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전체의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비상등마저 점멸하다 사라졌다. 복도를 채운 것은 숨소리뿐이었다. 하은의 손바닥이 차가운 벽면을 더듬었다. 콘크리트 표면에 미세한 진동이 흐르고 있었다. 건물 자체가 떨고 있는 듯한 저주파의 울림.
"전력 차단이 아니야."
정세진이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화면 위로 데이터가 역류했다. 배터리로 전환된 모니터에 에너지 흐름 그래프가 급격히 꺾여 있었다. 세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흡수야. 누군가 이 건물의 모든 전기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어."
하은의 귀 뒤가 뜨거워졌다. 타투가 새겨진 피부 아래로 맥박과는 다른 리듬의 파동이 퍼졌다. 어둠 속에서 그 부위만이 희미한 청색 빛을 흘렸다. 손을 갖다 대자 따끔한 열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린 걸음. 급할 것 없는 박자.
재하의 얼굴을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하은은 한눈에 알았다. 영혼 파장이 달랐다. 재하도 아니고 준혁도 아닌 전혀 다른 색이 그 윤곽을 감싸고 있었다. 탁한 회색에 금빛 실이 엉겨 붙은 기형적인 파장.
"오래 기다렸다, 하은아."
그 목소리에 재하의 억양이 섞여 있었다. 하은의 왼손이 주머니 안에서 외장 하드의 모서리를 쥐었다. 세진이 목숨 걸고 건네준 증거. 금속 테두리가 손금에 파고들었다.
"누구야."
반음도 흔들리지 않게 턱을 당기고 물었다.
남자가 웃었다. 재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였지만 눈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동공 주변으로 금빛 실 같은 것이 실핏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프로젝트 라자로의 설계자. 네 아버지의 스승이자 후원자. 그리고 이 기술이 세상에 나오기 전, 최초로 영혼을 옮긴 사람."
세진이 노트북을 안은 채 한 발 물러났다. 화면의 그래프가 급격히 치솟았다. 건물의 잔여 전력이 눈앞의 남자에게로 수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테의 강에 접속하고 있어."
세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신 노트북에서 케이블을 뽑아 벽면 단자에 직접 연결했다. 물리적 접근으로 데이터 흐름을 추적하려는 시도였다.
"영혼관리국 메인 서버야. 저 남자가 전력을 매개로 서버 통제권을 가져가고 있어."
하은은 설계자의 파장을 주시했다. 회색 파동이 점점 짙어지며 주변 공기를 왜곡했다.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도 느껴졌다. 오존 냄새. 전기가 타는 듯한 자극이 코끝을 찔렀다.
"네 에너지가 필요하다."
설계자가 손을 들었다. 재하의 손. 길고 마른 외과의사의 손가락. 하은이 수없이 잡았던 그 손이 허공에서 당기는 동작을 취하자 귀 뒤 타투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청색 빛이 실처럼 뻗어 나가 설계자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릎이 꺾였다. 온몸에서 열이 빠져나갔다. 여름 한낮인데 한겨울 새벽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하은!"
세진이 외쳤지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벽면 단자에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서버 접속 경로를 역추적하는 중이었다.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키보드를 치면서 다른 손으로 허리춤의 신호 교란기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작은 금속 원통이 복도를 굴러 설계자의 발치에 멈췄다. 교란기가 작동하며 날카로운 고주파를 내뿜었다.
설계자의 손이 흔들렸다. 에너지 흡수가 찰나 끊겼다. 그 틈에 하은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힘이 돌아오지 않아 벽에 어깨를 기대야 했다.
"임시방편이야."
세진이 말했다. 모니터 빛이 눈에 번졌다.
"저 교란기로 30초. 그 안에 판단해."
설계자가 교란기를 발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고주파가 끊겼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멈췄다. 재하의 얼굴에 균열이 생긴 것처럼 표정이 갈라졌다. 오른쪽 눈꺼풀이 경련하듯 떨렸다.
"기억 역류."
하은이 중얼거렸다. 재하의 육체가 설계자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었다. 레테를 투여받지 못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본래 주인의 잔류 사념이 강해진다는 것을 하은은 알고 있었다.
설계자가 이마를 짚었다. 금빛 실이 흐려졌다.
"방해를 하는군."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돌아왔다. 두 사람의 성대가 겹치는 듯한 불쾌한 이중음이었다.
"듣거라, 서하은."
설계자가 고개를 바로 세웠다. 파장이 다시 안정되었고 금빛 실이 더 촘촘하게 재하의 윤곽을 감쌌다.
"네 약혼자의 심장을 멈춰라. 그래야 이 지옥 같은 연쇄가 끝난다."
하은의 손가락이 외장 하드 모서리에서 미끄러졌다.
"내가 이 육체를 매개로 레테의 강을 장악하면 등록된 모든 영혼 데이터가 내 것이 된다. 수천 명의 영혼이 내 도구가 돼. 그걸 막으려면 이 육체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어."
설계자가 양팔을 벌렸다. 재하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수술복 사이로 보이는 쇄골 아래의 점. 하은이 입술을 대본 적 있는 자리.
"선택해. 한 사람을 지키다 수천 명을 잃을 건지."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벽에서 어깨가 떨어졌다.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은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하은, 물리적 공격은 안 돼."
