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벨벳 드레스의 등 라인이 견갑골 아래까지 파였다. 거울 속 여자는 낯설었다. 세진이 구해준 초청장을 클러치백 안쪽에 밀어 넣고, 하은은 호텔 정문의 회전문을 밀었다.
그랜드 하얏트의 로비가 펼쳐졌다. 천장에서 늘어뜨린 크리스털 샹들리에 수십 개가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공간 전체가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향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백합과 앰버가 뒤섞인, 달콤하면서 퀴퀴한 냄새. 장례식장 화환을 떠올리게 하는 종류였다.
"초청장 확인하겠습니다."
하은은 클러치에서 금박 카드를 꺼냈다. 검은 정장의 보안요원이 카드 뒷면의 QR코드를 스캔했다. 짧은 전자음. 요원의 표정이 한 톤 부드러워지며 고개를 숙였다.
"33층 스카이볼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귀 뒤의 타투가 미세하게 열을 냈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하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베이터 벽면 유리에 비친 보안요원의 윤곽 위로,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연기의 결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본래 이 육체에 새겨진 파장과 지금 그 안에 깃든 파장 사이에 가는 균열이 벌어져, 실금처럼 갈라진 틈으로 다른 색이 새어 나왔다.
이미 갈아탄 자.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클러치백의 금속 잠금장치를 엄지로 눌렀다 뗐다, 눌렀다 뗐다.
33층의 문이 열리자 소리가 쏟아졌다. 재즈 트리오의 연주,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웃음. 스카이볼룸은 서울의 야경을 삼면으로 품고 있었고, 그 야경 위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떠다녔다.
아니.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은이 눈을 가늘게 좁히자 볼룸의 풍경이 벗겨졌다.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 위로 영혼 파장들이 일그러져 있었다. 본래의 육체와 맞지 않는 파장이 옷처럼 삐져나와 허공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열 명 중 서넛은 파장이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남의 몸을 입은 자들.
"신선한 얼굴이시네요."
옆에서 샴페인 잔을 내민 여자의 목소리는 이십 대였으나, 하은의 눈에 비친 파장은 일흔을 넘긴 탁한 색이었다. 손등에 간신히 숨긴 검버섯 자국이 파운데이션 사이로 비쳤다. 각인이 덜 된 것이다. 하은은 잔을 받아 들고 입술만 적셨다.
"처음 오셨어요? 환생 축제는 매번 테마가 달라서 재미있거든요."
"어떤 테마인가요."
"올해는 '두 번째 봄'이래요."
여자가 킥킥거리며 볼룸 중앙을 가리켰다. 원형 무대 위에 투명한 아크릴 관이 세워져 있었다. 관 안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남자. 눈을 감고 양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올린 자세.
살아 있었다. 가슴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저분이 오늘의 '선물'이에요."
여자가 속삭이듯 말하며 하은의 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 하은은 팔을 빼지 않았다. 위장을 유지해야 했다.
무대 옆 계단으로 백발의 남자가 올라섰다. 회색 수트에 호피 타이. 연단 위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출 때, 하은은 왼손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어 떨림을 감췄다. 최영달. 현직 국회의원이자 그림자 이사회의 수장.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
마이크를 잡은 최 의원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톤.
"죽음은 이제 가난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공평함이죠."
볼룸이 잠시 조용해졌다. 최 의원이 아크릴 관 위에 손을 올렸다. 관 안의 남자는 눈을 뜨지 못했다.
"우린 그 공평함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진심이 담긴 박수였다. 눈가에 물기를 비치는 노인도 있었다. 그들에게 이것은 감동적인 순서였다. 새 몸을 얻는 축복의 의식.
하은의 속이 뒤집혔다.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샴페인 잔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잔의 온도에 집중했다. 차갑다. 차가운 것에 집중하면 토하지 않는다. 재하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올해 이사회는 특별히 여섯 분의 신규 회원님께 '두 번째 봄'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최 의원이 손짓하자 무대 뒤에서 여섯 개의 아크릴 관이 더 나왔다. 각 관 안에 젊은 남녀가 누워 있었다. 뇌사 판정. 혹은 뇌사로 위장된 상태. 하은은 눈을 가늘게 떠 그들의 윤곽을 훑었다. 파장이 희미하지만 살아 있었다. 깜빡이는 촛불처럼.
