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서랍 속의 날짜
302호. 아침.
서아가 세면대에서 얼굴을 닦고 나왔다. 수건을 걸대에 걸면서 침대 쪽을 봤다. 탁자 위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에는 없었다. 서아는 잠들기 전 탁자를 정리했다. 수첩, 펜, 물컵. 세 개만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네 개였다. 서아의 손이 멈추었다. 수건을 걸대에서 놓지 못하고 2초간 서 있었다.
메모지. 정사각형. 두꺼운 종이에 미세한 엠보싱이 있었다. 서아는 메모지를 집었다. 글씨가 없었다. 숫자만 적혀 있었다.
2016.03.17.
아버지 메모지 뒷면의 날짜였다. KC-0317의 숫자. 서아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이 방에 들어온 누군가도 가지고 있었다.
메모지를 뒤집었다. 빈 면이었다. 다시 앞면을 봤다. 손글씨였다. 만년필 잉크의 광택이 볼펜과 달랐다. 서아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을 이 집에서 한 명 알고 있었다. 메모지의 종이 질감이 집무실 테이블에서 본 것과 같았다. 한서진이 놓고 간 것이었다. 새벽에, 서아가 자는 동안 이 방에 들어왔다.
서아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서아가 이 날짜를 가지고 있다는 걸 한서진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다시 보여준 것이었다.
하루가 지났다. 서아는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저녁. 동관 복도에서 한서진과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서아가 먼저 꺼냈다.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거 당신이 두고 간 거죠."
한서진이 메모지를 봤다. 부정하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났어."
"제가 묻는 겁니다."
서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경어였지만 밀어붙이는 톤이었다.
"따라와."
동관 5층. 서아가 처음 들어가는 방이었다. 책상, 소파, 작은 책장. 서류가 아니라 진짜 책이 꽂혀 있었다. 커피 향과 종이 냄새가 섞인 공기. 한서진의 사적 공간이었다.
한서진이 서랍을 열었다. 검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표지의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이걸 보여줄 때가 올 거야. 지금은 아니야."
"이 날짜가 뭔지 모르면 놓고 가지 않았을 거예요."
"알고 있으니까 놓고 간 거야."
"그러면 말씀하세요. 이 날짜가 뭡니까."
"네가 기억해야 의미가 있어."
"제가 뭘 기억해야 하는데요."
한서진이 수첩 표지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그날 네가 한 말을 기억해?"
서아가 멈추었다. 2016년 3월 17일. 열일곱 살. 병원. 아버지가 처음 쓰러진 해였다. 면회를 갔었다. 복도. 누군가와 스쳤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키가 컸다. 형광등이 깜빡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뒤의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 안 나요."
한서진의 시선이 수첩에서 서아로 올라왔다.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서아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한서진이 수첩을 서랍에 넣고 닫았다.
"돌아가."
서아는 일어섰다.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서랍이 다시 열리는 소리.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302호로 돌아왔다. 한서진이 10년간 기억한 말을, 서아는 잊었다. 그 불균형이 이 관계의 구조였다. 한쪽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한쪽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수첩에 적었다. '2016.03.17. 병원 복도. 첫 접점 확인. 한서진은 기억함. 서아는 기억 못 함. 검은 가죽 수첩 = 기록의 시작.'
메모지를 수첩 사이에 끼웠다. 한서진이 남긴 날짜와 서아가 적은 기록이 같은 수첩 안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