지 혼자 던졌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그래서 150구를 넘겼다.
차도윤은 요청했다.
"80구 이후 회전효율이 떨어지는 원인은 단순한 피로가 아닙니다."
차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릴리스 포인트가 0.8cm 내려갑니다. 내려가면서 손가락 압력 비율이 바뀌어요. 6:4였던 검지·중지 비율이 7:3으로 틀어집니다. 그러면 회전축이 기울어지고 효율이 떨어져요."
"그걸 어떻게 보정해."
"릴리스 때 검지 힘을 빼는 느낌으로 던지면 됩니다. 중지가 자연스럽게 더 눌리게 돼요. 피로 상태에서도 원래 비율에 가까워져요."
"그걸 의식하면서 던질 수 있어?"
"연습하면 됩니다. 10구면 감각이 잡혀요."
차도윤이 5초 침묵했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 멈췄다. 무언가를 삼킨 것이었다.
"...부탁한다."
에이스가 데이터를 요청했다. 단순한 협력이 아니다. 팀의 구조가 바뀌는 시작이다.
"그리고 선배."
"뭐."
"밤에 혼자 랩소도 쓰셨죠."
차도윤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배터리 잔량이 줄어 있었어요. 사용 기록도 남아 있고요."
5초.
"...들켰네."
"경기 때 네 수치를 보고 싶었어. 구속은 느린데 왜 타자가 못 치는지. 화면에 뜬 숫자를 봤는데, 회전효율이라는 항목이 98이었어. 98이 뭔지 몰랐어. 그래서 찾아봤어. 밤새."
98%. 그 숫자를 보려고 밤에 혼자 기계를 켜고 왔다. 자존심보다 호기심이 이긴 것이다. 그리고 호기심이 이해가 됐을 때, 요청이 된 것이다.
"답을 찾았어요?"
"찾았으면 이런 부탁 안 해."
* * *
"랩소도 세팅하겠습니다. 10구만 던져 주세요."
차도윤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장비 창고 안의 실내 불펜. 그물이 3미터 앞에 있었다.
첫 구. 145. Spin Efficiency 91%.
"릴리스 때 검지 힘을 빼는 느낌으로. 중지가 자연스럽게 더 눌리게 해 주세요."
두 번째. 144. Spin Efficiency 93%.
올라갔다. 2% 상승.
"좋습니다. 그 느낌 유지해 주세요."
세 번째. 143. Spin Efficiency 95%.
"구속이 떨어졌는데."
"구속은 떨어졌지만 체감 구속은 올라갔습니다. 95%의 143은 타자한테 147에 가깝습니다."
차도윤이 잠깐 멈췄다. 공을 잡은 채 마운드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147."
"숫자를 믿어 주세요."
10구가 끝났다. Spin Efficiency 평균 93.8%. 원래 평균보다 5.8% 올라갔다. 구속은 평균 1.2km 떨어졌지만, 체감 구속은 오히려 올라갔다.
"이걸 90구까지 유지하면 6이닝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차도윤이 공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새로운 감각을 확인하는 동작. 검지와 중지 사이의 미세한 차이.
"선배."
"뭐."
"본선에서 선배가 선발로 오래 던져야 합니다. 제가 뒤에서 받치는 건 그 다음이에요."
차도윤이 나를 봤다. 3초.
"네가 왜 선배를 도와."
"팀이 이겨야 하니까요."
계산이지만, 계산의 결과가 팀 승리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도윤이 글러브를 벗었다. 돌아서면서 말했다.
"고마워. 라고는 안 할 거야."
"안 해도 됩니다."
"대신 본선에서 증명해 줄게."
문이 닫혔다. 차도윤의 발소리가 기숙사 방향으로 멀어졌다.
* * *
혼자 남았다.
노트를 펼쳤다. 정우진 페이지. 그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본선 16강. 재능 vs 설계. 첫 번째 시험.'
볼펜을 내려놓으려는데, 폴더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02로 시작하는 서울 번호.
받았다.
"강시우 학생이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40대 남자. 차분한 톤. 야구인 특유의 억양. 서두르지 않는 말투.
"누구시죠."
"잠깐 만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
"실례지만 어디서 연락을..."
"이마트배 경기 봤어. 세 경기 다."
세 경기 다. 스탠드에서 메모를 적던 점퍼 차림의 남자. 경기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학교 정문 앞 카페. 내일 저녁 7시. 가능하면 와 줘."
전화가 끊겼다. 통화 시간 27초.
폴더폰을 닫았다.
스카우트인지, 기자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마트배 예선 세 경기를 전부 보고, 고1 투수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사람. 메모지에 'Spin Efficiency'를 적는 사람. 2009년에.
노트를 닫았다. 자물쇠를 채웠다.
랩소도 전원을 껐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창고 문을 닫고 나왔다. 운동장에 가로등 하나가 마운드를 비추고 있었다. 비어 있는 마운드.
내일. 카페. 저녁 7시.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데이터 밖의 만남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