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선
선을 넘는 것은 한 걸음이다. 선을 긋는 데는 15년이 걸렸다.
새벽 4시. 잠이 오지 않았다. 서재의 어둠이 무겁지 않았다. 결심이 어둠보다 무거웠다.
서재 서랍을 열었다. SD카드. orbit_star 캡처. 스태프 명단. 그리고 계약서. 네 개의 물건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세 개는 증거이고 하나는 족쇄다.
계약서를 꺼냈다. 6페이지. 동그라미 친 문장. '감정적 교류에 의한 계약 변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14화에서 친 동그라미. 잉크가 마른 자국 위로 종이의 질감이 달라져 있었다. 경고 위의 경고.
경고가 필요한 사람은 이미 위험에 발을 들인 사람이다.
18화에서 뻗었다 멈춘 손이 떠올랐다. 전화 너머로 닿지 않는 손. 그 손이 이준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닿으려는 것과 닿지 않으려는 것 사이에 서 있다.
오전 10시. 박대건 문자. 〔본사. 지금.〕
두 단어. 마침표 없음. 박대건의 문자에 마침표가 없을 때는 명령이다. 마침표가 있을 때는 통보다. 오늘은 명령.
코트를 입었다. 서재 서랍을 닫았다. 잠그지 않았다. 돌아왔을 때 서랍을 열 이유가 생길 수 있으니까.
도윤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엔진이 켜져 있었다.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도윤은 이준이 추위를 싫어하는 것을 안다.
"형, 대표님 뭐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도윤의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11화에서 '대표님 말만 듣고 오지 마세요'라고 한 도윤이다.
"가면 알겠지."
차가 한남동을 빠져나갔다. 이준은 창밖을 봤다. 블랙홀 본사까지 23분. 23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준비뿐이다. 박대건이 무슨 카드를 꺼낼지 예측했다. 소희를 잠재우겠다. 서은아를 관리하겠다. 이준에게는 현상 유지를 요구하겠다. 15년간의 패턴이다. 패턴을 아는 것이 이준의 유일한 무기였다. 설계자의 패턴을 읽는 것.
하지만 오늘은 이준에게도 카드가 있다. 아직 꺼내지 않은 카드.
☆
블랙홀 본사. 17층 대표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17층 복도는 조용했다. 비서실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대표실 문이 열려 있었다. 박대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은 '들어와'이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은 '기다려'다.
박대건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식은 커피. 기다린 시간이 길었다는 뜻이다. 커피잔의 물방울이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결로. 커피가 식은 지 최소 30분. 박대건이 30분 전부터 이 자리에서 이준을 기다렸다.
"앉아."
이준은 앉았다. 커피를 거절했다. 거절하는 것도 언어다. 대접을 받지 않겠다는 뜻.
"소희 건은 내가 처리한다. 네가 파고들 필요 없어."
'처리한다.' 11화에서 이준이 예측한 단어는 '관리한다'였다. 오늘은 '처리한다'로 바뀌었다. 관리에서 처리로. 소희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알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 이건 계약이야. 계약에 권리는 갑한테만 있어."
"전 을이지만 15년짜리 을입니다. 질문할 수 있는 을이에요."
박대건이 식은 커피를 마셨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커피가 차가웠을 것이다. 차가운 커피를 표정 없이 마시는 것은 박대건의 전술이다. 상대에게 불편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감정은 비용이야."
"뭔 소리입니까."
"네가 은아한테 감정을 쓰기 시작하면, 그건 내 투자 손실이야."
이준의 손이 무릎 위에서 쥐어졌다. 감정. 이준이 아직 인정하지 않은 것을 박대건이 먼저 읽었다. 15년 동안 이준의 감정을 관리해온 사람이다. 이준보다 먼저 읽는 것이 당연하다. 그 당연함이 분노를 만들었다.
말 속도가 느려졌다. 감정이 올라갈수록 속도가 느려진다. 차서린이 인터뷰에서 쓴 그대로.
"제가... 뭘 느끼든 그건 제 영역입니다."
처음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는 발언이다. '뭘 느끼든'이라는 말은 느끼고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15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문장. 15화에서 '두렵다'를 마음속에서 처음 쓴 이후, 오늘 처음으로 입 밖에 나온 감정의 언어.
박대건이 웃었다. 투자 결정의 웃음. 수익률을 계산하는 얼굴.
"영역? 이준아, 이 판에서 네 영역은 내가 정해줬어. 15년 동안."
이준은 일어섰다. 소파에서 일어서는 데 0.3초. 앉아 있는 것은 을의 자세다. 서는 것은 대등의 자세다. 박대건의 시선이 올라왔다. 15년 동안 이준이 대표실에서 먼저 일어선 적은 없었다.
"소희 건은 제가 찾겠습니다."
"...뭐?"
"들으셨잖아요."
박대건의 표정이 0.5초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다. 계산이다. 이준의 반항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 당하는 것인지. 0.5초 안에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후회한다, 이준아."
"후회는 제가 합니다."
같은 단어를 뒤집었다. 12화에서 차서린이 '변수'를 뒤집은 것처럼. 이준은 단어를 무기로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박대건에게 배운 것이다.
대표실을 나왔다. 문을 닫았다. 문 닫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17층의 형광등이 차갑게 켜져 있었다. 복도 끝에서 도윤이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이 나오는 것을 보고 벽에서 등을 떼었다. 이준의 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빨랐다. 도윤은 그것을 봤다.
"형, 괜찮아요?"
"최지훈에게 연락해. 소희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전부."
도윤의 얼굴이 바뀌었다. 눈이 커졌다.
"형, 박 대표님 뒤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이준이 들어갔다. 도윤이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17층에서 1층까지. 16개 층. 내려가는 데 27초.
"...응."
한 글자. 15년을 바꾸는 한 글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한 글자가 울렸다. 금속 벽에 반사되어 두 번 들렸다.
"형,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왜요?"
이준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내가 서 있는 판이 어떤 판인지 알아야 하니까."
"그게 전부예요?"
"전부야."
거짓말이다. 전부가 아니다. 서은아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연습실에서 혼자 노래하는 뒷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없는 사람이 선택을 만들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18화에서 "소희 언니가 직접 말할 거예요"라고 단단하게 선을 그은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언어가 된다. 언어가 되면 인정이 된다. 인정하면 돌이킬 수 없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설계자의 판에서 내려가겠다. 자기 판을 만들겠다. 1층 로비를 걸었다. 유리문 너머로 서울의 오후가 보였다. 도윤이 뒤따라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울렸다. 17층에서 내려온 발소리. 15년 만에 처음으로 내려온 발소리. 차 문을 열며 도윤이 말했다. "형,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준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맑았다. "모르겠어. 처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