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빈 교실, 형광펜 냄새
4월 7일 화요일, 오후 4시 22분.
방과 후. 2학년 복도가 텅 비어가고 있었다.
야구부 연습하는 소리가 운동장에서 올라왔다. 알루미늄 배트가 공을 치는 소리. 댕, 하는 울림. 복도 바닥에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깔려 있었다. 먼지가 빛줄기 안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3층 끝에서 두 번째 교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형광등 불빛이 교실 문 유리 너머로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안에 누군가 앉아 있는 그림자가 비쳤다.
'쉬는 시간이 짧다.'
윤시하가 교실 문을 열었다.
김하늘이 책상 위에 교과서와 형광펜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분홍색, 노란색, 연두색 형광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뚜껑이 다 열린 채로. 창밖으로 운동장이 비어가고 있었다. 축구 골대 앞에서 누군가 공을 차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왔어?"
"여기서 뭐 해."
"중간고사 같이 준비하자고 했잖아." 김하늘이 교과서를 넘기면서 말했다. "어제 쪽지 봤지?"
봤다. 어제 5교시 끝나고 김하늘이 쪽지를 건넸다. '내일 방과 후 빈 교실에서 수학 같이 하자.' 깔끔한 글씨였다. 글씨가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앉아."
윤시하가 김하늘 옆 책상에 앉았다.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수학. 이차함수 응용. 페이지를 펴면서 형광펜 냄새가 올라왔다.
잉크와 종이가 섞인, 달콤하면서 화학적인 냄새였다. 교실 안이 고요했다. 교실 등이 윙하고 울리는 소리, 창밖에서 공 차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그것뿐이었다.
"여기 보면." 김하늘이 자기 교과서를 윤시하 쪽으로 밀었다. 밑줄이 세 가지 색으로 그어져 있었다. 분홍이 중요, 노란색이 자주 출제, 연두가 헷갈리기 쉬운 것. 시스템이 있었다. "이 부분 꼬이면 뒤에 다 틀려. 공식 자체는 외우면 되는데 대입 순서가 중요해."
"이 공식?"
"응. 여기서 x를 먼저 빼고 y를 넣어야 되는데, 순서 바꾸면 부호가 달라져."
"아, 그래서 자꾸 답이 다르게 나왔구나."
"맞아. 거기서 틀리는 애들이 반은 돼."
"너는 안 틀려?"
"나도 처음엔 틀렸어. 세 번 틀리고 나서 외웠지."
설명하면서 윤시하 교과서에 직접 밑줄을 그었다. 분홍색 형광펜이 종이 위를 지나갔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종이 위에 분홍색 줄이 한 줄씩 늘어갔다. 교과서 여백에 작은 메모도 적었다. '대입 순서 주의'라고. 글씨가 작고 또렷했다.
"이거 많이 연습한 거야?"
"당연하지. 나도 처음부터 잘했던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지 않은데."
"겉에서 보면 다 그래 보이는 거야." 김하늘이 형광펜을 돌리면서 말했다. "안에서 보면 달라."
손끝이 교과서 위에서 움직였다. 거리가 가까웠다. 형광펜을 잡은 손가락과 윤시하의 손가락 사이가 10센티미터쯤. 김하늘 손에서 형광펜 잉크 냄새가 올라왔다.
"여기 동그라미 쳐 둬. 시험에 꼭 나오거든."
"알겠어."
"이건?"
"이건 외워야 돼. 근데 패턴이 있어. 이렇게 묶으면 외우기 쉬워."
"진짜네. 이렇게 보니까 간단하다."
"내가 정리해 둔 거야." 김하늘이 웃으면서 교과서를 가리켰다. "이해돼?"
"응. 여기서 치환하는 거지?"
"맞아."
"그다음에 대입하면?"
"그러면 끝이야. 여기 풀어봐."
윤시하가 연습장에 풀기 시작했다. 김하늘이 옆에서 지켜봤다. 펜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만 교실에 흘렀다. 마지막 줄까지 쓰고 답을 적었다.
