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닿지 않는 전화
302호. 밤 10시.
서아가 침대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화면에 윤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엄지가 통화 버튼 위에 있었지만 누르지 못했다.
7조. '계약의 존재, 내용, 당사자 간 접촉 사실 일체를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없다.' 전화를 거는 것 자체는 7조 위반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호가 물을 것이었다. 어디 있어. 왜 연락이 없어. 서아가 한마디 대답하면 7조가 무너진다. 계약 전체 무효. 채무 원상복구. 23억이 다시 서아의 어깨 위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서아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졌다. 윤호의 이름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낮에 이선복에게 대저택 규칙을 더 배웠다. 세탁 신청서, 우편물 수령 절차가 있었다.
"우편물은 의전팀이 검수 후 전달합니다. 수령 확인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외부에서 오는 택배도 같은 절차입니까."
"동일합니다. 모든 외부 물품은 검수를 거칩니다."
"면회도 가능합니까."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이선복이 양식을 건넸다. 서아의 손이 '방문자 인적사항' 란 위에서 멈추었다. 아래에 '신원 조회 동의' 체크박스가 있었다. 이름, 주소, 직업, 관계. 면회를 신청하면 방문자의 모든 것이 한성회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간다.
"신원 조회는 얼마나 걸립니까."
"3영업일입니다."
"신원 조회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인적 사항 전반입니다."
윤호를 부르면 윤호의 이름이 이 조직의 공식 기록에 남는다. 한서진은 윤호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공식 파악과 공식 기록은 무게가 달랐다. 기록은 이유가 된다. 접근의 이유, 감시의 이유가 된다.
서아는 면회 신청서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쓰지 않았다.
은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고 받았다.
"도장 분석 결과 나왔어."
"빨랐네. 말해."
"네 글자 중 세 글자 확인됐어. 明, 洞, 金."
"명동금."
"맞아. 네 번째 글자가 인주 번짐으로 훼손돼서 확정이 안 돼. 庫나 融으로 추정하고 있어."
"명동금고 아니면 명동금융이네."
"둘 다 80년대 명동 사채 시절에 나올 수 있는 이름이야. 법인 등록 여부까지 찾아볼게."
"해산 등기도 같이 확인해줘."
"알겠어."
"은솔아."
"응."
"고마워."
"고마우면 살아서 나와. 그게 고마운 거야."
서아는 수첩에 적었다. '明洞金[庫/融]. 3/4 해석. 네 번째 글자 미확정.' 통화를 끊었다.
밤이 깊어졌다. 서아는 불을 끄고 창가에 섰다. 정원 너머 담장이 보였고, 담장 너머 도로에 가로등이 주황색 불빛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저 도로 너머에 윤호의 동네가 있었다. 전화기를 다시 봤다. 윤호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삼성동으로 오기 전날이었다. '멀리 가게 될 것 같아.' 답이 없었다. 윤호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인 사람이었다. 침묵 안에 전부를 넣는 사람이었다.
윤호에게 전화하지 않는 건 보호가 아니었다. 보호라고 불러야 견딜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시계를 봤다. 11시 07분. 커튼을 열고 창밖을 봤다.
실루엣이 하나 서 있었다. 정원 담장 너머 도로의 가로등 아래였다.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투명 비닐우산. 편의점 우산. 골목 집 앞에서 비가 왔던 밤에, 같은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사람이었다.
윤호였다. 대저택 근처까지 온 것이었다. 가로등 빛이 윤호의 어깨에 떨어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비 오는 밤이 아닌데도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우산이 핑계였다. 서 있을 이유가 필요한 사람의 핑계.
서아의 손이 유리에 닿았다. 차가웠다. 정원에 CCTV가 두 대 있었고, 담장 너머까지 찍히는 각도였다. 윤호가 찍혔을 것이다. 오민재의 보고서에 올라갈 것이었다.
서아는 커튼을 쳤다. 보면 내려갈 것이었다. 내려가면 7조가 깨진다. 가로등 빛이 커튼 너머로 얇게 새어 들어왔다. 서아는 그 빛을 등지고 침대에 앉았다.
전화기를 서랍에 넣었다. 면회 신청서 옆에. 쓸 수 없는 것들을 같은 서랍에 넣었다.
불을 끄고 누웠다. 천장이 높았다. 높은 만큼 멀었다. 서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윤호의 실루엣이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새벽 1시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봤다. 담장 너머 도로에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이 꺼져 있었고, 아침 햇빛이 대신 그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