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규칙의 온도
아침 6시 58분. 302호 문을 열자 대리석 복도가 아침 조명 아래 길게 펼쳐졌다.
서아는 운동화 끈을 한 번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동관에서 본관 식당까지의 동선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복도 직진 40미터, 좌회전, 엘리베이터, 지하 통로, 본관 1층 로비, 식당까지 여섯 개의 구간이었다.
어제 이선복이 안내한 경로를 되짚는 동안, 발바닥이 대리석의 차가운 온도를 전해왔다. 운동화 밑창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냉기였다. 이 집의 복도는 사람의 발소리를 삼키는 대신 바닥의 온도를 돌려주는 곳이었다.
복도 끝 모퉁이에 이선복이 서 있었다. 시계를 보고 있지 않았다. 벽 옆에 선 자세가 기다림이 아니라 배치였다. 어떤 방향에서 누가 와도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를 잡고 서아가 오는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은 7시입니다."
서아의 시계는 6시 58분이었다.
"알겠습니다. 2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선복의 시선이 서아의 손목시계에 0.5초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이 집에서는 2분 일찍 오는 것도, 2분 늦는 것도 기록됩니다. 정각에 맞추시는 게 좋습니다."
"기록은 누가 관리합니까."
"비서실입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곳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무 이력이 날짜순으로 적립되듯, 이 집에서는 사람의 움직임이 분 단위로 쌓이고 있었다.
이선복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지하 통로를 지나 본관 1층으로 가는 길이었다. 통로의 LED 바 조명이 에폭시 바닥 위로 균일한 빛을 떨어뜨렸고, 서아의 운동화와 이선복의 구두가 서로 다른 리듬으로 바닥을 찍었다.
"의전팀장님은 매일 이 시간에 이 통로를 걸으시나요."
"매일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경로로요."
"그게 의전입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이 집의 구조가 담겨 있었다. 이선복의 보폭이 정확했다. 어제와 같은 간격이었고 같은 속도였다. 이 사람은 매일 같은 걸음으로 같은 통로를 걸으며,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본관 1층 식당에 도착했다. 직사각형 테이블 하나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지만 실제 세팅은 두 자리뿐이었다. 한쪽 끝에 식기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도 하나. 두 자리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2미터였다. 법무사 사무실 상담 테이블의 폭이 1미터 20이었으니, 이 거리는 상담보다 멀고 무시보다는 가까운 간격이었다.
한서진이 먼저 앉아 있었다.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서아가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12층 사무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와 같은 형태였지만, 그때는 의도적 무시였고 지금은 일상이었다. 이 사람에게 아침은 서류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서아는 맞은편에 앉았다.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이 테이블에서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한서진이라는 것을 서아의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아직 규칙을 정식으로 배우기 전이었지만, 이 남자의 자세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서진이 서류를 접고 수저를 들었다. 서아가 따랐다. 된장찌개, 밥, 반찬 네 가지가 테이블 위에 정돈되어 있었다. 찌개에서 올라오는 김이 테이블 위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고, 된장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골목 집에서 삼각김밥을 뜯던 손이 이 식탁의 수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그 냄새와 함께 선명해졌다. 된장찌개의 온도가 정확했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누군가 계산한 따뜻함이었다.
"이선복이 경로를 안내했나."
한서진이 찌개를 뜨면서 물었다.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예. 어제 안내받았습니다."
"동관에서 본관까지 몇 분이야."
"7분입니다."
"7분이면 6시 53분에 나와야 해. 여유를 두면 50분."
서아는 그 말을 받지 않았다. 조언인지, 지시인지, 관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서진은 서아가 대답하지 않아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침묵이 무례가 아닌 테이블이었다.
식사 중 한서진은 서류를 다시 펼쳤다. 서아는 그 서류의 첫 줄을 읽으려 했지만 2미터의 거리가 글자를 흐리게 만들었다. 상단에 'KC-'로 시작하는 코드만 겨우 보였다. 서아의 눈이 그 코드에 0.3초 머물렀다. 더 기울이지 않았다. 기울이면 들킨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상대방 서류를 읽는 법은 자세가 아니라 시선으로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이선복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동관 2층입니다."
계단으로 한 층 내려갔다. 열람실 문 앞에 오민재가 서 있었다. 카드키를 찍어 문을 열었다.
"열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시간 외 사용도 가능합니까."
"별도 승인이 필요합니다. 비서실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캐비넷 네 개 모두 열람 가능합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유 열람입니다. 세 번째는 사장님 승인, 네 번째는 고문 승인이 필요합니다."
"승인 기준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오민재가 서아를 봤다. 0.2초의 시선이었다. 질문이 예상보다 구체적이라는 반응이었다.
