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33구
선발.
코치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감독님이 네 선발을 검토하고 계셔." 불펜이 아니라 마운드. 구원이 아니라 시작. 첫 이닝부터 던지는 것.
전생에서 고1 때 선발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구속으로 밀어붙였다. 감독이 시키는 대로 던졌다. 결과가 좋았다. 그래서 더 던졌다. "계속 가." "아직 괜찮아." "넌 던지기만 하면 돼." 그 말들이 150구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계산하고 던진다.
* * *
다음 날 훈련. 감독이 훈련 전에 나를 불렀다.
코치실. 창고 옆 작은 방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벽에 대회 일정표. 커피 냄새가 났다.
"다음 경기. 너 선발이다."
"알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어."
감독이 나를 봤다. 지시하는 눈이 아니라 확인하는 눈이었다. 이 투수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눈.
"내가 교체를 말하면 내려온다."
"물론입니다."
"네가 먼저 내려오겠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내가 내려오라고 하면 따른다."
"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없는 계약. 전생에서 감독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전생의 감독은 통보만 했다. "선발이다." 그리고 "계속 가." 그 사이에 조건은 없었다. 조건이 없었으니 제한도 없었다.
지금의 감독은 조건을 제시했다. 구조 안에서 던진다. 그게 이번 생의 방식이다.
돌아서려는데 감독이 한 마디 더했다.
"84구 던지고 뻗지 않은 놈은 처음이야."
사실을 말하는 톤이었다. 감독은 보통 지시하거나 평가한다. 사실을 그냥 전달하는 건 드문 일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어. 이기고 있으니까 쓰는 거야."
감독의 눈가에 힘이 빠져 있었다. 수십 년 야구를 하면서 처음 보는 유형의 투수를 마주한 사람의 표정. 책상 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컵에 김이 없었다.
"한 가지 더."
"네."
"네가 시합 중에 랩소도 데이터를 들먹이는 건 당분간 하지 마. 벤치에서 숫자 얘기하면 팀원들이 불편해한다."
"알겠습니다."
"네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공만 던져. 말은 나중에 해."
공만 던져. 그 말이 "계속 가"와는 달랐다. "계속 가"는 투구수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공만 던져"는 역할을 한정하는 말이었다. 한정이지만 인정이 들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코치실을 나왔다.
* * *
훈련 시간. 장비 창고. 철수와 상대팀 분석.
"성남상고는 전력이 약한 편이에요. 작년 16강 1회전 탈락."
"약한 상대면 편하지 않아?"
"약한 상대에게 지면 더 아픕니다. 긴장이 풀리면 폼이 흐트러져요."
철수가 노트를 봤다. 성남상고 타선 분석. 영상이 하나밖에 없어서 정보가 적었다.
"정보가 적은데."
"나머지는 실전에서 채워야 합니다. 첫 이닝에 탐색구를 많이 섞어 주세요."
"탐색구 많이 던지면 투구수 올라가는데."
"첫 이닝에 15구를 쓰더라도, 타자 반응을 읽으면 나머지 이닝이 효율적이 됩니다. 전체 투구수는 오히려 줄어요."
철수가 미트를 두 손으로 잡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계산하는 동작.
"경기 전체를 설계하는 거네."
"선발은 불펜과 다릅니다. 불펜은 경기의 일부에 뛰어드는 거예요. 선발은 첫 구부터 마지막 구까지의 그림이 있어야 해요."
"105구까지의 그림."
"첫 이닝에 탐색구로 타자를 읽고, 2~3이닝에 주도권을 잡고, 4~5이닝에 효율적으로 돌리고, 6이닝 이후는 체력과 투구수에 따라 판단합니다."
철수가 잠깐 생각했다.
"2차전에서 내 사인 거부한 거."
"네."
"그때 네 데이터에는 낮은 곳이었잖아. 근데 타자 눈이 낮은 쪽만 봤어. 데이터가 맞아도 실전에서는 달라질 수 있거든."
"그래서 포수가 필요한 겁니다."
"내가 사인 바꾸면 따라올 거야?"
"2차전에서 따라갔잖아요."
철수가 웃었다. 작은 웃음. 납득의 웃음이었다.
"알았어. 내일 첫 이닝은 내가 코스를 많이 바꿀게. 탐색구 섞어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이기고 나서 해."
철수가 미트를 들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한 마디를 더했다.
"너 선발 처음이지? 대회에서."
"네."
"긴장하되 계산은 멈추지 마."
"그건 제가 제일 잘하는 거예요."
"알아."
문이 닫혔다.
* * *
밤. 원룸.
노트를 정리하고 서랍에 넣었다. 자물쇠를 채웠다.
스트레칭을 했다. 어깨 회전. 팔꿈치 굴신. 손목 돌리기.
눈을 감고, 내일 던질 이닝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첫 타자의 스탠스가 떠올랐다. 탐색구. 몸 쪽 높은 곳. 반응을 보고 2구째를 정한다. 6이닝까지의 윤곽이 그려졌다. 선명하지는 않았다.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하지만 윤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현관문 소리. 시계를 봤다. 새벽 0시 47분.
아버지.
발소리가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 물 따르는 소리. 그리고 조용해졌다.
문을 열지 않았다. 선발 전날에 감정이 올라오면 안 된다. 내일은 차가워야 한다.
5분쯤 지났을 때, 내 방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1초. 2초. 노크는 없었다. 아버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시합 전날이라는 걸.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발소리가 안방 쪽으로 멀어졌다. 문 닫히는 소리.
이번 생에서는 달라질 것이다. 아버지 앞에서 계약금 수표를 들 날이 올 것이다. 아버지의 택시를 세울 수 있는 돈. 아버지의 손을 쉬게 할 수 있는 돈. 하지만 지금은 아직 고1이다. 한 걸음씩. 105구씩.
눈을 감았다.
내일, 선발 마운드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