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4월 9일 목요일, 점심시간 직전.
교실 뒤 게시판에 축제 소조 배정 공지가 붙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 3분. 아이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자기 이름을 찾았다. 웅성거림이 교실을 채웠다. 누가 몇 조인지, 누구랑 같은 조인지. 축제까지 한 달 반 남았다.
소조별로 부스를 맡게 되어 있었다. 종이가 커서 멀리서도 글씨가 보였다. 검은 볼펜으로 깔끔하게 쓴 명단이었다. 명단 옆에 각 조의 담당 교사 이름도 적혀 있었다. 5조는 미술 담당 이민호 선생님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야, 너 몇 조야?"
"5조. 너는?"
"나 3조인데, 이수빈이랑 같은 조야."
"좋겠다."
"뭐가 좋아, 이수빈이 일을 시킬 텐데."
"그래도 이수빈이 하면 결과가 좋잖아."
"그건 인정."
윤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게시판을 봤다. 5조에 이름이 있었다. 박지훈이 같은 조였다. 강수현은 7조. 김하늘은 1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4교시 직전, 선생님이 조별로 모여 앉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 끄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5조 자리로 가는데, 옮기던 의자가 하나 멈췄다.
남자애 하나가 윤시하 옆에 앉으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의자를 끌다가 손이 멈춘 것. 0.5초. 그리고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갔다. 작은 일이었다. 한 달 전에는 없던 멈칫이었다. 소문이 만든 반경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윤시하가 그 자리를 봤다. 비어 있었다. 옆에 박지훈이 앉으면서 봤다.
"봤어."
"응."
윤시하는 빈 의자를 잡아당겼다. 반대쪽에서 서 있는 남자애를 봤다. 직접 불렀다.
"여기 앉아. 같은 조잖아."
남자애가 윤시하를 봤다. 잠깐 당황한 표정이 들어왔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걸어왔다. 의자를 끌고 앉았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교실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름이 뭐야?"
"정현우."
"나는 윤시하. 같은 조니까 잘 부탁해."
"어, 응. 잘 부탁해."
"그림 그리는 거 잘해?"
"뭐?"
"명단에 미술 특기자라고 써 있었어. 나도 미술 쪽 관심 있거든."
"아, 그거. 좀 하긴 해."
정현우의 어깨가 조금 내려왔다. 긴장이 풀린 거였다.
소조 모임이 시작됐다. 축제 부스 주제를 정하는 시간이었다. 5조에는 박지훈, 윤시하, 정현우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여자애는 이름이 서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민수라는 남자애.
"주제 뭐가 좋을까?" 박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먹거리 부스가 편하지 않아?"
"2조가 먹거리 한다고 했어." 정현우가 말했다.
"그럼 체험 부스? 사진관 같은 거." 윤시하가 말했다.
"사진관 좋다. 배경만 깔면 되니까." 서윤이가 끄덕였다.
"배경 뭐로 해? 연예인?"
"초상권 문제 있지 않아?"
"직접 그리면 되지."
"누가?"
"나 그림 좀 그려." 정현우가 손을 들었다.
"오, 진짜?" 박지훈이 눈이 커졌다. "어떤 스타일?"
"배경 일러스트 위주로. 수채화풍."
"그러면 꽃밭이나 하늘 배경 그려서 포토존으로 만드는 거 어때?" 윤시하가 말했다.
"그거 좋다. 폼보드에 그리면 크기도 맞출 수 있고." 정현우가 끄덕이면서 연습장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손이 빨라졌다. 원과 직선이 종이 위에서 형태를 잡아갔다.
"그럼 사진은 누가 찍어?"
"폴라로이드 빌리면 되지 않아?" 민수가 말했다.
"비용이."
"학교에서 지원금 나오잖아."
"그래? 얼마나?"
"조당 5만 원이래."
"5만 원으로 폴라로이드 필름 사면 될 것 같은데."
대화가 오가면서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처음에 멈칫했던 정현우도 회의가 끝날 때쯤에는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스케치 종이를 가운데 놓고 다섯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냈다. 잠깐이지만 소문도, 라인도, 비켜나는 걸음도 없는 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정현우가 스케치를 보여줬다. 벚꽃이 흩날리는 배경 앞에 사람이 설 수 있는 구도였다. 폼보드에 그리면 2미터 높이가 됐다.
"이거 진짜 잘 그리네." 서윤이가 스케치를 봤다.
"아직 대충인데."
"대충이 이 정도야? 완성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박지훈이 감탄했다.
"색칠하면 더 나아. 수채화풍으로 할 거니까."
"우리 조 대박 아니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정현우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아까 멈칫하며 의자를 돌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데 얼굴이 달랐다.
윤시하가 그 변화를 봤다. 한 번 불러 앉힌 것이 만든 차이였다.
점심시간이 됐다. 급식실로 내려가는 길에 박지훈이 말했다.
"아까 불러 앉힌 거. 중요해."
"뭐가."
"안 했으면 그 자리 계속 비었을 거야."
"같은 조니까 당연한 거야."
급식을 받으면서 줄에 섰다.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고추장 냄새가 올라왔다. 쟁반 위에 밥과 국과 반찬이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밥을 먹었다. 제육볶음이 매웠다. 고추장 양념이 진했다. 밥 위에 제육을 올리고 한 숟가락 크게 떴다.
쉬는 시간이었다. 복도 자판기 앞.
박지훈이 음료를 뽑고 있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캔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탕.
'맛은 보통이다.'
강수현이 복도를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박지훈 옆을 지나가면서 한마디만 했다.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잘했어."
박지훈이 멈칫했다. 캔을 잡은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강수현은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깨가 좁은 복도 끝에서 작아졌다.
박지훈이 윤시하한테 왔다. 눈이 둥글었다.
"야, 방금 강수현이 나한테."
"들었어."
"'잘했어'라고 했어. 나한테. 강수현이."
"그랬어."
"소조에서 내가 분위기 메꾼 거 봤나 봐."
"아니면 정현우 불러 앉힌 거 봤을 수도."
"그걸 강수현이 왜 신경 써?"
"모르지. 근데 봤으니까 한 말 아니야?"
박지훈이 캔을 따면서 음료를 마셨다. 탄산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서운 건 맞는데. 저렇게 하면 좀."
"좀?"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이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윤시하가 생각했다. 오늘 있었던 일. 소조 배정에서 멈칫한 아이를 불러 앉힌 것. 강수현이 복도에서 박지훈에게 한 한마디. 소조 회의에서 자연스럽게 풀린 분위기.
강수현이 신경 쓰이는 것. 김하늘이 신경 쓰이는 것. 그건 소문이 만든 게 아니었다.
소문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라, 사실인데 정리가 안 되는 게 불편했다.
'쉬는 시간이 짧다.'
언덕 아래 학원가에서 떡볶이 냄새가 올라왔다. 분식집 아줌마가 포장마차 천막을 내리고 있었다. 붉은 조명이 골목에 깔렸다. 떡볶이 국물이 끓는 소리가 거리까지 들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지훈이었다.
"강수현이 나한테 잘했다고 한 거 아직도 좀 신기하다."
"왜 신기해."
"강수현이야. 강수현. 3월 내내 누구한테도 말 안 하던 강수현이. 그 강수현이 나한테 '잘했어'라고 했어."
"칭찬이라기보단 인정이지."
"그만 신기해해."
"야 이거 큰 사건이거든?"
"큰 사건 아니거든."
"인정이지. 칭찬이라기보단."
"인정이면 더 무서운 거 아니야?"
윤시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웃는 건 오랜만이었다.
연서동 저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