"각 캐비넷의 보안 등급이 다릅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을 봤다. 창이 없었다. 형광등이 자동으로 켜져 있었고, 그 빛 아래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가 서류 캐비넷 네 개를 마주보고 있었다. 방이 좁았다. 골목 집 방보다도 작았지만, 이 방에 들어 있는 정보의 양은 골목 집 전체보다 클 것이었다.
첫 번째 캐비넷을 열었다. 서류가 세로로 꽂혀 있었고, 분류 탭이 붙어 있었다. 연도별, 그 안에서 알파벳순으로 KC코드 기반 정렬이었다. 첫 번째 파일을 꺼냈다. 2014년도 채권 양도 기록이었다. 양도인, 양수인, 금액, 날짜, 코드가 다섯 개의 열로 반복됐다.
두 번째 캐비넷도 같은 구조였다. 2015~2016년. 한 장씩 넘기며 코드를 읽었다. 오른손 검지의 펜 굳은살이 종이 위를 따라갔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수천 장의 서류를 넘기며 만들어진 감각이 이 좁은 방에서 다시 살아났다. 종이의 두께로 연도를 가늠하고, 잉크의 색 바램으로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는 손끝의 기억이었다.
코드의 패턴을 잡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KC 뒤의 숫자 네 자리는 날짜였다. 아버지 메모지의 KC-0317-A가 맞았다. 3월 17일, A등급. 등급은 A, B, C 세 가지였고, A가 가장 많았으며, B는 드물었고, C는 한 건도 없었다. 등급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이 캐비넷의 서류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캐비넷의 손잡이를 잡아봤다. 잠겨 있었다. 라벨에 '승인 대기'라고 인쇄돼 있었다. 네 번째도 잠겨 있었고, 이쪽 라벨은 '접근 제한'이었다. 승인 대기는 누군가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고, 접근 제한은 열어줄 의사 자체가 보류된 것이었다.
오후 5시 47분에 열람실을 나왔다. 8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무릎이 먼저 알려줬다.
복도에서 오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람 기록은 매일 보고됩니다."
"누구에게요."
"비서실과 사장님입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되는 것을 알면서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달랐다.
저녁 식사. 같은 테이블, 같은 거리. 한서진이 서류 없이 앉아 있었다. 아침과 달랐다. 서아를 보고 있었다.
"오늘 열람실에서 뭘 봤어."
"채권 양도 기록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패턴은 잡혔어?"
서아가 0.3초 멈추었다. 패턴이라는 단어를 한서진이 먼저 꺼낸 것이었다.
"코드 체계의 기본 구조는 파악했습니다."
"기본만."
"아직 등급 기준은 모릅니다."
"등급 기준은 그 캐비넷에는 없어."
서아는 그 한마디의 무게를 쟀다.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인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인지.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오민재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서류 봉투를 한서진에게 건넸다. 한서진은 펼치지 않고 서아 쪽으로 밀어놓았다. 봉투 겉면에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승인 완료.'
서아가 요청하지 않은 서류였다. 세 번째 캐비넷의 승인이었다. 서아가 잠긴 손잡이를 잡아본 것을 한서진이 알고 있었고, 서아가 말하기 전에 열어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한서진이 수저를 들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도 수저를 들었다. 감사의 말에 대답이 없다는 것이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베풂이 아니라 배치였다. 서아에게 서류를 준 것이 아니라, 서아가 볼 서류의 범위를 정해준 것이었다.
302호로 돌아왔다. 봉투를 열었다. A4 세 장. 원채권자 목록이었다. 열 개의 채권 조각 중 일곱 개의 원채권자가 동일한 코드로 표기돼 있었다.
KC-ORIGIN-001.
서아는 그 코드를 세 번 읽었다. ORIGIN. 원천이라는 뜻이었다. 열 개의 조각 중 일곱 개가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빚이 열 곳에서 온 게 아니었다. 한 곳에서 나와 열 곳으로 흩어진 것이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채무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구조였다.
수첩을 꺼내 적었다. 'KC-ORIGIN-001. 원채권자 단일. 7/10 동일. 채무 설계 가능성.' 밑줄을 두 번 그었다.
펜을 놓고 창밖을 봤다. 정원의 나무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누군가 아버지의 빚을 만들었다. 쪼갠 것이 아니라 만든 것이다.
수첩을 닫고 불을 껐다. 킹사이즈 침대의 나머지 공간이 어둠 속에서 넓었다. 이 집의 모든 것이 넓었고, 넓은 만큼 비어 있었다. 서아는 비어 있는 쪽을 보지 않고 벽 쪽을 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