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습관
연기에도 근육 기억이 있다. 문제는 진심에도 있다는 것이다.
블랙박스 SD카드는 서재 서랍에 넣었다. 열쇠를 잠갔다. 그리고 ─ 위장 연애는 계속되어야 했다.
위장 연애 2주차. 화요일. 오전 11시. 청담동 카페.
이준이 먼저 도착했다. 10분 일찍. 카페는 2층이었고, 창가 자리를 골랐다.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자리. 파파라치 카메라가 1층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각도. 위장 연애의 목적이 노출이니까. 테이블 위에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손잡이가 닳아 있었다. 오래된 카페. 서은아가 고른 곳이다. 이준이었으면 호텔 라운지를 골랐을 것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두 잔. 하나는 블랙. 하나는 아이스, 얼음 많이. 서은아의 것.
이유를 생각했다. 데이터다.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은 비즈니스의 기본이다. 광고주의 취향도, 감독의 취향도 전부 기억한다. 같은 맥락이다. 같은 맥락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번 더 말했다. 두 번 말해야 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은아가 들어왔다. 검은 코트에 흰 스니커즈. 화장이 연했다. 카페 문이 열릴 때 바깥 공기가 함께 들어왔다. 1월의 찬 공기와 서은아의 샴푸 냄새가 섞였다. 이준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고,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필요했다.
테이블에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봤다.
"...벌써 시켜놨어요?"
"데이터입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많이."
서은아가 이준을 봤다. 2초. 2초는 감사를 표현하기에 충분하고, 의미를 읽기에 부족한 시간이다.
"고마워요. 기억해줘서."
'기억해줘서.' 데이터라고 했는데 고맙다고 한다. 데이터를 기억이라고 번역하는 사람.
잔 위의 얼음이 녹으면서 소리가 났다. 카페 스피커에서 재즈 피아노가 흘렀다. 창 밖으로 청담동 거리가 보였다. 화요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했고, 그 한산함 안에서 두 사람의 자리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30분을 앉아 있었다. 대화는 계약서 밖으로 나갔다. 계약서에는 '일주 2회 공개 데이트, 1회당 최소 30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30분은 채웠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서은아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야기에 목적이 없었다. 전략도 없었다. 그냥 말하고, 그냥 듣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하은이가 요즘 잠을 못 자요. 새벽에 라면 끓이는 소리가 들려요."
"라면을 끓이면 잠이 오나요."
"아뇨. 불안하면 끓여요. 끓이는 게 목적이에요. 먹는 건 그 다음."
"...독특하네요."
"언니도 그랬어요."
이준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멈췄다.
"소희 언니요. 연습생 때 숙소에서 소희 언니가 밤마다 라면을 끓였어요. 하은이가 그걸 본 거예요."
소희. 어제 블랙박스에서 본 이름이 서은아의 입에서 나왔다. 이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블랙박스의 존재를 서은아는 모른다. 적외선에 잡힌 턱선의 윤곽이 떠올랐다. 지금 앞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과 연결된 이름.
서은아가 빨대에서 입을 뗀 뒤 창밖을 한 번 보고 말했다.
"거기서 소희 언니랑 자주 앉았었어요. 잠원 한강공원. 연습생 때 연습 끝나면 가서 한강 봤어요. 언니가 데뷔조에서 빠졌을 때, 둘이 앉아서 울었어요."
"..."
"언니가 그랬어요. '은아야, 무대는 네가 지켜.' 그래서 센터에 섰어요."
이준은 듣고 있었다. 서은아의 목소리가 고요했다. '무대는 네가 지켜'를 옮길 때 눈이 0.5초 달라졌다. 3화에서 '루나틱'을 말할 때와 같은 변화. 홍채가 미세하게 확장되는 것. 기억이 감정보다 먼저 도착하는 순간의 반응이다. 이준은 그 0.5초를 놓치지 않았고,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섰다. 11시 34분. 34분. 30분 의무를 4분 초과했다. 이준은 그 4분의 의미를 계산하려다 그만두었다. 계산을 그만둔 것도 처음이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서은아가 발을 헛디뎠다. 이준의 손이 팔꿈치를 잡았다. 0.3초. 놓았다. 반사였다. 계산이 아니라 반사. 반사는 의지보다 빠르다.
이준이 먼저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청담동의 1월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건조하고 차가웠다. 3걸음.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내밀었다.
서은아가 먼저 잡았다. 이준이 내밀기 전에 서은아의 손이 먼저 와 있었다.
이준의 몸이 0.5초 경직됐다. 손이 따뜻했다. 커피잔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이유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이준의 손 안에서 서은아의 손이 작았다. 그 크기의 차이가 비즈니스 데이터에 없는 종류의 정보였다.
100미터를 걸었다. 서은아의 손이 이준의 손 안에서 한 번 움직였다.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이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깍지. 위장 연애의 매뉴얼에는 없는 동작이다. 넘었다. 110미터. 120미터. 손을 놓지 않았다. 이준의 보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평소 보폭 78센티미터. 지금 60센티미터. 차이를 인지했지만 보폭을 되돌리지 않았다. 청담동의 가로수가 겨울에 잎을 다 떨군 채로 서 있었고, 그 앙상한 가지 사이로 하늘이 맑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도블록 위에서 겹쳐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차가 보였다. 도윤이 문을 열고 있었다.
손이 떨어졌다. 동시에. 손바닥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 빈 공간의 온도.
차에 탔다. 서은아가 먼저. 이준이 뒤에. 차 안에 서은아의 샴푸 냄새가 다시 들어왔다. 카페에서 맡은 것과 같았다. 1월의 공기 없이, 순수하게.
도윤이 룸미러로 이준을 봤다. 이준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형, 오늘 손... 오래 잡고 있었네요."
"동선이 길었어."
"아뇨, 차까지 100미터인데 120미터 넘게 걸었어요."
"...몰랐어."
거짓말이다. 알고 있었다. 놓아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을 알면서 놓지 않았다. 보폭이 줄어드는 것을 알면서 되돌리지 않았다. 이유는 ─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서재. 밤. 불을 켜지 않았다. 창 밖의 가로등 빛만 서재 바닥에 들어왔다.
계약서를 꺼냈다. 6페이지. '감정적 교류에 의한 계약 변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밑줄 친 문장.
펜을 들었다. 동그라미를 쳤다. 밑줄 위에 동그라미. 경고 위에 경고. 펜촉이 종이 위에서 긁히는 소리가 서재의 정적 속에서 또렷했다.
경고가 필요한 사람은 이미 위험에 발을 들인 사람이다. 안전한 사람은 경고가 필요 없다. 동그라미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만지면 번질 것이다. 만지지 않았다. 번지면 경고가 흐려지니까.
손을 봤다. 왼손. 서은아의 손이 잡혀 있던 손. 쥐었다 폈다. 온기는 없다. 8시간이 지났으니까.
쥐었다 폈다는 것 자체가 ─ 확인하려 한 것이다. 온기를 찾으려 한 것이다.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