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에서 철제 문이 찢겨 나갔다.
재하는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균열이 만져졌고, 귓속에서는 아직 하은의 목소리가 잔향처럼 울리고 있었다. 지하 심장부로 내려간 그녀의 발소리가 사라진 지 채 삼 분이 되지 않았다.
위원회의 요원 셋이 복도를 채웠다. 검은 전술복. 목덜미에 부착된 영혼 추적기의 붉은 점등이 어둠 속에서 맥박처럼 깜빡였다. 선두에 선 남자가 억제총을 들어 올렸고, 총구 아래로 레테 고농축 탄환이 장전된 것이 보였다.
"윤재하 개체, 확보 명령이 내려졌다."
재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파란 봉투가 구겨졌다. 세 번째 서랍에서 꺼낸 것. 봉투 안에는 내부 고발자의 실명이 적힌 메모지, 소울코인 거래 내역의 복호화 키가 접혀 있었다. 하은에게 전해야 할 것.
재하는 봉투를 허리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확보는 무슨."
첫 번째 요원이 방아쇠를 당겼다. 재하가 몸을 비틀어 벽 모서리 뒤로 숨는 동시에 억제탄이 콘크리트를 갈아 먹으며 흰 가루를 뿜었다. 파편이 뺨을 스쳤다. 따끔한 감각 사이로, 목덜미 깊은 곳에서 낯선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강준혁의 기억.
격투 훈련장의 매트 냄새. 관절을 꺾는 각도. 상대의 호흡 사이 빈틈을 읽는 감각. 재하의 것이 아닌 근육 기억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재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는 이 기억들을 밀어냈다. 역류할 때마다 구역질이 났고,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폭력성이 손끝에서 맥동할 때마다 손톱이 살갗을 팔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하은이 지하에 있다.
위원회가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심장부도 안전하지 않다.
두 번째 억제탄이 날아왔다. 재하는 벽 모서리를 차며 복도 반대편으로 몸을 던졌다. 착지하는 순간 무릎이 꺾이려 했지만, 강준혁의 기억이 자동으로 체중을 분산시켰다. 낮은 자세에서 미끄러지듯 선두 요원의 다리를 걷어찼다. 요원이 넘어지며 억제총을 놓쳤고, 재하의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총구를 천장으로 향한 채 나머지 둘을 노려보았다.
요원들이 멈칫했다. 재하의 눈동자가 갈색에서 잠깐 금빛 테두리를 머금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물러나."
목소리가 반음 낮았다. 재하 자신의 것인지 준혁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요원들은 시선을 교환한 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후퇴가 아니었다. 증원을 기다리는 간격.
재하는 억제총을 분해했다. 탄창에서 레테 고농축 탄환 네 발을 빼냈다. 손가락 사이에 놓인 투명한 캡슐 속, 은빛 액체가 출렁였다.
레테.
일반 투여용이 아니었다. 전투용 고농축. 한 발이면 전이된 영혼의 의식을 완전히 억누르고, 육체의 본래 주인도 함께 잠재울 수 있는 농도.
재하는 정세진이 남긴 데이터 파일의 마지막 항목을 떠올렸다. '레테의 눈물 — 역주입 프로토콜. 경고: 본래 영혼이 전이 영혼의 기억을 자발적으로 수용할 경우, 일시적으로 양쪽 영혼의 능력이 융합됨. 단, 자아 경계 붕괴 확률 78%. 비가역적 변이 가능성 있음.'
78퍼센트.
복도 끝에서 철제 부츠 소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셋이 아니라 열. 아니, 그 이상.
재하는 탄환 하나를 손톱으로 깨뜨렸다.
은빛 액체가 손바닥 위에 고였다. 차가웠다. 영하의 온도. 피부 위에서 서리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재하 씨, 안 돼요! 뇌파가 겹치고 있어요!"
통신기 너머로 정세진의 목소리가 터졌다.
"세진 씨, 심장부 쪽 증원 규모 파악 가능해?"
잠깐의 침묵. 키보드 치는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열두 명… 아니, 열다섯. B3층과 B5층에 각각 분산 배치. 하은 선배가 있는 곳으로 수렴 중이에요."
손바닥 위의 은빛 액체가 체온에 녹아 피부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재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아직 혈관까지 도달하지 않은 상태. 닦아내면 돌이킬 수 있다.
"세진 씨."
"네."
"파란 봉투, 내 허리춤에 있어. 내가 못 돌아오면 하은에게 전해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정세진의 손이 카타콤의 콘솔 위에서 멈추었다. 화면에 재하의 뇌파 그래프가 떠 있었다. 두 개의 파형 — 재하의 알파파와 강준혁의 베타파 — 이 서서히 겹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비상 프로토콜 매뉴얼을 뒤졌다. 손끝이 페이지를 찢을 듯 넘겼다.
"융합 이후 자아를 유지한 사례가 있긴 해요. 단 한 건. 2014년 실험체 09번."
"결과는?"
"… 삼 일간 의식 유지 후 식물인간."
재하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재하 특유의 웃음.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를 걷었다. 팔 안쪽 정맥이 드러났다.
하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마다 음성 메시지를 재생하며 이불을 움켜쥐던 그녀. 커피를 반드시 블랙으로만 마시던 그녀. 약속 장소에 삼십 분 먼저 도착해 주변을 살피던 그녀. 돌아서면서 왼손으로 귀 뒤 타투를 세 번 문지르던 버릇.
재하는 남은 탄환 세 발을 모두 깨뜨렸다.
