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90도의 언어
본관 1층 로비. 서아가 열람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복도 앞에서 검은 양복 직원 세 명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인사가 아니라 반사였다. 훈련된 몸이 만드는 각도로, 세 사람의 허리가 내려가는 속도가 정확히 같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규칙이 세 개의 몸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도 선배가 지나가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건 예의였다. 이건 예의가 아니라 반사였다.
서아는 멈추었다. 자기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왔고, 서아가 돌아보기 전에 향이 먼저 도착했다. 가죽과 무향 비누가 섞인 냄새였다. 병원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향이었다. 한서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의 간격이 일정했고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서두르는 사람의 걸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기다려주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서아는 복도 한쪽으로 비켰다. 벽 쪽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한서진이 지나갔다. 서아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본 뒤에 보지 않은 것이었다. 공적 공간에서의 거리는 1미터 20센티미터였다. 몸 하나가 들어갈 간격이었다. 병원에서는 한서진이 먼저 다가왔고, 12층에서는 두 걸음까지 좁혔다. 이 복도에서는 스치지도 않았다. 장소에 따라 거리가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서아는 그 거리의 문법을 읽고 있었지만 아직 해석은 되지 않았다.
한서진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90도로 인사했던 직원 세 명이 동시에 허리를 폈다. 그 동시성이 거의 안무에 가까웠다.
오전. 이선복이 서아를 의전실로 불렀다. 동관 3층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책상 하나, 캐비넷 하나, 벽에 한성회 조직도가 걸려 있었다. 조직도의 맨 위에 한도윤 회장이 있었고, 그 아래 한서진 사장, 양쪽으로 고문 두 명이 뻗어 있었다. 서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선복이 A4 한 장을 내밀었다.
"생활 안내서입니다.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열네 개 항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서아는 첫 번째 항목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나씩 여쭤봐도 됩니까."
"그러십시오."
"엘리베이터 탑승 순서가 서열 순이면, 상위 서열이 먼저 타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같은 서열이 동시에 도착하면요."
"직급 순입니다."
"제 위치는 기타로 돼 있습니다. 기타에 해당하는 인원이 몇 명입니까."
"현재 한 명입니다."
서아뿐이라는 뜻이었다. 기타가 범주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서아는 그 사실을 소화하는 데 0.5초가 걸렸다.
"식사 시 수저 순서와 물, 음료도 같은 규칙이 적용됩니까."
"동일합니다. 상석이 든 뒤에 나머지가 듭니다."
"복도 양보 규칙은 전 구역입니까."
"동관 포함 전 구역입니다."
"상위 서열이 다가올 때 비키는 거리 기준이 있습니까."
이선복이 서아를 봤다. 질문의 정밀도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통행에 지장이 없을 만큼 비키시면 됩니다."
열네 번째 항목에서 서아의 눈이 멈추었다. '상기 규칙에 대한 문의는 의전팀에 한다. 상위 서열 직접 문의 금지.'
"한서진 사장님께 규칙에 대해 직접 여쭤보는 것도 금지입니까."
"안내서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서아는 안내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규칙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열이 곧 분류 기준이었고 예절이 곧 색인이었다. 등기부등본에서 갑구와 을구를 나누는 기준이 권리의 종류이듯, 이 집의 예절은 사람의 종류를 나누고 있었다. 문서의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듯 이 집의 예절이 사람을 규정했다. 규칙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이 규칙이 사람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점심 식사. 같은 테이블에 한서진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서류가 없었다. 서아가 자리에 앉았다. 수저 옆에 물컵이 놓여 있었다. 서아는 한서진이 수저를 들기를 기다렸다.
한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오민재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낮아서 단어가 잡히지 않았다. 통화가 길어졌다.
서아는 기다렸다.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열람실에서 서류를 봤고, 물을 마시지 않았다. 집중하면 목마름을 잊는 습관이 오늘은 통하지 않았다. 목 안쪽이 건조해서 침을 삼키는 데 걸리는 느낌이었다. 찌개에서 올라오는 김이 코끝을 스쳤는데, 그 따뜻함이 오히려 갈증을 키웠다.
손가락이 물컵 쪽으로 갔다. 컵 표면이 차가웠다. 잡은 것이었다. 마신 게 아니라 잡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규칙을 넘은 것이었다.
시야 끝에서 이선복의 시선이 잡혔다. 테이블 뒤에 서 있었다. 서아의 손에 0.5초 머물렀다. 한서진은 통화 중이었고 오민재는 식당에 없었다. 하지만 이선복이 있었다. 이선복의 눈이 서아의 물컵 위에 올라간 손가락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서아는 컵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안내서에 '물과 음료도 동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읽었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는 물을 마시는 데 순서가 없었다. 채권자보다 먼저 물을 마셔도 아무도 눈을 주지 않았다. 이 집은 달랐다. 물 한 모금에도 서열이 있었다. 컵 표면의 차가운 감각이 손가락에 남아 있었다.
한서진이 통화를 끝내고 수저를 들었다. 서아가 따랐다. 물컵은 한서진이 물을 마신 뒤에야 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물이 시원했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그 시원함보다 길게 느껴졌다.
"국이 식었겠네."
한서진의 말이었다. 서아를 본 것이 아니라 자기 국그릇을 보면서 한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기다리느라 식은 거잖아."
"식어도 맛은 같습니다."
한서진이 서아를 봤다. 0.5초. 시선 안에 뭐가 있었는지 서아는 읽지 못했다. 돌아간 시선이 서류 쪽이 아니라 찌개 쪽을 향했다는 것만 알았다. 한서진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서아 쪽을 두 번 더 봤다. 서아는 세 번 다 알아차렸지만 한 번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시선을 맞추면 의미가 생기고, 의미가 생기면 이 테이블의 규칙이 흔들렸다.
오후. 열람실. 어제 승인된 서류를 폈다. KC-ORIGIN-001 코드가 찍힌 양도 기록을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열 건의 양도서를 날짜순으로 나열하자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 양도일은 2015년 11월 3일이었다. 아버지 장부의 시작은 2015년 3월이었다. 아버지의 추적이 먼저였고, 양도는 8개월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움직였고 채권은 그 뒤에 움직였다. 순서가 중요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아버지가 추적하는 것을 알고 채권을 옮긴 것이거나, 원래 계획대로 옮긴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아버지는 수동적인 방패막이가 아니었다.
수첩에 적었다. 'KC-ORIGIN-001 최초 양도: 2015.11.03. 아버지 장부 시작: 2015.03. 8개월 차이. 아버지가 먼저.'
저녁. 이선복이 302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일정을 전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내일 오전 11시, 본관 18층입니다. 회장님께서 뵙겠다고 합니다."
서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18층이라는 숫자가 복도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한도윤 회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복장 규정이 있습니까."
"별도 규정은 없으나, 단정한 복장을 권합니다."
"소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 들어갔다. 수첩을 펴고 적었다. '18층. 11시. 한도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서진 앞에서는 떨리지 않았던 손이었다. 서아는 그 떨림을 봤다. 멈추지 않았다. 적을 것을 다 적고 나서야 펜을 놓았다. 떨려도 적는다. 적는 것이 서아의 무기였다.
안내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열네 개 항목의 첫 번째. 엘리베이터 서열. 서아의 위치는 '기타'. 가장 아래. 내일 18층에 올라가는 서아는 이 서열의 바닥에서 꼭대기로 가는 것이었다.
운동화를 침대 옆에 놓았다. 내일도 이 신발을 신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