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대역
과거는 묻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삽이 아무리 깊어도, 흙 아래에서 숨을 쉰다.
새벽 2시. 이준의 서재. 한남동의 밤은 조용했다. 간헐적으로 차 소리가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14화의 카페에서 돌아온 뒤, 계약서에 동그라미를 친 뒤, 왼손을 쥐었다 펴본 뒤. 그 이후로 4시간. 서재의 조명은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나머지는 어둠이 채우고 있었다.
태블릿을 켰다.
'박소희'를 검색했다. 26세. 루나틱 결성 멤버. 데뷔 2년 만에 탈퇴. 이유: '개인 사정'. 탈퇴 후 행적 없음. SNS 비공개. 기사 없음. 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람.
검색 결과가 이례적으로 깨끗했다. 포털 뉴스 탭에 기사 0건. 이미지 탭에 연습생 시절 단체 사진 2장. 인물 정보 없음. 나무위키 문서 삭제됨. 이 업계에서 누군가의 검색 결과가 이토록 비어 있으려면, 적극적으로 지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기사 삭제 요청. 검색어 관리. 이미지 정리. 전부 돈이 드는 작업이다.
사라지는 것은 이 업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지워줘야 사라진다.
도윤에게 전화했다. 새벽 2시에 전화하는 것은 7년 동안 네 번째다. 도윤은 세 번 만에 받았다.
"형, 무슨 일이에요."
"소희 검색 결과 봤어?"
"...지금요? 새벽인데."
"깨끗해. 너무 깨끗해. 누가 관리하고 있어."
도윤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 불을 켜는 소리.
"형, 검색어 관리면... 블랙홀이겠죠. 다른 소속사가 할 이유가 없으니까."
"블랙홀이 왜 탈퇴한 멤버의 검색어를 관리해."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 그래서 찾는 거야."
검색 방향을 바꿨다. '소희'가 아니라 '3년 전 영화 현장'.
'폭풍전야' ─ 이준의 3년 전 영화. 검색창에 제목을 쳤다. 제작사 홈페이지. 비하인드 갤러리. 촬영 현장 전경 사진이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스태프들이 오가는 사이로 ─ 한 소녀가 보였다.
대역. 이준의 뒷모습 대역. 좁은 어깨에 이준의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코트가 너무 컸다. 어깨에서 흘러내릴 듯한 크기. 얼굴이 카메라를 향하지 않았다. '대역 소녀'라는 자막만 붙어 있었다.
이준은 사진을 확대했다. 대역의 뒷모습. 이준의 코트를 입고 이준의 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어깨 각도가 이준과 비슷했다.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3밀리미터 높은 것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이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습관이다. 누군가 이준을 오랜 시간 관찰하지 않으면 이 정도의 유사도는 나오지 않는다.
스태프 명단을 검색했다. 제작사 홈페이지. 크레딧 목록. 스크롤을 내렸다. '기타 스태프'.
'대역: 서은(본명)'
손이 멈췄다. 서재의 공기가 달라졌다. 서은. 서은아에서 '아'가 빠진 이름. 본명이라는 괄호. 예명이 아니라 본명. 데뷔 전의, 무대에 서기 전의, 아무도 모르던 시절의 이름.
같은 명단에 다른 이름이 있었다. '보조출연: 박소희'. 세 줄 차이. 같은 페이지. 같은 영화. 같은 시간.
서은아와 소희가 3년 전 같은 영화 현장에 있었다. 이준의 영화에.
"도윤아."
"네."
"'폭풍전야' 스태프 명단에 '서은'이라는 이름이 있어. 대역."
"...서은이요?"
"서은아에서 '아'를 뺀 이름이야."
전화 너머로 도윤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형, 서은아 씨가 3년 전에 형 대역을..."
"아직 확정은 아니야. 정황이지 증거가 아니다."
"근데 같은 명단에 소희도 있어요?"
"보조출연. 세 줄 차이."
도윤이 침묵했다. 5초. 이준은 그 5초를 기다렸다.
"형, 이거... 우연이에요?"
"이 업계에서 우연은 비용이야. 누군가 지불한 우연이거나,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진짜 우연이거나."
"어느 쪽이에요?"
"모르겠어. 아직."
전화를 끊었다. 서재가 다시 조용해졌다. 스탠드 불빛 아래 태블릿 화면만 빛나고 있었다.
☆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지훈.
〔강이준 씨, 3년 전 영화 현장 스태프 명단 확인해보셨어요?〕
최지훈도 같은 것을 찾았다. 기자의 속도. 이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명단을 봤다.
서은아가 대역이라면 ─ 이준의 뒷모습을 대신한 사람이다. 이준의 코트를 입고 이준처럼 걸었다. 따라 하려면 봐야 한다. 오래 봐야 한다. 걸음의 폭, 어깨의 각도, 고개를 돌리는 속도. 전부 관찰해야 한다.
서은아는 3년 전에 이준을 봤다. 매일. 현장에서. 이준의 걸음을 따라 걸으면서. 이준은 서은아를 보지 못했다. 대역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뒷모습만 촬영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은 카메라 뒤의 사람을 보지 않는다. 그것이 이 업계의 구조이고, 이준이 15년간 살아온 세계의 논리다.
비대칭. 시작부터 비대칭이다. 서은아는 이준의 걸음을 알고, 이준의 어깨를 알고, 이준의 코트가 자신에게 크다는 것을 안다. 이준은 서은아의 이름조차 몰랐다.
3화에서 서은아가 '강이준입니다'에 눈이 커지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이미 3년 전에 봤으니까.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이준만 놀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은 서은아도 놀라지 않은 것이다. 이유가 달랐을 뿐. 서은아는 3년을 기다린 사람이었고, 이준은 3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준은 아직 '서은 = 서은아'를 확정하지 못했다. 정황이지 증거가 아니다. 확인이 필요하다.
서은아에게 직접 물으면 된다. '3년 전에 내 대역을 한 적이 있습니까.' 간단한 질문이다. 휴대폰을 들었다. 서은아의 번호를 눌렀다. 발신 버튼 위에 엄지가 올라갔다.
누르지 못했다. 3초. 5초. 엄지가 화면 위에서 떠 있었다. 화면의 백라이트가 엄지손톱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누르면 신호음이 울린다. 신호음이 끝나면 서은아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 목소리에 질문을 던지면 답이 온다. 그 답이 두렵다.
확인하면 이 관계가 '계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년 전으로. 이준이 모르는 3년. 서은아만 아는 3년. 그 3년 동안 서은아는 이준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준은 서은아의 존재조차 몰랐다. 14화에서 손을 잡았을 때 서은아의 손이 먼저 와 있던 것이, 3년 전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다. 그 3년이 지금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더하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 두렵다.
15년 동안 '두렵다'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오늘 처음 쓴다. 마음속에서만. 소리 내면 실체가 된다. 11화에서 소희의 이름을 소리 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발신 기록에 서은아의 번호가 남지 않았다. 누르지 않았으니까.
태블릿을 엎었다. 천장을 봤다. 스탠드의 빛이 천장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원 안에 답은 없었다. 서재의 시계가 새벽 3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시간 47분 동안 검색하고, 통화하고, 발견하고, 묻지 못했다.
답은 없다.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