옆의 여자가 하은의 잔을 가져가며 새 잔을 건넸다.
"저 세 번째 관, 발레리나 출신이래요. 근육이 아직 살아있대."
"어떻게 아세요?"
"카탈로그에 나와 있잖아요."
여자가 클러치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하은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종이 위에는 관 속 사람들의 사진과 신체 스펙이 상품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키, 체중, 혈액형, 근력 수치, 유전자 적합도. 가격란에는 소울코인 단위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실례 좀 할게요."
하은은 여자에게 미소를 남기고 볼룸 구석으로 이동했다. 화장실 표지판을 따라 복도로 빠졌다. 발이 카펫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으로 진동이 올라왔다. 어딘가에서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클러치백 안의 소형 단말기가 진동했다. 세진이 보낸 메시지.
'34층 서비스 엘리베이터. 카드키는 소화전 뒤.'
복도 끝의 소화전함을 열었다. 빨간 호스 뒤에 흰색 카드키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세진이 미리 심어둔 것이다. 손가락으로 테이프를 뜯을 때 손톱이 갈라졌다. 통증을 무시하고 카드키를 뽑았다.
서비스 엘리베이터는 좁고 차가웠다. 스테인리스 벽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형광등 아래서 핏기 없이 떠 있었다. 34층. 문이 열렸다.
볼룸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34층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무균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도 양쪽으로 유리문이 늘어서 있었고, 각 문 안에는 의료 장비가 가득했다. 시술 준비실.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하이힐을 벗어 한 손에 들었다. 맨발에 닿는 타일 바닥이 얼음장이었다.
세 번째 방을 지날 때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의료 장비가 아니었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정도의 금속 보관함이 벽면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냉동 보관함처럼 생겼으나 표면에 파란 빛이 맥박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보관함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카드키를 댔다. 잠금이 풀렸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보관함의 파란 빛이 방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수족관 안에 들어온 것처럼 모든 것이 푸르게 출렁였다. 하은은 보관함 사이를 걸었다. 이름표를 하나씩 읽었다. 모르는 이름들. 숫자와 날짜가 병기되어 있었다.
그러다 멈췄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하이힐이 손에서 떨어져 타일 바닥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보관함 이름표에 적혀 있었다.
윤재하. 2024.03.17. 상태: 보존 중.
파란 빛이 느린 심장 박동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하은의 손이 보관함 표면으로 갔다. 금속이 차가웠다. 손바닥 전체로 그 차가움을 눌렀다. 안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영혼이 있었다.
육체는 강준혁이 가져갔지만, 재하의 영혼은 여기에 있었다. 소멸되지 않았다. 버려지지도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귀 뒤의 타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보관함의 파란 빛이 하은의 타투와 같은 주기로 명멸하기 시작했다. 공명.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하고 있었다.
"재하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보관함의 빛이 한 번 강하게 번졌다가 돌아왔다. 응답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뭘 하고 있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34층에서 카드키 없이 문을 여는 사람. 최 의원의 목소리가 등 뒤를 짓눌렀다.
하은의 맨발이 타일 위에서 방향을 틀었다. 보관함과 자신 사이에 손바닥 하나 넓이의 간격을 남긴 채, 최 의원을 마주 봤다.
복도의 조명을 등진 노인의 실루엣 뒤로 검은 정장의 보안요원 셋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재하의 얼굴을 한 남자가 최 의원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준혁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가 느릿하게 손을 뻗자 보관함의 파란 빛이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다.
"그걸 건드리면 안 돼!"
하은이 보관함을 등 뒤로 감싸며 외쳤다. 보안요원들이 그녀의 양팔을 거칠게 낚아채 바닥으로 메쳤다. 어깨뼈가 타일에 부딪히며 둔탁한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퍼졌다.
최 의원이 차가운 눈으로 하은을 내려다보며 강준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영혼은 단순한 보존물이 아니다. 우리가 완성할 '두 번째 봄'의 핵심 연료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준혁의 손가락이 보관함의 강제 추출 레버를 움켜쥐었다. 하은의 시야 속에서 보관함의 파란 맥박이 경고하듯 붉은색으로 타올랐다. 차가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강준혁이 레버를 힘껏 당기자, 보관함 내부에서 정체불명의 고주파음이 터져 나오며 하은의 고막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