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보관함의 유리면에 닿기 직전이었다.
"움직이지 마."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하은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유리 표면 아래로 옅은 청색 빛이 맥박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재하의 영혼 파장. 수백 번 들여다본 색이다.
"서하은 기자, 세 번째 경고입니다."
오민준의 구두 뒤축이 대리석 바닥을 찍었다. 그 소리에 맞춰 양쪽 복도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요원 네 명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반원 대형. 퇴로는 없다.
하은은 보관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렸다. 오민준은 파티장 조명 아래에서도 그림자를 두른 것처럼 어두운 인상이었다. 오른손에 쥔 소형 디바이스의 붉은 LED가 점멸하고 있었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나중에 묻겠습니다." 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지금은 손을 내려요."
"못 해. 그 사람을 다시 가두게 두진 않아."
하은의 시야에는 보관함 속 영혼 파장만 보였다. 파란색. 재하가 웃을 때 항상 떠올랐던 색이다. 연구실에서 퇴근하며 전화를 걸 때, 목소리에 실려 오던 그 빛깔.
"협조하시면 신변 보장을 약속드립니다."
"너희가 약속한 것 중에 지켜진 게 뭐가 있어."
오민준의 눈이 좁아졌다. 디바이스를 들어 올리며 요원들에게 턱짓을 보냈다. 가장 가까운 요원이 허리춤에서 주사기형 진정제를 꺼내 캡을 벗겼다.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스쳤다.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타투가 뜨거웠다. 피부 밑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열기가 번졌다. 목을 타고 쇄골을 지나 보관함에 닿은 오른손 손가락 끝까지.
"제압해."
오민준의 명령이 떨어졌다.
요원 하나가 하은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손목을 움켜쥐는 순간, 하은의 몸에서 빛이 터졌다.
소리는 없었다. 파열음도 폭발도 아니었다. 청백색 빛이 하은의 피부 표면을 따라 물처럼 흘러나와 반경 5미터를 채웠다. 빛이 닿은 요원들의 동작이 멈췄다. 주사기를 든 손이 허공에 고정되고, 오민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던 숨이 하얀 입김 상태로 정지했다.
먼지 입자가 공중에 매달렸다.
하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피부 위로 미세한 정맥 패턴을 따라 빛이 흘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점도가 있는 것처럼 폐를 채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보관함 속 재하의 영혼 파장이 더 밝아졌다. 하은의 빛에 반응하듯 유리 안쪽에서 파란빛이 손바닥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하은은 보관함 잠금장치를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지만 힘을 주자 금속이 찌그러지며 열렸다. 손에 전해지는 금속의 차가움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그 순간 오민준이 움직였다.
빛의 범위 안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게. 물속을 걷는 것처럼 저항을 받으며.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흥미롭군."
그의 목소리가 점성을 가진 공기를 뚫고 왔다. 느리게 늘어진 음파가 아니라 또렷한 발음이었다.
"당신의 능력이 여기까지였어?" 오민준이 한 발을 끌며 다가왔다. "영혼 파장 식별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하은의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다. 빛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몸 안의 무언가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당신이 벙커에서 추적 비콘을 발동시킨 날." 오민준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얇은 태블릿을 꺼냈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정확했다. 화면에 하은의 뇌파 데이터가 떠 있었다. "대각성 돌연변이 중에서도 당신은 특이한 케이스였어. 파장 식별만이 아니라 파장 자체를 방출하는 체질."
"그래서 뭐." 하은이 보관함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이 캡슐 형태의 영혼 저장 장치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위로 재하의 파장이 잔물결처럼 번졌다.
"관찰 대상 서-017." 오민준이 읽듯 말했다. "2012년 대각성 당시 출생한 돌연변이 중 유일하게 능동형 파장 방출 능력을 보유한 개체. 시각화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간섭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
하은의 손이 캡슐을 감쌌다. 주먹만 한 크기였다. 안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심장 박동과 비슷한 리듬.
"내가 왜 관찰 대상이었는지 이제 알겠어." 하은이 캡슐을 꺼내며 오민준을 마주 봤다. "나는 너희의 기계를 부술 수 있는 유일한 변수니까."
오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것이 아니었다.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부수는 게 아니라 대체하는 거지." 그가 태블릿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림자 이사회가 당신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가 뭘 것 같아? 샘플이니까. 레테 없이 영혼 전이를 가능하게 할 열쇠."
