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거리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우면 벽을 세운다. 문제는 투명한 벽이다. 상대가 벽을 본다.
서재에서 밤을 보냈다. 서은아의 노래가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소리가 선명해진다. 연습실에서 새어나온 목소리. 브릿지에서 갈라지던 음정. 채워지지 않던 하모니. 그것들이 서재의 어둠 속에서 반복됐다. 서재 창 밖으로 한남동의 가로등이 보였다. 불빛이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눈을 떴다. 이건 안 된다. 연습실 복도에서 돌아선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을 들은 것이 문제이고, 들은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서재 시계. 새벽 4시 23분. 잠을 포기했다. 샤워를 했다. 찬물. 목덜미에 물이 닿았다. 머리를 감으면서 멜로디가 흐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샤워기 소리 사이로. 꺼지지 않는 노래.
☆
다음 날. 커플 화보 촬영.
화장품 브랜드 '루미에르'. 이준과 서은아. 커플 앰버서더. 계약 범위 안의 일정이다. 계약에 따라 웃고, 계약에 따라 가까이 선다. 그것이 오늘의 업무다. 업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스튜디오에 먼저 도착했다. 하얀 배경. 의자 두 개. 천장이 높았다. 5미터는 될 것이다. 벽의 질감이 거칠었다. 콘크리트 위에 흰 페인트를 올린 벽. 어딘가 익숙한데 떠오르지 않았다. 조명이 천장에서 내려와 바닥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조명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고, 리플렉터가 빛을 벽으로 튕기고 있었다.
서은아가 들어왔다. 메이크업이 완료된 얼굴. 눈매가 선명해져 있었다. 무대 위의 서은아. 카메라 앞의 서은아. 어젯밤 연습실에서 혼자 노래하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프로의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서은아가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0.5초 멈칫했다. 바닥을 봤다. 천장을 봤다. 벽을 봤다. 콘크리트 벽의 질감을 확인하는 눈동자. 그리고 다시 걸었다. 프로의 걸음으로.
"안녕하세요."
"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거리를 유지했다. 의식적으로. 어젯밤 복도에서 들은 노래가 아직 남아 있었고, 그 노래를 들은 사실을 서은아에게 들킬 수 없었다. 서은아가 혼자 부른 노래는 서은아만의 것이다. 그것을 허락 없이 들은 것은 이준의 침범이었다. 들키면 벽이 무너진다. 벽이 무너지면 서은아가 아파할 수 있다.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셔터 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첫 번째 세트. 나란히 앉은 컷. 의자 사이 간격 30센티미터. 광고 기획안에 적힌 거리. 서은아의 향수가 30센티미터를 넘어왔다. 카페에서 맡았던 샴푸와 다른 향. 오늘은 촬영용 향수. 화이트 머스크. 이준은 그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는데 구분하고 있었다. 스태프 세 명. 촬영감독. 조명감독. 메이크업 아티스트. 6명의 시선이 이준과 서은아를 향하고 있었다.
"이준 씨, 은아 씨 쪽을 한 번 봐주세요."
촬영감독의 지시. 업무 지시다. 이준이 서은아를 봤다. 서은아도 이준을 봤다.
서은아가 웃었다. 연습하지 않은 웃음.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좁아지는. 12화에서 하은이 말한 '코트를 걸쳐주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카메라를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셔터가 끊겼다. 그 순간 이준의 얼굴에서 3초간 통제가 풀렸다. 눈이 웃었다. 15년 동안 눈이 웃지 않는 것이 이준의 상표였는데. 입은 웃어도 눈은 웃지 않는 것이 강이준의 미소였는데. 눈이 먼저 웃었다. 입보다 빨리.
3초. 돌아왔다. 통제가 복원됐다. 눈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정확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접혀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3초를 놓치지 않았다. 셔터는 1초에 열두 번 끊긴다. 3초면 36컷. 36장의 증거가 메모리 카드에 저장됐다.
촬영이 끝났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명이 하나씩 꺼졌고, 스튜디오가 어두워졌다. 하얀 배경지만 남아 있었다. 서은아가 다가왔다.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이준의 벽을 감지한 것이다. 이 사람은 벽을 본다. 투명한 벽을.
"오늘 촬영 어땠어요?"
"프로답게 잘하셨습니다."
차가운 벽. 투명한 벽. 서은아가 0.5초 멈칫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돌아섰다. 서은아의 발소리가 스튜디오 바닥에서 멀어졌다. 이준은 그 발소리를 세지 않았다. 세면 12화의 하이힐이 된다. 세면 안 된다.
촬영감독이 태블릿을 들고 왔다.
"이준 씨, 이 컷 쓸까요? 표정이 진짜 좋은데."
모니터를 봤다. 서은아를 보며 웃고 있는 자신. 눈이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 만든 적 없는 표정. 15년간 수천 장의 화보를 찍었고, 그 모든 사진에서 눈은 웃지 않았다. 웃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진짜 웃은 적은 없었다. 이 사진은 기술이 아니었다. 만들어지지 않고 나온 표정.
"...쓰세요."
'빼주세요'라고 해야 했다. 통제되지 않은 표정이 광고에 나가면 증거가 된다. 진심의 증거. 위장 연애에서 진심이 증거로 남으면 위장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쓰세요'라고 했다. 입이 계산보다 빨랐다.
스튜디오를 나서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준은 돌아서면 보지 않는 사람이다. 12화에서 차서린의 하이힐을 보지 않은 것처럼. 보면 잡게 되고, 잡으면 계산이 무너진다.
하지만 한 가지를 알아챘다. 서은아가 들어올 때 0.5초 멈칫한 것을. 바닥을 보고, 천장을 보고, 벽을 본 것을. 이 스튜디오가 서은아에게 의미 있는 곳이라는 것을. 콘크리트 벽. 높은 천장. 3년 전 '폭풍전야' 촬영 현장의 스튜디오와 같은 구조다. 서은아가 대역으로 서 있던 곳과 비슷한 곳이다.
아직 확정은 아니다. 정황이다. 15화의 스태프 명단. 오늘의 0.5초 멈칫. 3화에서 놀라지 않던 눈. 정황이 쌓이고 있었다. 직접 물으면 1초 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이준은 정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묻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윤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 촬영 어땠어요?"
"잘 끝났어."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다. 의도적으로.
"표정이 좀 다른데요."
"뭐가."
"보통 촬영 끝나면 바로 다음 스케줄 물어보시잖아요. 오늘은 안 물어보시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이 맞다. 다음 스케줄을 물어봐야 하는데 서은아의 웃음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연습하지 않은 웃음. 눈이 좁아지던 0.5초. 그것이 모니터 속 이준의 표정을 만든 원인이다. 원인을 아는데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변수는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변수는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스케줄 뭐야."
"이제 물어보시네."
"...닥쳐." 창밖을 봤다. 서은아의 웃음이 아직 머릿속에 있었다. 모니터 속 자신의 표정도.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겹쳐지면 안 되는 것들이.
도윤이 웃었다. 7년 동안 이준에게 '닥쳐'를 들은 적은 세 번. 전부 이준이 당황했을 때. 네 번째가 추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