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장이 서는 날
「밖에서 안 팔면, 안에서 팔게 만들면 됩니다.」
아침 회의. 카일과 토마스, 하인 일곱 명이 집무실에 모였다. 에스텔라가 양피지를 펼쳤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어제까지의 어둠이 걷힌 집무실. 먼지가 빛 속에서 떠다녔지만, 오늘은 그 먼지가 덜 우울해 보였다.
「장을 엽니다. 영지 안에.」
토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장이라 하시면……」
「시장입니다. 외부 상인이 안 오면, 내부에서 돌게 만듭니다.」
양피지 위에 목록을 적었다. 방앗간의 밀가루. 삼포제 시범구역의 첫 수확 콩. 영지 내 가죽 세공인이 만든 허리띠와 주머니. 카일의 병사들이 사냥한 토끼 가죽. 약초를 캐는 노인의 말린 허브.
적으면서 깨달았다. 생각보다 팔 것이 있었다. 없는 줄 알았던 것이 있었다.
「물물교환이 아닙니다. 화폐로 거래합니다.」
카일이 물었다.
「영지민에게 동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부역을 화폐로 전환하면서 일당을 지급했으니까요. 그 돈이 아직 쓸 곳이 없어서 쌓여 있을 겁니다.」
에스텔라가 카일을 보았다.
「부역을 화폐로 바꾼 이유가 이겁니다. 동전이 돌아야 장이 섭니다. 이건 처음부터 계획한 겁니다.」
카일의 눈이 달라졌다. 이해의 표정. 하나하나 따로 보였던 결정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이어지는 순간. 부역의 화폐 전환, 방앗간 개혁, 배급 장부. 전부 이 장시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을.
돈이 한 사람의 주머니에 머무르면 죽은 돈이야.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야 살아 있는 돈이 된다.
영지 중앙의 빈터. 빈 분수대 앞. 분수대는 여전히 마른 채였지만, 그 앞의 공간이 변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포대를 날랐고, 카일의 병사들이 울타리를 치고 구역을 나눴다.
오전이 되자 영지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사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니까. 서로를 살피며 서성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사람이 보였다. 동전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쓰고 싶지만 두렵다. 쓰면 없어지니까.
어색한 침묵이 빈터를 채웠다. 에스텔라가 기다렸다.
1분. 5분.
풀뿌리 아이의 엄마가 걸어 나왔다. 빵을 가져왔던 여자. 주머니에서 동전 두 닢을 꺼냈다. 밀가루 앞에 섰다. 동전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밀가루…… 주세요.」
토마스가 밀가루를 떠서 자루에 담았다. 동전이 나무 상자 안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
딸랑.
작은 소리였지만, 빈터 전체에 울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사람이 사자 두 사람이 왔다. 두 사람이 사자 다섯이 왔다. 한 시간 뒤 서른 명. 두 시간 뒤 줄이 생겼다. 줄이 생기면 사람은 안심한다. 앞사람이 샀으니 나도 사도 된다는 심리.
에스텔라는 장터 한쪽에서 기록했다. 거래 건수, 품목별 판매량, 시간대별 유동 인구. 데이터가 쌓이면 패턴이 보인다. 오전에는 밀가루와 콩이 많이 팔렸다. 오후에는 가죽과 약초가 움직였다. 생필품 이후에 부가 품목이 팔리는 순서.
카일이 병사 두 명을 장터 양쪽에 배치했다. 에스텔라가 부탁하기 전에 알아서 배치한 것이다.
노인이 말린 약초를 팔았다. 약초를 산 젊은 여자가 그 돈으로 콩을 샀다. 콩을 판 농부가 토끼 가죽을 사 갔다. 병사가 비번에 잡은 토끼 가죽을 내놓았고, 가죽 세공인이 그걸 사서 허리띠를 만들었다.
동전이 돌았다. 한 사람의 지출이 다른 사람의 수입이 되고, 그 수입이 다시 누군가의 물건값이 되었다.
토마스가 에스텔라 옆으로 다가왔다. 노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구부정한 자세 대신 등이 조금 펴져 있었다.
「아가씨…… 사람들이 웃고 있습니다.」
에스텔라가 장터를 내려다보았다. 빈터가 빈터가 아니었다. 소리가 있었다. 웃음과 흥정과 아이들의 뛰는 발소리. 빈 분수대 위에 아이 하나가 올라가 앉아 있었다. 풀뿌리 아이. 막대기 대신 콩을 들고 있었다.
장부에서 가장 좋은 숫자는 흑자가 아니야. 거래 건수야. 돈이 도는 횟수가 곧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장터가 정리될 무렵, 뒤쪽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평범한 외투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하지만 모자 아래로 금테 안경이 빛나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다가갔다.
「장사꾼은 장터에서 제일 잘 보입니다.」
아드리안이 모자를 벗었다.
「들켰군요.」
「뭘 보러 오셨습니까?」
「보러 온 게 아닙니다. 가져온 겁니다.」
아드리안이 뒤에 세워둔 수레를 가리켰다. 포대 세 개. 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환어음 1건의 첫 이행분입니다. 소금 세 포대.」
에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환어음 계약의 첫 번째 현물이 이 장터에 도착한 것이다. 타이밍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장이 서는 날에 맞춰 소금을 가져온 것.
「타이밍이 좋으시군요.」
「상인은 시장이 열릴 때 옵니다. 닫힐 때 오는 건 바보예요.」
아드리안이 장터를 훑었다. 사람 수를 세고, 거래 물량을 가늠하고, 동선을 분석하는 눈.
「생각보다 빠릅니다. 첫 장에서 한 시간 만에 서른 건을 넘겼다면, 주 2회 운영이 가능합니다.」
콩 자루 앞에서 멈추어 콩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톱으로 껍질을 눌러보았다. 수분 함량을 확인하는 상인의 습관.
「품질도 나쁘지 않습니다. 삼포제가 효과를 보고 있군요.」
장터를 걷던 에스텔라가 멈췄다.
한 상인이 곡물을 사며 은화를 내밀었다. 에스텔라가 받아 들다 손이 멈췄다.
은화의 무게가 달랐다.
같은 크기, 같은 문양. 하지만 손바닥 위에 올렸을 때, 정상 은화보다 가벼웠다. 재무 감각이 차이를 잡아냈다. 손가락 위에서 숫자의 오차를 감지하듯.
「이 은화, 어디서 났습니까?」
상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부에서 거슬러 받은 겁니다.」
에스텔라가 은화를 빛에 비추었다. 테두리가 미세하게 거칠었다. 줄로 갈아낸 흔적.
은을 깎아냈다. 정상 은화에서 은을 깎아내면 가루가 남고, 가루를 모아 녹이면 순은이 된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 깎인 은화가 돌면, 사람들은 정상 은화를 숨기고 깎인 은화만 쓴다. 결국 시장에는 나쁜 돈만 남는다.
에스텔라가 은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토마스. 최근 2주간 들어온 은화를 전부 모아주세요. 무게를 재겠습니다.」
장터는 성공이었다. 동전이 돌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전 중에 깎인 것이 섞여 있었다. 장이 열리면 나쁜 돈도 따라 들어온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아드리안이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시장이 서면 상인이 옵니다. 상인이 오면 길이 열리고요.」
금테 안경 너머로 미소가 번졌다. 계산이 아닌 미소. 기대의 미소.
에스텔라는 빈 분수대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분수대 위에 콩 세 알을 올려놓고 갔다. 물 대신 콩이 놓인 분수대. 아직은 마른 돌이지만, 언젠가 물이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