하은의 빛이 흔들렸다. 요원 하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정지 상태가 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서 기자." 오민준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빈손이었다. "나와 거래하든 이사회와 거래하든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캡슐을 품에 안고 보관함에서 물러났다.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팔뚝의 핏줄이 위로 솟아올라 피부를 밀어냈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오민준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당신 아버지도 같은 능력을 가졌었어."
발이 멈췄다.
"서정호 박사. 프로젝트 라자로의 설계자이자 최초의 능동형 파장 방출자." 오민준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보고서를 읽는 톤이었다. "그는 자기 몸으로 실험했고 결국 영혼이 분산됐어. 지금 이 건물 어딘가에 데이터 조각으로 남아 있지."
하은의 귀 뒤 타투가 다시 뜨거워졌다. 캡슐이 그에 반응하듯 진동을 높였다.
"거짓말."
"거짓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 거야." 오민준이 턱으로 캡슐을 가리켰다. "그 안에 있는 윤재하의 잔류 데이터를 열어보면 돼. 당신의 파장이라면 가능해. 대신."
그가 말을 끊었다.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대신 뭐." 하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열리는 건 재하의 영혼만이 아닐 거야. 당신 아버지가 심어둔 설계도도 함께 풀려. 그게 이사회가 원하는 거고."
요원들의 몸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주사기를 든 요원의 팔꿈치가 1센티미터쯤 움직였다.
하은은 캡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의 파장을 흘려보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캡슐이 빛을 빨아들이듯 파장을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저릿했고 손목 안쪽의 맥박이 캡슐의 진동과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금속 표면이 따뜻해졌다.
파란빛이 캡슐 이음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민준이 무언가를 외쳤지만 소리가 닿지 않았다. 하은의 귀에는 다른 것이 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잡음이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갈라지고 겹치는 소리. 그 사이로.
'하은아.'
숨을 삼켰다. 들이마신 공기가 폐에서 나가지 않았다.
'들려?'
재하의 목소리였다. 전화 너머로 퇴근길에,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서 "밥 먹었어?" 하고 묻던 그 톤. 그대로였다.
하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몸을 감싸던 청백색 빛이 모두 캡슐로 흡수되어 방 안이 어두워졌다. 요원들이 동시에 균형을 잡으며 비틀거렸다. 정지 상태에서 풀려난 관성 때문이었다.
오민준이 소리쳤다. "잡아!"
하은은 듣지 못했다. 캡슐을 가슴에 안은 채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닿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재하의 목소리가 머릿속 전부를 채우고 있었다.
'하은아, 설계자를 믿지 마.'
캡슐의 진동이 거세졌다. 하은의 귀 뒤 타투가 청색으로 빛나며 캡슐과 같은 리듬으로 깜빡였다.
'그는 내 몸을 이용해 신이 되려는 거야.'
요원의 손이 하은의 어깨를 잡았다. 하은은 캡슐을 놓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고 있었다.
오민준이 요원을 밀어내며 하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시선이 캡슐이 아니라 하은의 귀 뒤 타투에 고정되어 있었다. 태블릿을 다시 꺼내 카메라를 타투에 들이댔다.
"영혼 공명 수치 387." 그가 중얼거렸다. "역대 최고치야."
하은의 입술이 벌어졌다. 재하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잡아야 했다. 손을 뻗어야 했다.
"재하야."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통제할 수 없는 소리였다.
'시간이 없어. 서정호는 아버지가 아니야. 하은아, 그는―'
소리가 끊겼다.
캡슐의 빛이 꺼졌다.
하은은 꺼진 캡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캡슐의 이음새 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오민준이 천천히 일어서며 코트 먼지를 털었다.
"흥미로운 반응이었어." 그가 태블릿을 접었다. "윤재하의 잔류 영혼이 능동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정도면 영혼 각인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거야."
하은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눈물은 없었다.
"서정호가 아버지가 아니라니." 하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슨 뜻이야."
오민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요원들이 물러나며 복도를 열었다.
"알고 싶으면 따라와요, 서 기자." 오민준이 등을 돌렸다. "설계자를 만나게 해줄 테니."
하은은 바닥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지만 서 있을 수는 있었다. 캡슐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금속의 무게가 갈비뼈 옆에 닿았다.
오민준이 복도 끝에서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참, 한 가지." 그의 목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울렸다. "설계자가 기다리고 있는 방에는 윤재하의 육체도 있어. 강준혁의 레테 투여가 오늘 아침부터 중단됐거든."
하은의 발이 멈췄다. 레테 중단. 기억 역류. 재하의 육체 안에서 두 영혼이 통제권을 놓고 충돌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주머니 안에서 캡슐이 다시 미세하게 진동했다.
하은은 오민준의 뒤를 따라 어두운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