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의 비상등이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습격의 잔해가 바닥 곳곳에 널려 있었고, 설계자가 쏜 총탄의 화약 냄새가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하은은 금이 간 모니터 앞에 쭈그려 앉아 메인프레임의 부팅 시퀀스를 두 번째 돌리고 있었다.
손등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았다. 자기 피는 아니었다.
설계자가 무릎을 꿇고 폐쇄문에 임시 용접을 하고 있었다. 토치의 푸른 불꽃이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그의 얼굴을 비췄다. 왼팔에 감긴 붕대 사이로 핏물이 스며들어 천이 검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용접봉을 놓지 않았다.
"전력이 47%까지 떨어졌어."
설계자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하은은 대답 대신 키보드를 두드렸다. 먹통이던 화면 한 귀퉁이에서 커서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데이터베이스 접속 경로가 한 줄씩 올라왔다.
세진이 남긴 외장 하드를 USB 포트에 꽂았다. 접촉 불량인지 인식이 되지 않아 한 번 뽑았다가 다시 밀어넣었다. 딸깍. 드라이브 표시등에 초록빛이 들어왔다.
파일 목록이 펼쳐졌다. 수천 개의 폴더와 암호화된 문서들. 하은의 시선이 날짜순으로 정렬된 항목들을 훑어 내려갔다. 2024년 3월, 4월, 5월. 준혁의 전이 시술이 이루어진 시점 근처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ESSENCE_STREAM_032' 폴더를 열자, 안에 들어 있던 건 영상이 아니었다. 실시간 데이터 로그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갱신되고 있는 좌표값과 생체 신호 그래프.
화면 상단에 찍힌 이름이 눈에 박혔다.
강준혁. 상태: 영혼 분리 완료. 용도: 대기. 구매자: 미배정.
하은의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경직되었다. 로그를 아래로 내렸다. 분리된 영혼이 디지털 데이터 스트림 안에 갇힌 채 관리국 중앙 서버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었다. 옆에 '소울코인 입찰 대기'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그를 팔려고 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의식을 상품 번호로 분류해놓은 스프레드시트가 하은의 망막 위에서 일렁거렸다. 숫자와 코드명 사이사이에 다른 이름들도 있었다. 스물세 개의 영혼이 같은 서버 안에서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봐요."
설계자가 토치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접 장갑을 벗어 허벅지에 끼우더니 화면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수 프로젝트의 부산물이야. 전이 과정에서 추출된 영혼을 폐기하지 않고 클라우드에 저장해둔 거지."
하은의 손톱이 무릎을 파고들었다. 스물세 명. 그 숫자가 위장 아래를 짓눌렀다.
설계자가 고개를 저었다. "세진이 이걸 알고 있었나."
"준혁 씨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잖아요."
하은의 목소리가 반음 올라갔다. 스스로 그것을 알아채고 입술을 다물었다. 호흡을 고르는 데 세 박자가 걸렸다.
설계자가 곁에 앉았다. 무릎을 접고 바닥에 등을 기대는 동작이 느렸다. 나이 든 몸이 무겁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의식이 디지털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뿐이야. 존재라기보다 데이터에 가까워."
"데이터든 뭐든, 거기 갇혀서 경매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어쩔 셈이지."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위로 손을 뻗어 강준혁의 상태 창을 확대했다. '영혼 보존 온도: -273.15K. 의식 활동 수치: 미약.' 기계가 측정할 수 있는 단위로 환산된 한 사람의 존재가 형광색 숫자로 떠 있었다.
왼손이 귀 뒤를 더듬었다. 타투의 윤곽이 손가락 끝에 잡혔다. 어젯밤 영상 속 아이의 귀 뒤에도 같은 표식이 있었다. 그 사실이 목구멍 깊은 곳에 가시처럼 걸려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삼킬 때가 아니었다.
"관리국 중앙 서버에 직접 접속해야 해요."
설계자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용접 자국이 남은 폐쇄문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하은을 바라봤다.
"방금 이사회 추격대를 간신히 막아냈는데, 이번엔 관리국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여기서 원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없어." 설계자가 단호하게 잘랐다. "중앙 서버는 물리적 에어갭으로 보호돼 있어. 외부 네트워크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니까. 직접 단말기에 손을 대지 않는 한 데이터를 꺼낼 수 없다."