은빛 액체가 정맥을 타고 올라갔다. 팔뚝의 혈관이 은빛으로 물들며 피부 위로 떠올랐다. 차가움이 아니라 열이었다. 뼛속까지 태우는 열.
강준혁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졌다.
어린 시절의 저택. 아버지에게 맞던 밤. 처음 사람을 죽인 골목의 빗소리. 피가 묻은 손을 씻던 세면대의 흰 도자기. 재하는 이를 악물고 그 기억들 사이를 걸었다. 밀어내지 않았다. 받아들였다.
격투 기술. 인체의 급소를 꿰뚫는 지식. 통증을 무시하는 법. 공포를 연료로 바꾸는 감각.
동시에 재하 자신의 기억이 닻이 되었다.
수술대 위에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던 손의 감촉. 하은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시트러스 향. 프러포즈하던 날 반지 상자를 떨어뜨렸던 바보 같은 순간.
두 기억이 뒤엉켰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재하의 몸에서 미세한 진동이 퍼져 나갔고, 콘크리트 벽에 실금이 갈렸다.
"기억이 없어도 괜찮아."
재하가 중얼거렸다. 눈을 떴다. 왼쪽 눈이 갈색이었고, 오른쪽 눈이 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건 세포가 기억하니까."
통신기 너머에서 정세진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 떠오른 뇌파 그래프. 두 개의 파형이 완전히 겹쳐 하나가 되었다. 그 단일 파형이 기존의 어떤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는 제3의 형태로 변이하고 있었다.
정세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달렸다.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뒤졌다. 일치하는 사례는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파일을 열어 기록하기 시작했다. 두 영혼의 융합이 만들어낸, 기록되지 않은 변종 에너지.
재하가 걸었다.
복도를 채운 요원 열다섯 명이 일제히 억제총을 겨누었다. 재하는 멈추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세 발째에 선두 요원이 방아쇠를 당겼다.
레테 탄환이 재하의 어깨를 스쳤다. 은빛 액체가 튀었지만, 재하의 혈관 속 레테와 반응하며 공중에서 증발해버렸다. 이미 그의 몸은 레테로 포화 상태였다. 외부 투여가 의미를 잃은 육체.
재하의 오른손이 선두 요원의 억제총을 잡아 비틀었다. 강준혁의 관절 기술이었지만 힘의 조절은 재하의 것이었다. 부러뜨리지 않았다. 손목을 꺾어 무장만 해제했다. 두 번째 요원이 달려들었고, 재하는 어깨를 축으로 회전하며 요원의 무게를 이용해 세 번째 요원 위로 던졌다.
세 교환. 끝.
나머지 열두 명이 후퇴했다. 재하의 이질적인 눈동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 주위로 희미한 파동이 번지고 있었다. 공기가 일렁이는 것처럼. 아지랑이처럼.
재하는 숨을 내쉬었다. 손이 떨렸다. 강준혁의 기억 속 폭력성이 이빨을 드러내며 올라왔다가, 하은의 웃는 얼굴이 그것을 눌렀다.
아슬아슬한 균형.
허리춤의 파란 봉투가 체온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재하는 그것을 한 번 눌러 확인한 뒤 계단을 향해 걸었다. B5층. 하은이 있는 곳.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가 달라졌다. 습도가 높아지고, 형광등 대신 비상등의 붉은 빛만이 벽을 물들였다. 재하의 그림자가 두 개로 갈라졌다. 하나는 재하의 것. 하나는 강준혁의 체형을 닮은 것. 벽에 비친 두 그림자가 계단을 내려갈수록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B4층을 지날 때, 재하의 오른쪽 금색 눈이 번쩍 빛났다.
시야가 이중으로 갈렸다. 왼쪽 눈으로는 붉은 비상등 아래의 계단이 보였고, 오른쪽 눈으로는 영혼의 파장이 보였다. 하은의 능력과 유사하되 다른 형태. 준혁의 영혼이 가지고 있던 잔여 감각이 레테의 과포화 속에서 변이한 것인지, 벽 너머 요원들의 위치가 열화상처럼 붉게 떠올랐다.
B5층 철문 앞에 섰다.
문 너머에서 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재하의 왼쪽 갈색 눈에 수분이 고였다. 오른쪽 금색 눈은 건조하게 빛났다.
두 눈이 동시에 철문을 응시했다.
재하가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양쪽 눈에서 동시에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갈색과 금색이 섞인 나선형의 빛이 철문을 관통하며 경첩째 날려버렸다. 폭음이 복도를 흔들었다. 분진 사이로 재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은이 고개를 돌렸다.
재하의 얼굴이었다. 재하의 체형이었다. 왼쪽 눈은 그녀가 사랑했던 따뜻한 갈색이고, 오른쪽 눈은 그녀가 증오했던 차가운 금색이었다. 두 색이 홍채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번갈아 지배권을 다투는 것이 맨눈으로도 보였다.
재하의 몸 주위로 파동이 확산되었다. 비상등이 터졌다. 유리 파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은의 귀 뒤 타투가 푸르게 반응했다. 영혼 공명. 이번에는 달랐다. 공명의 주파수가 둘이었다. 재하의 것과 준혁의 것이 뒤엉킨, 들어본 적 없는 이중 주파수.
재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두 사람의 음색이 겹쳐 울렸다.
"하은아, 뒤로."
하은이 한 발 물러서는 순간, 재하의 오른쪽 금색 눈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나와 천장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