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선발 마운드
목동 야구장. 이마트배 예선 최종전.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선발. 처음으로 첫 이닝부터 시작하는 공식 대회 경기. 불펜에서 올라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불펜은 이미 달아오른 경기에 뛰어드는 것이다. 관중석의 온도가 있고, 더그아웃의 긴장이 있고, 앞서 던진 투수의 흔적이 마운드에 남아 있다.
선발은 다르다.
차가운 마운드에 서서, 첫 공으로 경기의 온도를 정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 그 정적을 깨는 첫 공을 내가 던져야 한다.
러버에 발을 올렸다. 실전 마운드의 러버. 불펜보다 단단했다.
로진백을 집었다. 손바닥에 가루가 묻었다. 털었다. 다시 묻혔다.
철수가 마스크를 내리고 미트를 냈다. 바깥 낮은 곳. 어제 장비 창고에서 정한 전략 그대로. 탐색구.
세트 포지션. 릴리스.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갔다.
미트에 꽂혔다.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스피드건. 141.
경기가 시작됐다.
* * *
1이닝.
첫 타자. 탐색구 두 개를 던졌다. 몸 쪽 높은 곳. 바깥 낮은 곳. 타자의 반응을 읽었다. 몸 쪽에 경계가 강했다. 바깥으로 유도해서 땅볼. 7구.
두 번째 타자. 카운트 0-1에서 직구 바깥 높은 곳. 스트라이크 존 끝. 자신감 있게 던진 공만 스트라이크를 받는다. 삼진. 6구.
세 번째 타자. 직구 두 구. 체인지업 하나. 플라이아웃. 4구.
3자 범퇴. 17구. 예상보다 8구 많았다. 탐색에 투자한 것이다. 하지만 타자 세 명의 반응 데이터가 쌓였다. 이 정보로 다음 만남을 설계한다.
2이닝. 안타 하나 허용. 후속 타자 삼진, 병살. 14구. 누적 31구.
3이닝. 삼진 2개. 11구. 누적 42구.
4이닝. 선두 타자 볼넷. 공이 살짝 높아졌다. 팔이 아닌 집중의 문제였다. 로진백을 다시 집었다. 2번 타자를 인사이드 포심으로 밀어내 병살. 13구. 누적 55구.
5이닝. 12구. 누적 67구.
팀 타선이 3이닝에 2점을 뽑았다. 2-0 리드. 투수에게 리드는 여유다. 밀어내는 투구가 아니라 유도하는 투구가 가능해진다.
6이닝. 안타 하나. 도루 시도. 철수가 2루에 송구. 팝타임 2초 이내. 도루 실패. 포수의 팔이 투수의 등판을 연장한 것이다. 이닝 종료. 10구. 누적 77구.
77구. 6이닝 완료. 2-0 리드. 무실점.
* * *
7이닝.
마운드에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시우."
돌아봤다.
감독이 더그아웃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지 않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자세였다. 양손이 옆에 내려져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멈췄다.
투구수 77구. 105구까지 28구가 남아 있었다. 7이닝부터 9이닝까지 3이닝. 이닝당 9~10구면 가능했다. 충분히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 먼저 내렸다.
"감독님, 아직 28구..."
"시합 이기고 있어. 2-0이야. 정민이가 마무리한다."
감독의 표정에 타협이 없었다. 지시였다.
내가 아니라 감독이 먼저 멈춘 것이다.
전생에서 감독은 150구를 시켰다. 105구에서 불펜 전화를 요청했을 때 고개를 저었다. "계속 가." 그 말이 45구를 더 만들었다. 45구가 팔꿈치를 만들었다.
지금. 같은 감독이 77구에서 멈추라고 했다.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감사합니다."
말이 나왔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감독이 돌아섰다. 코치에게 뭔가를 말했다.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감독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의 각도가 달랐다. 힘이 빠진 어깨. 편안한 어깨.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람이다. 데이터가 아니라.
그 생각이 낯설었다. 28살의 나는 데이터만 믿었다. 사람은 변수였다. 하지만 지금 감독이 77구에서 멈추라고 한 것은 예측할 수 없었던 변수였고, 그 변수가 나를 지켰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철수가 미트를 벗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77구에서 내린다."
"감독님 판단이에요."
"네 팔을 지켜준 거야."
단순히 보호만은 아닐 것이다. 84구에 4이닝 1실점. 77구에 6이닝 무실점. 숫자가 감독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호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벤치에 앉았다. 팔에 피로가 남아 있었다. 77구. 내일이면 회복된다.
* * *
9이닝 하. 정민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상대 8번 타자. 바깥 낮은 곳 직구. 땅볼. 1루 아웃. 9번 타자. 체인지업. 타이밍이 빗나갔다. 플라이아웃. 1번 타자. 카운트 2-2. 마지막 공. 직구가 바깥 코너에 꽂혔다.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
삼진. 경기 종료. 2-0.
이마트배 본선 진출 확정.
경기 후 감독이 전체 소집했다.
"본선은 3주 뒤다. 준비해라."
그게 전부였다.
* * *
정리 후. 운동장을 나서면서 폴더폰을 열었다.
이마트배 본선 대진표가 올라와 있었다. 16강.
천량고의 위치를 찾았다. 대진표 왼쪽 상단. 16강 상대는 아직 미정이었다. 하지만 8강 예상 경로를 따라가면.
반대편.
해성고.
해성고. 전북. 에이스: 정우진. 고1. 구속 148.
3주. 본선까지 3주.
구속을 올릴 수는 없다. 139에서 142 사이가 지금의 범위다. 하지만 전략은 올릴 수 있다. 회전효율은 유지할 수 있다. 피치 터널링은 더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
정우진의 148km와 내 142km. 숫자만 보면 6km 차이. 하지만 회전효율 98%의 142km는 체감 구속 146에 가깝다.
재능 vs 설계. 힘으로 밀거나 효율로 속이거나.
폴더폰을 닫았다.
운동장을 나서면서 스탠드 쪽을 봤다. 오른쪽 끝자리. 비어 있었다. 점퍼를 입은 사람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 사람의 메모에 오늘 뭐가 적혔을까. 77구. 6이닝. 무실점. 선발.
그리고 어쩌면, '본선 주목'이라는 한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