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네 글자의 무게
열람실. 오전 9시.
서아는 노트북에 도장 사진과 은솔의 분석 결과를 나란히 띄웠다. 明, 洞, 金, 훼손. 세 글자만으로 추적을 시작하기로 했다.
첫 번째 캐비넷 하단에 한성회 역사 자료가 있었다. 분류 탭 '조직 연혁'이라고 적힌 섹션을 꺼냈다. 한성회 내부 편찬 문서였다. 표지에 '내부 배포용. 외부 유출 금지.'라는 붉은색 잉크가 찍혀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 1980년대 명동 사채 시장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도식화된 조직 관계도였다. 한씨 금융, 명동금고, 삼보상호금고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선의 종류가 달랐다. 실선은 협력, 점선은 경쟁, 이중선은 적대였다. 한씨 금융과 명동금고 사이는 이중선이었다.
명동금고 항목을 찾았다. '명동금고(明洞金庫). 1982년 설립. 사채 자금의 은행식 보관·유통 시스템 도입. 명동 지역 사채 시장의 40%를 점유. 1994년 한성회 강남 이전 시 흡수 합병. 현재 상태: 해산(1994).'
해산. 1994년. 서아는 그 연도에 밑줄을 쳤다. 아버지의 장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의 기록이었다. 장부 마지막 장에 명동금고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해산된 조직의 도장이 해산 후 21년 뒤의 장부에 살아 있었다.
수첩에 적었다. '1. 해산되지 않았다. 문서상 해산이지만 실체가 남아 있다. 2. 해산됐지만 누군가 그 이름과 도장을 다시 쓰고 있다.'
은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명동금고. 법인 해산 등기 1994년. 이후 등기나 금융 기록 있는지 확인해줘.'
은솔의 답이 2분 뒤에 왔다. '알겠어. 법인 등기 검색이라 시간 걸려. 이틀 줘.'
'고마워.'
'그 집에서 멀쩡히 나와. 그게 고마운 거야.'
서아는 서류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열람실을 나왔다.
동관 복도를 걷는데 앞에서 느린 발소리가 왔다.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50대 후반이었다. 검은 한복 차림에 양손을 뒤로 모은 자세였다. 복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서 있는 사람이었다.
서아를 위에서 아래로 봤다. 한도윤의 시선과 비슷했지만 온도가 달랐다. 한도윤은 차가웠고, 이 사람은 읽는 시선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는 눈이었다.
"열람실 사용 시간이 길더군."
"윤서아입니다."
서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알고 있다."
남자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돌아섰다. 걸음이 느렸다. 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민재에게 물었다.
"방금 분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마상구 고문이십니다."
"고문님은 동관에 자주 오십니까."
"동관과 본관 모두 고문님의 업무 범위입니다."
답이면서 답이 아닌 문장이었다.
302호로 돌아와서 수첩을 펼쳤다.
'명동금고(明洞金庫). 1994 해산 기록. 아버지 장부(2015~2017)에 도장 존재. 모순. 해산 위장 가능성.'
그 아래.
'마상구 고문. 열람 기록 확인. 서아를 관찰 중.'
두 줄 사이에 연결선을 긋지 않았다. 아직 연결되지 않은 두 개의 사실이었다. 같은 날 같은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 서아는 그 질문을 머릿속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