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최하층의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석벽 틈으로 스며든 지하수가 바닥에 얇은 막을 이루고, 하은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천장까지 퍼져 돌아왔다.
재하의 양쪽 눈동자가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든 채 폭주를 시작한 순간, K가 하은의 손목을 잡고 이곳까지 끌어왔다. 삼십 분 전의 일이다. 석조 벽면에는 고대 문양과 현대 회로도가 기괴하게 겹쳐 새겨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K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기보다는 벽에 기대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설명해."
하은의 목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K의 오른손 끝에서 희미한 청색 입자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모래성이 바람에 깎이듯 손가락 마디의 윤곽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네 아버지는 죽기 전에 나를 만들었어."
K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하은이 어릴 적 기억하는 아버지의 것과 완전히 같은 짙은 갈색이었다. 하은의 손가락이 주머니 속 외장 하드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세진이 목숨값으로 건넨 그 하드. 금속 표면의 흠집이 엄지 끝에 걸렸다.
"만들었다니."
"기억과 정수. 영혼의 설계도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K가 벽에서 등을 뗐다. 한 발짝 앞으로 나오는 동작에 그의 왼쪽 팔뚝이 완전히 투명해졌다가 돌아왔다. "서정환 박사는 그림자 이사회가 자신을 제거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보험을 들었지. 자기 의식의 복제본을 영적 프레임에 주입해서."
하은의 시선이 K의 투명해지는 팔뚝과 제자리로 돌아오는 팔뚝 사이를 오갔다. 귀 뒤의 표식이 미세하게 열을 냈다. 손끝으로 만지자 타투 위에 얇은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아버지가 아니라."
"영적 안드로이드." K가 그 단어를 덤덤하게 내뱉었다. "위원회의 통제를 벗어나도록 설계됐어. 오직 한 가지 목적, 너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하은이 외장 하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금속 케이스에 반사된 K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세진이 이 안에 담아둔 소울코인 거래 내역, 프로젝트 라자로의 원본 데이터. 하은은 하드를 K에게 내밀었다.
"이 안에 아버지의 원본 데이터도 있어?"
K가 하드를 받아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속이 빈 것처럼 울리는 둔탁한 소리.
"원본은 여기 있어. 이 프레임 자체가 저장 매체야." 그가 하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 프레임이 소멸하면 시스템도 멈춰."
하은의 손이 외장 하드를 쥔 채 멈췄다. 돌벽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무슨 소리야."
"영종도 클리닉의 뇌파 동기화 시스템은 내 프레임을 중계기로 쓰고 있어. 이사회가 그걸 모르는 거지. 네 아버지가 시스템 설계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백도어로 심어놓은 거야."
K의 오른쪽 어깨가 완전히 투명해졌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석벽의 문양이 그대로 비쳤다.
"그래서 당신이 사라지면." 하은의 목소리가 반음 올라갔다. 목덜미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영혼 전이 시스템 전체가."
"멈춰." K가 말을 끊으며 웃었다.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고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가는, 하은이 열네 살까지 매일 봤던 그 웃음.
하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등이 젖은 석벽에 닿았다. 차가운 물기가 재킷을 적셨지만 그걸 느낄 여유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없어." K가 단정했다. 투명해진 어깨 아래로 쇄골선까지 사라지고 있었다. "하은아, 진짜 아버지는 이미 네 안에 살아있어. 난 그저 거울일 뿐이야."
그 말에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세 번 문질렀다. 습관이었다. 누군가 아버지를 언급할 때, 재하의 이름이 나올 때, 그리고 지금처럼 버틸 수 없을 때.
"거울은 깨져도 되는 거냐고." 하은이 이를 악물었다. 턱 관절이 뻐근하게 눌렸다.
K가 남은 한쪽 팔을 들어 하은의 머리 위에 얹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있었다. 영적 안드로이드라면서, 데이터의 집합체라면서, 이 온기는 뭔가. 하은의 두피를 통해 전해지는 열감이 관자놀이까지 번졌다.
"네가 선택해야 해." K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재하의 몸 안에 갇힌 강준혁, 이사회의 전이 시스템, 그 모든 걸 끊으려면 나 하나를 놓아줘야 해."
하은이 K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처럼 느껴지는 파동이 있었다. 영혼 파장의 진동. 하은의 능력이 그것을 읽었다. K의 파장은 아버지의 것과 98퍼센트 일치했고, 나머지 2퍼센트는 하은 자신의 것이었다.
"알고 있었어?" 하은이 물었다. "내 파장이 당신 안에도 있다는 거."
"네 아버지가 딸의 파장을 기반으로 나를 조율했으니까." K가 하은의 손을 내려놓았다.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그래서 네 목소리에만 반응하는 거야. 이사회도, 관리국도, 오민준도 나를 찾지 못한 이유."
바닥의 물이 찰랑거렸다. K의 발밑에서 청색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벽면의 문양들이 하나둘 빛을 내며 연쇄적으로 활성화됐다. 유적지 전체가 낮게 울렸다. 공명이 지하수를 타고 하은의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시간이 없어." K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칩을 꺼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 반투명한 표면에 미세한 회로가 빛의 실처럼 박혀 있었다. "이건 내 프레임의 핵심 코어야. 소멸해도 이것만은 남아."