하은은 모니터를 껐다. 검게 꺼진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마에 긁힌 상처, 말라붙은 혈흔, 사흘째 감지 못한 머리카락. 그 사이에서 두 눈만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가야 해요."
"넌 기자야. 전투원이 아니라고." 설계자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왼팔의 붕대가 움직임에 따라 풀렸고, 그는 이를 무시한 채 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어. 오민준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알아요."
"알면서도?"
"준혁 씨는 내 약혼자의 몸을 훔쳤지만, 적어도 나를 지키려 했어요."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기계 속에 버려둘 순 없어요."
설계자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하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읽으려는 듯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하은의 귀 뒤로 잠깐 옮겨갔다가 돌아왔다.
"네 아버지도 그랬어." 나직한 목소리였다. "같은 눈을 하고, 같은 말을 했지. 누군가를 구하러 가겠다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벙커의 환기 장치가 돌아가는 저주파 소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하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야 해요. 아버지가 못 끝낸 것까지."
설계자는 한참을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 칩을 꺼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였고, 표면에 회로가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하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관리국 지하 3층 서버실 보조 단말기에 꽂아. 60초 안에 데이터 스트림을 너한테 동기화시켜줄 거야." 그가 하은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이상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금속 칩의 차가운 감촉이 손금을 따라 퍼졌다.
하은이 칩을 주먹 안에 쥐고 메인프레임으로 돌아갔다. 관리국 건물의 도면을 불러오기 위해 세진의 외장 하드를 다시 뒤졌다. 파일 하나를 열자 건축 설계도가 펼쳐졌다. 지하 3층으로 이어지는 배관 통로가 파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경로를 따라 움직이다 멈췄다. 화면 구석에 알림 하나가 떠올랐다.
'ESSENCE_STREAM_032: 의식 활동 수치 급상승. 외부 공명 감지.'
하은의 손가락이 알림을 눌렀다. 강준혁의 데이터 창이 다시 열렸다. 의식 활동 그래프가 수평선을 그리다 갑자기 톱니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수치가 요동쳤다.
귀 뒤가 뜨거워졌다. 타투가 열을 뿜는 것처럼. 하은은 손을 가져가 만졌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진동하고 있었다.
모니터의 형광 불빛이 일순 사라졌다. 검은 화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소리가 아닌 무언가가 귓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주파수라고 부르기엔 너무 날것이었다. 음성이라 하기엔 형체가 없었다. 하은의 고막이 아닌 뼛속 어딘가가 그것을 해석했다. 의미가 형태를 갖추기 전에 먼저 방향이 잡혔다. 한강 이남. 영혼관리국 본부가 아닌 다른 곳. 더 깊은 곳.
좌표가 머릿속에 찍혔다. 위도와 경도가 아니라 체온과 맥박의 언어로.
설계자가 하은의 얼굴 변화를 감지했다. "무슨 일이야?"
하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평소보다 확장되어 있었다. 귀 뒤의 타투에서 희미한 청색 빛이 새어 나와 턱선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준혁 씨가 알려주고 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관리국 총수가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용산 옛 미군기지 지하. 좌표를 보내고 있어요."
설계자가 하은의 귀 뒤를 응시했다.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바짝 말라 갈라졌다.
"영혼 공명이 아니야." 그가 한 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양방향 동기화다. 네가 그쪽에 접속한 게 아니라, 그쪽이 너를 통해 나오고 있어."
화면이 다시 켜졌다. '오지 마'라는 글자가 피처럼 붉게 변하며 일그러졌다. 경고가 사라진 자리에 수만 개의 시스템 로그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설계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가 단말기로 달려들어 강제 종료를 시도했지만, 제어권은 이미 외부의 거대한 의지에 먹혀버린 뒤였다.
벙커의 육중한 폐쇄문 너머에서 금속을 찢는 파열음이 터졌다. 외부에서 잠금장치를 과부하시키는 유압 장치의 굉음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좌표가 노출됐어!" 설계자가 비명을 질렀다. "네 타투가 비콘 역할을 한 거야!"
그가 하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은 이미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욱한 분진과 불꽃 사이로 검은 강화복을 입은 이사회 직속 타격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총구가 일제히 하은의 심장을 향했다. 선두에 선 남자가 하은의 귀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청색 빛을 확인하며 무전기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