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헤드라이트를 삼켰다. 민통선 철조망 너머로 뻗은 비포장 도로를 낡은 지프차가 흔들리며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손등에 오래된 화상 흉터가 얼룩져 있었다. 서하은은 조수석에서 배낭 끈을 움켜쥐고 앞만 봤다.
외장 하드의 모서리가 등뼈를 눌렀다. 세진이 남긴 것. 세진의 체온이 아직 거기 묻어 있을 것 같아서 등을 좌석에 기대지 못했다.
"삼십 분이면 도착한다."
설계자가 말했다. 재하의 얼굴이 아닌 다른 몸.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마른 체형에 관자놀이의 흰머리가 성글었다. 하은이 아는 아버지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검지로 턱을 긁는 버릇만은 어릴 적 희미한 기억 속 그 사람과 겹쳤다.
"왜 DMZ입니까."
"관리국 추적 반경 밖이야. 그리고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이 거기 있다."
하은은 대답 대신 창밖을 보았다. 철조망에 걸린 녹슨 경고판이 안개 속에서 번뜩이다 사라졌다. 지뢰 매설 지역. 차가 잘못된 경로로 빠지면 둘 다 끝이었다.
설계자는 도로 위의 특정 표식들을 읽듯이 핸들을 꺾었다. 세 번째 갈림길에서 멈추더니 차에서 내려 수풀 사이의 콘크리트 덮개를 맨손으로 밀어 올렸다. 근육이 부족한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녹슨 경첩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내려."
계단이 보였다. 콘크리트 벽 사이로 좁고 가파르게 이어지는. 하은은 배낭을 앞으로 돌려 안고 발을 디뎠다. 벽에서 습기가 배어 나왔고, 손끝에 닿는 콘크리트 표면에 이끼의 축축한 질감이 묻었다.
열두 계단. 스물네 계단. 공기가 바뀌었다. 땅속 깊은 곳 특유의 무거운 냄새. 흙과 녹과 오래된 기름이 섞인.
설계자가 벽면의 차단기를 올렸다. 형광등 몇 개가 깜빡이며 지하 벙커의 윤곽을 드러냈다. 천장이 낮았다. 성인 남성이 고개를 약간 숙여야 할 높이. 양쪽 벽을 따라 철제 선반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 먼지 쌓인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유리관. 전극 패드. 뇌파 측정기의 초기 모델처럼 보이는 것.
"여기서 시작됐어."
설계자가 벙커 중앙의 수술대를 손으로 쓸었다. 먼지가 일어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입자처럼 떠돌았다.
하은은 수술대 옆에 서지 않았다. 입구에서 네 걸음 떨어진 지점. 출구를 등지지 않는 위치를 골랐다.
"설명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습니다."
"물어봐."
"세진의 칩. 정수로 구동되는 그 칩. 당신이 설계한 겁니까."
설계자의 손이 수술대 위에서 멈췄다. 먼지를 털던 동작이 중단된 채 3초가 흘렀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얼굴 한쪽만 비추었다.
"그래."
하은의 왼손이 주머니 안에서 세진에게 받았던 테이저를 감쌌다. 충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잡이의 고무 그립을 놓을 수 없었다.
"칩도, 정수 추출도, 전이 기술도. 전부 내가 만들었어."
"그걸 지금 자랑하는 건가요."
"네가 싸우려는 적의 뿌리를 모르면 가지만 치다 끝나."
설계자가 선반 아래에서 납작한 금속 상자를 끌어냈다. 잠금장치를 손가락 지문으로 해제하자 상자 안에서 누렇게 바랜 서류 뭉치와 슬라이드 필름이 나왔다. 그가 서류를 수술대 위에 펼쳤다.
하은은 거리를 유지한 채 서류 위로 시선을 내렸다. 첫 장은 1953년 날짜가 찍힌 군사 기지 배치도였다.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넘겼다. 두 번째 장. 포로 심문 기록. 영문 타자기로 찍힌 글씨 사이에 손글씨 주석이 빼곡했다. 'Subject exhibited involuntary memory transfer at 12.7Hz sync.' 세 번째 장을 넘기자 흑백 사진이 나왔다. 전극이 부착된 두 사람의 관자놀이, 그 사이를 잇는 굵은 케이블. 네 번째 장. 실험 결과 도표. 성공률 0.3퍼센트. 사망률 칸의 숫자가 잉크 번짐으로 뭉개져 있었지만, 두 자릿수라는 건 읽을 수 있었다.
하은의 손이 멈췄다. 다섯 번째 장에는 이 벙커의 평면도가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 '의식 수행 구역'이라는 한글 표기가 붉은 잉크로 추가되어 있었다.
"뇌파 동기화의 원형."
"원형이라기엔 너무 원시적이었어.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했고, 그걸 연구하던 부대원 중 하나가 이 벽에 기록을 남겼다."
설계자가 벙커 안쪽 벽으로 걸어갔다. 하은은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갔다. 설계자가 벽면의 철제 패널을 양손으로 잡아 떼어냈다. 녹슨 볼트가 바닥에 떨어져 금속음을 울렸다.
패널 뒤로 콘크리트 벽이 드러났다. 그 위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하은의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군용 페인트로 그린 회로도였다. 노드와 연결선이 복잡하게 얽힌 영혼 전이 장치의 설계 원도. 하은은 영종도 클리닉 지하에서 봤던 최신 장비의 회로 패턴을 떠올렸다. 구조가 비슷했다. 아니, 거의 같았다.