하은이 칩을 받아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칩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외장 하드보다 가볍고, 외장 하드보다 뜨거웠다.
"이걸로 뭘 하라고."
"네가 알게 될 거야." K의 몸이 허리 아래부터 빠르게 투명해지고 있었다. 청색 입자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각성이 완료되면."
하은이 외장 하드를 왼손에, 칩을 오른손에 쥐고 K를 바라봤다. K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 코끝의 작은 점, 왼쪽 눈썹 위의 흉터, 웃을 때 드러나는 비뚤어진 송곳니까지.
"가지 마."
그 두 글자가 입 밖으로 나왔을 때, 하은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삼킨 침이 면도날처럼 식도를 긁었다. 울지 않겠다고, 재하의 장례식 이후 한 번도 타인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눈꺼풀 안쪽에 열감이 차올랐다.
K가 입을 열었다. 남아있는 입술이 움직였다.
"세진이에게 외장 하드를 맡겨. 거래 내역을 공개하면 이사회의 자금줄이 끊겨."
그 말이 끝나기 전에 K의 턱선이 흐려졌다. 마지막 음절이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하은의 귀 뒤 타투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재하. 목소리. 열쇠. 단어들이 타투의 열기를 타고 두개골 안쪽에 직접 새겨지듯 밀려들었다. K가 전하지 못한 나머지가 데이터로 변환되어 하은의 표식 속에 각인되는 감각. 영혼 공명을 의도적으로 쓸 수 있게 되면 레테 없이도 재하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 그 앎이 언어가 아닌 확신의 형태로 하은의 내부에 자리잡았다.
유적지의 울림이 거세졌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하은의 재킷 어깨 위에 회색 먼지가 쌓였다.
K의 얼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마부터. 눈썹이 지워지고, 눈이 지워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입이었다.
"잘 살아."
그리고 K가 없었다.
청색 입자들이 하은의 주변을 맴돌았다. 수천 개의 작은 빛이 유적지의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떠다녔다. 하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의 칩이 점점 뜨거워졌다.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 살을 눌러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손을 펴지 않았다.
물방울 소리. 자기 숨소리. 그리고 칩의 진동.
하은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젖은 바닥이 청바지를 적셨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았다. 왼손의 외장 하드를 바닥에 내려놓고, 오른손의 칩을 가슴 앞에 모았다. 두 손으로 감쌌다. 칩의 열기가 양 손바닥 사이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은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등골을 따라 차가운 줄기가 허리까지 내려갔다. 하은이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칩의 진동이 달라졌다. 규칙적이던 리듬이 빨라지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하은의 귀 뒤 타투가 타올랐다. 열이 아니었다. 빛이었다. 푸른빛이 귀 뒤에서 시작해 목덜미를 감싸고, 어깨를 넘어 등 전체로 퍼졌다.
하은이 비명을 삼켰다. 이를 악물었다. 등 전체에 무언가가 새겨지는 감각. 바늘 수만 개가 동시에 피부를 뚫는 것 같았다. 손에서 칩이 녹아내렸다. 금속이 아니라 빛으로 변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귀 뒤의 관찰자 표식이 칩의 데이터를 흡수하며 맥동했다.
등이 뜨거웠다. 견갑골 사이에서 무언가가 밀려 나오는 압력. 하은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양손이 젖은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갈라졌다.
빛이 터졌다.
유적지 최하층 전체가 청색으로 물들었다. 벽면의 문양들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하은의 등에서 푸른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수백 가닥의 빛줄기가 견갑골 사이를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 공간을 잠식했다. 실들이 석벽에 닿자 고대 문양의 홈을 따라 흘러들었고, 천장의 균열을 기어오르고, 바닥의 물 위를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유적지의 어둠이 푸른 실의 그물 안에서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실들이 뻗어나갈 때마다 유적지의 지하수가 동심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하은의 주변 반경 3미터가 마른 바닥으로 드러났다. 돌바닥의 균열 사이에 박힌 이끼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달랐다. 석벽 너머, 유적지 위층의 구조물이 투시되듯 보였다. 그 너머에 지상의 건물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겹쳐졌다. 한남동 방향에서 흘러오는 수십 개의 영혼 파장이 색색의 실타래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유독 선명했다. 익숙한 파장. 재하의 것이면서 재하의 것이 아닌, 두 겹으로 겹쳐진 파장.
하은이 일어섰다. 무릎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등에서 뻗어 나온 푸른 실들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밀리며 석벽의 먼지가 날렸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외장 하드를 집어 들었다. 금속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눈동자가 아버지와 같은 짙은 갈색에서 표식과 같은 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유적지 입구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군화 특유의 규칙적인 박자. 하은의 새로운 시야가 벽 너머를 읽었다. 검은 전술복, 목덜미의 바코드 문신, 손에 쥔 전자기 억제 장치.
영혼관리국이었다.
선두에 선 남자의 얼굴이 벽 너머로 투과되어 보였다. 오민준. 그가 무전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표식 반응 확인. 대상은 완전 각성 상태. 코드 블랙 발령한다."
하은의 등에서 뻗어 나온 푸른 실들이 일제히 떨리자, 유적지 벽면의 균열이 갈라지며 돌가루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