"맞아?"
"맞아." 김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네."
"설명을 잘 해줘서."
김하늘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교과서를 보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 누구한테나 이렇게 안 해. 알지?"
교실이 조용해졌다. 형광등 소리만 남았다. 운동장에서 오던 공 차는 소리도 멈춘 것 같았다.
윤시하가 봤다. 김하늘이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옆모습. 속눈썹이 내려앉아 있었다. 입꼬리에 미소가 있었는데, 평소의 연습된 미소와 달랐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진짜인 쪽. 눈이 웃지 않고 입만 웃는 평소와 반대로, 눈이 먼저 부드러워진 미소였다.
'왜 이러는 걸까.'
"왜 나한테만?"
"뭐가?"
"이렇게 해주는 거."
김하늘이 윤시하를 봤다. 2초. 교실 등 불빛이 눈동자에 반사됐다. 대답하려다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형광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돌아가는 소리가 미세하게 났다.
"너한테는 이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괜찮다는 게 뭔데."
"보여줘도 괜찮다는 거." 김하늘이 다시 교과서를 봤다. "다른 애들한테는 보여주면 안 되거든. 완벽하지 않은 걸."
"완벽하지 않은 게 뭔데."
"모든 거. 공부도, 친구 관계도, 웃는 것도."
"공부 잘하는 김하늘이 세 번 틀리고 외웠다는 거. 그런 거."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최민재였다.
안경을 쓰고 교복을 칼같이 입은 남자애. 반장 배지가 교복 가슴에 달려 있었다. 교실 안을 보면서 표정이 딱딱해졌다. 문에 기대서면서 팔짱을 꼈다.
"방과 후 빈 교실 사용은 교무실 허가 사항이야."
김하늘이 돌아봤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부드럽던 미소가 정돈된 미소로 교체됐다. 1초도 안 걸렸다.
"몰랐어. 미안."
"규칙이니까. 다음부터는 교무실에 먼저 말하고."
"알겠어."
"오늘은 정리하고 나가줘."
최민재가 교실을 한 번 더 둘러봤다. 윤시하를 봤다. 김하늘을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봤다. 시선이 교과서 위 형광펜 줄에 잠깐 머물렀다가 돌아섰다.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분위기가 한 번에 끊겼다.
김하늘이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분홍, 노랑, 연두. 하나씩 차례로 닫았다. 딸깍. 딸깍. 딸깍. 교과서를 닫으면서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응."
"미안해. 장소를 잘못 잡은 것 같아."
"괜찮아. 공부는 도움 됐어. 진짜로."
"진짜?"
"응. 부호 바뀌는 거 혼자 했으면 몰랐어."
"그럼 됐다." 김하늘이 잠깐 웃었다. 아까의 작은 미소가 아니라 평소의 밝은 미소로 돌아가 있었다.
가방을 챙기면서 일어섰다. 교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돌아봤다.
"다음엔 카페에서 하자."
잠깐 멈춤이 있었다. 교실 형광등이 윙 하고 울렸다.
"규칙 없는 데서."
그리고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빈 교실에 윤시하만 남았다. 복도 등이 윙하고 울렸다. 책상 위에 형광펜 냄새가 남아 있었다. 분홍색 밑줄이 교과서 위에 그어져 있었다. 김하늘 손에서 나온 줄.
'다음엔 카페에서 하자. 규칙 없는 데서.'
규칙 없는 데. 그 말의 의미가 두 개로 읽혔다. 최민재 같은 사람이 문을 열지 않는 곳에서 공부하자는 뜻. 아니면, 학교라는 규칙 밖에서 둘만 있고 싶다는 뜻.
어느 쪽이든 김하늘이 의도한 것 같았다. 김하늘은 말에 의도를 넣는 사람이었다.
교과서를 가방에 넣으면서 교실을 나왔다. 복도가 비어 있었다. 형광등이 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창밖을 봤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운동장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형광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왜 이러는 걸까.'
규칙 없는 데서.
그 말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