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말이 먼저 나온 날
4월 3일 금요일, 저녁 7시 08분.
달빛 편의점 안이 조용했다.
냉장고가 윙윙거렸다. 천장 조명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다가 다시 안정됐다. 카운터 뒤 선반에 껌이랑 캔디 봉지들이 줄 맞춰 있었다.
저녁 7시를 넘기면서 학원 마친 학생들은 이미 지나갔고, 퇴근 인파는 아직 내려오기 전이었다. 편의점이 조용해지는 그 사이의 시간이었다.
'여기가 편하다.'
강수현이 계산대 뒤에 있었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로 영수증 롤을 교체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보던 것과 같은 사람인데 어깨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아주 조금.
학교에서는 항상 팔짱을 끼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수증 롤을 끼우는 손가락이 의외로 섬세했다. 롤을 돌려서 끝을 맞추는 동작이 익숙했다.
편의점 문이 열렸다. 강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은.'
윤시하였다. 학교 가방 없이, 손에 핸드폰만 들고 왔다.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후드티에 청바지.
"오늘도 왔네."
"라면 먹으러."
"아까도 라면이었잖아."
"아까는 학교 앞에서. 이건 다른 라면이야."
"라면이 다 같지 뭐가 달라."
"여기 라면은 분위기가 다르잖아."
강수현이 피식 했다. 입꼬리 한쪽만 올라간, 웃음인지 콧방귀인지 구분이 안 되는 표정. "컵라면 저기."
윤시하가 컵라면 코너에서 신라면을 집었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냈다. 계산대 앞에 섰다. 강수현이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보리차 자주 마시네."
"콜라보다 낫잖아."
"그건 인정."
"사장님은 뭐 마셔?"
"나? 물."
"물만?"
"편의점에서 일하면 음료가 별로 안 당겨. 매일 보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온수기에서 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이 컵라면 안으로 들어가면서 면과 스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뚜껑을 닫고 창가 자리로 갔다. 강수현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편의점이 다시 조용해졌다. 컵라면 익어가는 냄새가 올라왔다. 라면 국물 특유의 매콤한 향이 냉장고의 찬 공기와 섞였다. 창밖으로 언덕에 사람이 없었다.
저녁이 내려오면서 학원가 쪽 불빛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편의점 유리창에 간판 글자가 반사됐다. 달빛 편의점. 거꾸로 보였다.
3분이 지났다.
'저 사람은.'
윤시하가 뚜껑을 열었다. 김이 올라왔다.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뜨거운 김이 얼굴에 닿았다. 한 입 넣으면서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매콤하고 짭짤했다. 편의점 라면의 맛이었다.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서 영수증 통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돌아가는 걸 보다가 멈추는 걸 봤다. 다시 돌렸다. 뭔가 말하려는 사람의 손이었다. 입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야."
윤시하가 봤다.
강수현이 영수증 통을 보면서 말했다. 윤시하 쪽을 보지 않은 채로.
"내일 뭐 해?"
말이 나오고 나서 1초가 흘렀다.
강수현의 손가락이 영수증 통 위에서 멈췄다. 통이 돌아가다가 딸깍 하고 멈추는 소리가 편의점 안에 울렸다. 냉장고 윙윙거리는 소리 사이로 그 딸깍이 유난히 선명했다.
"아니. 됐어."
거둬들였다. 윤시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려는 참이었다. 대답할 틈이 없었다. 말이 나왔다가 돌아간 것. 던지고 줍는 것이 1초 안에 끝났다.
강수현은 영수증 롤을 다시 확인하는 척하면서 카운터 아래를 봤다. 정리할 게 없는 곳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손이 빨라졌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바쁜 척하는 손이었다.
창고 문이 열렸다.
정태식이 박스를 들고 나왔다. 음료 보충 박스였다. 두 사람을 한 번 봤다. 잠깐 보다가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저 사람은.'
음료를 꽂으면서 캔이 선반에 놓이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한 캔, 두 캔. 라벨을 앞으로 돌려서 맞추면서 중얼거렸다.
"가끔은 말을 안 거둬도 돼."
강수현이 정태식 쪽을 째려봤다. 째려보는데 귀가 붉었다. 편의점 조명 탓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데 보였다. 귀 끝이 빨갛고, 목까지 살짝 올라온 붉은 기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언제." 정태식이 캔을 돌려서 라벨이 앞을 보게 맞추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지금요."
"아, 그래." 정태식이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등을 돌린 채로 캔을 정리하는 모습이 느긋했다.
윤시하는 라면을 먹었다. 국물이 뜨거웠다. 짭짤하고 매콤한 편의점 라면의 맛이었다. 면을 후루룩 넘기면서 강수현 쪽을 봤다. 강수현은 이미 카운터 앞을 닦고 있었다.
행주가 카운터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행주 잡은 손에 힘이 좀 많이 들어가 있었다. 같은 자리를 세 번째 닦고 있었다.
라면을 다 먹었다. 국물까지 마시지는 않았다. 보리차로 입을 헹구면서 창밖을 봤다. 언덕 위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한 줄 내려오다가 사라졌다. 배달 오토바이였다. 엔진 소리가 언덕을 타고 내려갔다.
편의점 문을 나서기 전에 계산대 앞에 섰다.
'저 사람은.'
"수고해."
강수현이 봤다. 무표정이었다. 걸레를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손에서 행주 냄새가 났다. 세제와 섬유가 섞인 냄새.
"응."
"내일."
강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썹이 살짝 모이는, 경계도 호기심도 아닌 어딘가의 표정.
"내일 나 별일 없어."
거둬들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중에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닫힌 문을 열고 대답을 밀어넣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건 그 말이었다.
강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주를 잡았다가 내려놓았다. 카운터 위를 봤다. 뭔가를 소화하는 중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입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윤시하가 문을 밀고 나왔다.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4월 초 저녁이었다. 3월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내려왔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등 뒤에 있었다.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늘어졌다.
'저 사람은.'
언덕을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내일 뭐 해?'
그 뒤에 뭐가 올 예정이었을까. '같이 뭐 하자'였을까. '편의점 쉬는 날이야'였을까. 그냥 물어보고 나서 왜 물어봤는지 자기도 몰라서 거둬들인 걸까.
예상이 안 됐다. 예상이 안 되는 사람인 건 여전했다. 그런데 그 종류가 달라졌다. 예전엔 읽히지 않아서 모르겠었다. 지금은 읽히는 것 같은데 확신이 안 서서 모르겠다.
학원가 골목 입구에서 치즈 냄새가 올라왔다. 분식집 간판이 켜지면서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에 반사됐다. 4월의 연서동 저녁은 3월보다 불빛이 한 개 더 많았다.
집 골목에 들어서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박지훈한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여기가 편하다.'
"오늘 편의점 갔어?"
"응."
"수현이 뭐라 했어?"
"말이 먼저 나온 날이었어."
"???"
"설명하면 이상해져."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 뭐 해?' 라고 물었다가 바로 '됐어' 하고 거둬들였어."
"그게 다야?"
"텍스트로 쓰면 그게 다야. 근데 현장에선 달랐어."
"뭐가 달랐는데."
"영수증 통이 멈추는 소리. 귀가 빨개진 것. 수건에 들어간 힘. 정태식 아저씨가 한마디 한 것. 그런 것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메시지에 답장을 치지 않았다.
내일 뭐 해. 뒤에 뭐가 붙으려고 했을까.
그게 오늘 남은 마지막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