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블랙박스
기억은 선택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선택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서재.
어젯밤 엎어놓은 태블릿이 그대로였다. 서은아의 문자가 아직 화면 안에 있을 것이다.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커튼 틈으로 아침 해가 비스듬히 들어왔다. 서재 바닥에 빛의 직사각형이 생겼다. 먼지가 빛 속에서 떠다녔다. 어제의 위기와 상관없이 아침은 정확하게 도착했다.
도윤이 전화했다.
"형, 블랙박스 찾았어요. 12월 31일 기록 남아 있어요."
"어디에."
"제 차 글로브박스요. SD카드 따로 빼놓은 게 있었어요."
"가져와."
30분 후. 서재. 도윤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7년째 같은 번호다.
도윤이 SD카드를 건넸다. 손톱 절반 크기의 검은 칩. 무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안에 12월 31일 밤이 들어 있다. 이준이 태블릿에 연결했다. 접속 아이콘이 돌아갔고, 파일 목록이 떴다. 12월 31일. 시간순 정렬. 파일 26개. 용량 합계 4.2GB. 카메라는 이준이 잠든 사이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22:15 파일을 찾았다. 손가락이 재생 버튼 위에서 0.5초 멈췄다. 재생.
청담 펄리스 지하 주차장. 어두운 화면. 블랙박스 특유의 광각 왜곡이 주차장 기둥을 휘게 만들었다. 도윤의 뒤통수가 보였다. 뒷좌석에 이준. 눈을 감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의 형광등이 차 안으로 들어와 이준의 얼굴 위에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촬영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블랙박스의 잔인함이다.
"그날 샴페인 두 잔 마셨잖아요. 평소에 안 마시시니까 피곤해 보여서... 한강변으로 돌아갔어요."
도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면 속의 도윤이 아니라 지금 옆에 서 있는 도윤이 말하고 있었다. 7년 전의 일을 고백하는 사람의 톤이었다.
22:31. 차가 멈췄다. 잠원지구 주차장.
영상 속의 차 창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겨울 밤의 강이 검었다. 가로등 불빛이 수면 위에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빛의 줄기가 흔들렸다. 12월 31일 밤 11시의 한강은 새해를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도윤이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 문 소리. 발소리가 멀어졌다. 10초. 블랙박스 마이크가 바깥 소리를 잡았다. 바람.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 한강대교 위의 차 소리는 낮은 주파수로 울렸다. 그리고 발소리가 돌아왔다. 하나가 아니라 둘. 도윤의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나머지 발소리는 불규칙했다. 망설이는 사람의 걸음.
조수석 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이 마이크의 잡음으로 잡혔다. 누군가 탔다. 후드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턱선만 보였다. 가느다란 턱선. 블랙박스의 적외선 모드가 턱선의 윤곽을 붉은 선으로 잡아냈다. 좌석에 앉는 소리. 안전벨트를 매는 소리. 작은 손이 벨트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그리고 ─ 콧노래가 시작됐다.
낮은 멜로디. 허밍에 가까운 목소리. 차 안의 공기를 채우는 데 그 작은 목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7화에서 이준이 느꼈던 기억의 잔상이 이것이었다. 상상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잠들어 있던 이준의 무의식이 이 멜로디를 저장하고 있었고, 7화에서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준은 영상을 멈췄다. 재생 바를 3초 뒤로 돌렸다. 콧노래 부분. 다시 재생. 멜로디를 들었다. 멈췄다. 다시 3초 뒤로. 같은 구간을 네 번 반복했다. 서재에 그 허밍이 네 번 울렸다. 네 번째에서 멜로디의 패턴을 완전히 기억했다. 블랙박스의 스피커로 듣는 콧노래는 깨끗하지 않았다. 엔진 잡음과 바람 소리 사이에 끼어 있는 멜로디. 하지만 음정은 확실했다.
"도윤아."
"네."
"이 사람 누구야."
도윤이 화면을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이준은 그 간격을 봤다. 열고 닫고 다시 여는 데 4초. 답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라 답을 꺼내는 시간이다.
"형, 그날 밤... 박 대표님이 전화하셨어요. 한 명 태워다 달라고. 잠원에서 강남역까지."
"나한테 말 안 하고?"
"대표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신경 쓸 일 아니다'라고."
"7년 동안 나한테 숨긴 거야?"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입술이 얇아졌다.
"숨긴 게 아니에요. 대표님 지시를 따른 거예요. 항상 그래왔잖아요."
맞았다. 도윤은 구조 안에서 역할을 한 것뿐이다. 갑의 지시. 구조적 상위. 이준은 도윤을 비난할 수 없다.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무거웠다. 도윤은 충성했고, 충성의 방향이 이준이 아니라 박대건을 향했을 뿐이다.
"얼굴은 봤어?"
"어두웠어요. 후드 쓰고 있었고요. 여자. 젊은 여자. 내릴 때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어요."
"떨렸다고?"
"추운 날이었어요. 근데 추워서 떠는 거랑... 달랐어요.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요."
이준은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콧노래. 반복할수록 멜로디의 음정이 정확해졌다. 처음에는 허밍이었는데, 반복될수록 노래의 형태를 갖추었다. 무서워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 노래가 공포를 누르고 있었다. 연습생 시절에 몸에 밴 습관처럼.
도윤이 말했다.
"형, 이거 루나틱 노래인데."
"뭐?"
"'별의 궤도'요. 루나틱 2집 타이틀곡. 차트는 안 좋았는데 팬들 사이에서 명곡이라고..."
이준은 영상을 멈췄다. 루나틱의 노래를 부르는 여자. 잠원에서 탄 여자. 박대건이 태우라고 지시한 여자. 세 개의 단서가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했다. 소희. 루나틱 전 멤버.
서재가 조용해졌다. 블랙박스 영상이 정지된 화면에서 조수석의 턱선만 남아 있었다. 적외선의 붉은 윤곽. 이준은 그 정지된 화면을 15초간 봤다. 이 여자가 소희라면, 12월 31일 밤의 사진은 서은아가 아니라 소희다. 서은아의 결백이 이 SD카드 안에 있다.
"형, 이 영상 어떻게 할 거예요?"
"보관해."
"박 대표님한테 보여줄 거예요?"
이준은 도윤을 봤다.
"아니."
"그러면...?"
"무기는 쓸 때까지 숨기는 거야."
도윤이 SD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위를 한 번 눌렀다. 확인하는 손. 서재를 나가려다 돌아봤다.
"형, 소희가 왜 형 차에 타고 있었을까요."
"박대건이 시켰으니까."
"그건 아는데... 왜요? 뭣 때문에?"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이준도 답을 모른다. 12월 31일 밤, 박대건이 소희를 이준의 차에 태웠다. 이준은 잠들어 있었고, 소희는 콧노래를 불렀다. 박대건은 그 장면을 설계했다. 누군가 사진을 찍을 것을 알았거나, 찍히기를 원했거나. 설계의 목적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도윤이 나간 뒤 서재에 혼자 남았다. 태블릿을 뒤집었다. 서은아의 문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14자. 어젯밤의 14자 위로 오늘의 블랙박스 영상이 겹쳐졌다.
창밖을 봤다. 한남동의 아침. 맑은 날.
경고가 없는 날이 가장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