세진이 경고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재하 씨의 몸에 데미지가 누적돼. 죽이면 영구 파괴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원수를 죽이면 재하의 몸도 사라진다. 이 딜레마 안에서 하은은 줄곧 제3의 길을 찾아왔고, 매번 벽에 부딪혔다.
설계자가 에너지 흡수를 재개했다. 타투에서 다시 청색 빛이 빠져나갔다. 시야가 좁아졌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세진의 모니터에서 팝업이 떴다.
"뭐야 이건."
세진의 손이 멈췄다. 화면에 텍스트가 흘렀다. 서버 내부에서 발신된 메시지였다.
발신자 코드는 준혁의 디지털화된 영혼 식별 번호였다. 영혼관리국 서버에 데이터로 갇혀 있던 강준혁이 스스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세진."
하은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읽어."
세진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준혁이 보낸 데이터 패킷 안에는 자기 자신의 코드를 분해하여 악성 코드로 재구성하는 프로토콜이 담겨 있었다.
"자기 영혼 데이터를 바이러스로 변환해서 레테의 강 서버를 내부에서 붕괴시키겠다는 거야."
세진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실행하면 준혁 씨의 영혼 데이터가 완전히 소멸해. 되돌릴 수 없어."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설계자의 발이 두 걸음 앞에 있었다. 재하의 구두. 왼쪽 뒤축이 닳아 있는 그 구두.
"실행해."
하은이 말했다.
세진이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하은을 돌아보았다.
"알고 있지? 준혁의 데이터가 사라지면 재하 씨의 육체에서 전이된 영혼 자체가 증발해. 그 뒤에 뭐가 남을지는 아무도 몰라."
"알아."
하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졌지만 끊기지는 않았다.
"재하의 몸을 부수지 않고 설계자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세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1초. 2초. 엔터 키를 눌렀다.
서버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설계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금빛 실이 흔들리더니 한 가닥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에너지 흡수가 멈췄다. 하은의 타투가 진정되며 빛이 서서히 줄었다.
"뭘 한 거지."
설계자가 중얼거렸다. 재하의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세진의 모니터에 서버 붕괴 경고가 연쇄적으로 떴다. 빨간 경고창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준혁의 영혼 데이터가 바이러스처럼 서버 곳곳에 침투하며 레테의 강을 안에서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하은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차갑던 손끝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외장 하드를 주머니에서 꺼내 세진에게 던졌다. 세진이 한 손으로 받아 노트북 옆에 놓았다.
복도의 비상등이 하나 깜빡이더니 다시 켜졌다. 주황색 불빛이 길고 좁은 통로를 물들였다. 설계자가 벽에 등을 기댔다. 재하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금빛 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은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하의 이마. 재하의 광대뼈. 재하의 턱선. 이 얼굴을 되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죽는 것도, 원수를 죽이는 것도 아닌, 원수 스스로가 선택한 소멸이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왼손이 허공에 남았다. 하은은 그 손을 귀 뒤로 가져갔다. 타투를 세 번 문질렀다.
세진의 화면에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 이 몸에 남은 건 재하의 것이다. 돌려줘라. ]
준혁의 식별 코드가 서버 로그에서 영구 삭제되었다.
설계자가 비명을 질렀다. 재하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음역의 비명이었다. 금빛 실이 전부 끊어지며 그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하은이 두 팔로 그 몸을 받았다. 무겁고 뜨거웠다. 재하의 체온이 느껴지는 동시에 맥박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세진, 바이탈."
"심박 140. 급속 하강 중. 뇌파가… 두 개야."
세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설계자의 파장이 소멸 중이고 그 아래서 다른 파장이 올라오고 있어."
하은의 팔 안에서 남자의 눈꺼풀이 떨렸다. 금빛은 사라졌다. 대신 하은이 수천 번 보았던 맑은 갈색이 동공 위로 떠올랐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하은은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재하야."
남자의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오른손잡이. 하은의 소매를 잡으려는 듯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세진이 고개를 돌렸다. 하은도 올려다보았다.
군화 소리. 여섯 켤레 이상의 발소리가 정확한 간격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오민준이 방탄조끼 위에 영혼관리국 휘장을 달고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무장 요원들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총구가 하은과 세진, 그리고 하은의 품에 안긴 남자에게 일제히 겨누어졌다.
오민준이 멈춰 섰다. 주황색 비상등 아래서 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훑었다.
"서버 붕괴 원인을 추적하니 여기로 오게 됐군."
장갑 낀 손으로 턱을 짚었다.
"서하은 기자. 그 팔에 안긴 육체는 영혼관리국의 등록 자산이야. 지금 즉시 인도해."
하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의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맥박은 느려졌지만 아직 뛰고 있었다.
세진이 소리 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케이블을 뽑았다.
오민준이 한 발 다가왔다.
"협조하면 편하게 끝나. 저항하면—"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오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귀 뒤에서 타투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청색이 아니었다. 준혁의 바이러스가 서버를 삼킨 여파인지 금과 푸른색이 뒤엉킨 빛이 흘러나왔다.
오민준의 발이 멈췄다.
하은의 품 안에서 재하의 입이 열렸고, 거친 숨 사이로 첫 번째 음절이 새어 나왔다.
"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