그런데 회로도 아래에 다른 것이 있었다.
콘크리트를 긁어낸 듯한 선각화. 페인트보다 훨씬 이전에 새겨진 것이 분명했다. 사람의 윤곽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사이를 잇는 곡선들이 흘렀다. 한쪽 사람의 가슴에서 나온 선이 다른 쪽의 머리로 들어가는 형상.
"이 선각화는 벙커를 팔 때 발견됐어. 콘크리트 아래 원래의 지반, 암반층에 새겨져 있었다."
설계자가 선각화의 곡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돼. 무당들이 혼을 옮기는 의식을 기록한 거야."
하은의 시선이 선각화와 군용 회로도 사이를 오갔다. 곡선의 흐름이 회로의 전류 경로와 포개졌다. 우연이 아니었다. 고대의 의식도가 현대의 회로 설계와 동일한 패턴을 공유하고 있었다.
"미군 부대원이 이걸 보고 영감을 얻은 거예요?"
"아니. 순서가 반대야."
설계자가 돌아섰다. 그의 눈이 형광등 아래서 유리처럼 빛났다.
"부대원이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회로도를 그렸는데, 나중에 벽을 확장하다가 선각화를 발견한 거야. 먼저 그린 회로도가 수천 년 전의 의식도와 일치했다는 뜻이지."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며 벙커의 그림자를 흔들었다.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이곳의 흙 아래에는 전이 실패로 버려진 수천 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설계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53년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영종도에서, 이름 모를 지하실에서. 이 기술은 수천 명을 소모하며 완성됐어. 기술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뭐였는데요."
"의식이었어."
설계자가 선반에서 슬라이드 필름 하나를 꺼내 형광등에 비추었다. 필름 속에는 한반도 각지의 암각화 사진이 담겨 있었다. 울산 반구대. 고령 장기리. 모두 같은 패턴. 두 존재 사이를 잇는 곡선.
하은은 벽 앞에 선 채 손끝으로 선각화의 홈을 만졌다. 차갑고 거친 암반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수천 년 전 누군가가 이 홈을 팠다. 돌 도구로, 혹은 맨손으로.
"그러면 그림자 이사회가 독점한 건 과학 기술이 아니라."
"고대의 의식을 재현하는 방법이야. 그리고 그 의식에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힘이 개입해."
등에서 외장 하드의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세진이 목숨을 걸고 넘긴 데이터. 그 안에 이 사실도 들어 있을까.
하은이 배낭을 내려 외장 하드를 꺼냈다. 설계자의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세진이 빼낸 거야?"
"네. 소울코인 거래 내역과 정수 프로젝트 데이터가 들어 있을 겁니다."
설계자가 선반 아래에서 구형 노트북을 끌어냈다. 전원을 연결하고 부팅하는 동안 하은은 벙커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수술대의 가죽 벨트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누군가 묶인 채 발버둥 친 흔적.
노트북 화면이 켜졌다. 설계자가 외장 하드를 연결하고 파일 목록을 열었다. 하은이 옆으로 다가갔다. 화면에 폴더들이 나열되었다. 날짜순. 가장 오래된 폴더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ORIGIN_1953'
설계자가 그 폴더를 열었다. 안에는 스캔된 문서들과 함께 영상 파일 하나가 있었다. 흑백. 화질이 거칠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 벙커의 내부가 화면에 나타났다. 수술대 위에 누운 사람. 전극이 관자놀이에 부착되어 있었고, 옆에는 한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노인의 손이 허공에 그리는 궤적이 벽의 선각화와 동일한 곡선을 따랐다.
하은의 왼손이 귀 뒤로 올라갔다. 타투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영상 속에서 수술대 위의 사람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면 한구석, 군용 장비 뒤에 웅크리고 앉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귀 뒤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귀 뒤 타투 위로 열기가 번졌다. 처음엔 미지근한 온기. 곧 피부 안쪽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솟아올랐다. 화면 속 아이의 귀 뒤에서 빛나는 문양의 윤곽이 선명해질수록 하은의 타투가 맥박처럼 욱신거렸다. 마치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같은 주파수에 응답하듯, 피부 위의 잉크가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하은은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으로 귀 뒤를 눌렀지만 통증은 피부 아래, 뼈에 가까운 깊은 곳에서 울렸다.
설계자가 고개를 돌려 하은을 보았다. 검지로 턱을 긁으며. 그의 시선이 하은의 귀 뒤를 누른 손 위에 고정되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 속 아이의 귀 뒤를 가리켰다.
"저건 단순한 흉터가 아니야. 수천 명의 영혼이 너라는 그릇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소모되었음을 증명하는 낙인이지."
노트북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붉은 노이즈로 뒤덮였다.
벙커 천장의 형광등이 일제히 꺼졌다. 완전한 어둠. 육중한 강철 폐쇄문 너머에서 누군가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휘어지기 시작했고, 설계자는 서둘러 책상 밑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너무 늦었군. 이사회 놈들이 의식의 원본을 회수하러 왔다."
총구의 안전장치를 풀며 하은의 어깨를 밀쳤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칠흑보다 더 짙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