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 또각, 또각. 하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남동 유엔빌리지 깊숙한 곳, '안식의 집'이라 불리는 저택의 내부는 예상과 달랐다. 병원 같은 무균질의 공간을 떠올렸는데, 실제로는 19세기 유럽 저택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유화들, 천장에서 내려오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바닥에 깔린 페르시아 카펫.
"이쪽입니다."
준혁이 앞서 걸었다. 재하의 등. 재하의 어깨 너비. 재하의 걸음걸이와는 미세하게 다른 보폭. 하은은 그 차이를 기록하듯 눈에 새기며 뒤를 따랐다.
"서재를 먼저 보여드릴게요. 적응 훈련 대부분이 거기서 이루어지니까."
하은은 고개만 끄덕였다. 핸드백 안쪽에 넣어둔 초소형 카메라의 무게가 손목에 걸렸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단 하나. 영혼 전이의 물증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액자 사이사이로 CCTV 렌즈가 보였다. 하은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위치를 셌다. 복도 끝까지 일곱 개. 사각지대는 서재 입구 왼편 기둥 뒤 하나뿐.
"커피 드릴까요?"
"블랙으로."
준혁이 서재 문을 열었다. 오크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천장까지 닿는 책장 네 면, 가운데 놓인 가죽 소파, 그리고 창가에 붙은 낡은 책상 하나. 하은의 시선이 그 책상 위에서 멈췄다.
시집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표지가 닳아 실밥이 드러난 윤동주 시집. 하은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 있었다. 저 시집을 안다. 재하가 대학 시절부터 들고 다니던 것이다. 밑줄 친 페이지마다 연필로 메모를 남기던 버릇까지 기억났다.
"그 책이 왜 여기에 있죠?"
목소리가 의도보다 낮게 깔렸다. 준혁이 커피잔 두 개를 들고 돌아서며 시집을 바라봤다. 잠깐의 공백.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전이할 때 같이 딸려온 것 같습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겠죠."
하은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시집을 집어들었다. 종이에서 올라오는 냄새. 오래된 잉크와 손때가 섞인 냄새. 재하의 방에서 맡던 것과 같았다. 펼쳐진 페이지에 연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재하의 필체. 둥글둥글하면서도 끝이 삐죽한 그 글씨.
"이 시 구절, 재하 씨가 가장 좋아하던 문장이에요. 당신은 읽을 자격 없어."
하은은 시집을 덮으며 말했다.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준혁이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에 울렸다.
"자격이요." 그가 되뇌듯 말했다. "그런 건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겠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조. 하은은 그 목소리에서 재하의 흔적을 찾으려다 스스로 멈췄다. 찾아서 뭘 할 건데. 손가락이 귀 뒤 타투 쪽으로 향하려는 것을 의식하고 주먹을 쥐었다.
"적응 훈련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요?"
화제를 돌렸다. 준혁이 소파에 앉으며 왼쪽 팔소매를 걷었다. 팔뚝 안쪽에 레테 주사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멍이 들어 누렇게 변한 피부 위로 새 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기억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 몸에 남아있는 감정들이 불쑥 올라올 때, 그걸 밀어내는 훈련이요."
"감정이라니. 구체적으로?"
준혁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엔빌리지 너머로 남산타워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이 몸이 울려고 했습니다."
하은의 손가락이 시집 표지를 움켜쥐었다. 닳은 천 표지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 몸이요. 제가 아니라."
그 구분을 짓는 목소리에서 하은은 미세한 균열을 감지했다. 준혁은 '이 몸'과 '자신'을 분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함께 읽혔다.
하은은 커피잔을 들었다. 검은 액체 표면에 샹들리에 빛이 일렁였다.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 위에 퍼지는 동안, 서재 구석에 놓인 철제 캐비닛이 눈에 들어왔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열쇠 구멍 주변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자주 여닫는다는 뜻이었다.
"저기에는 뭐가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제 관할이 아닌 구역이에요."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은은 캐비닛의 위치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상처 좀 보여주세요."
하은이 말했다. 준혁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적응 훈련을 돕는 척 감시하러 온 거잖아요, 저는. 그래도 감시 대상이 멍투성이면 곤란하니까."
솔직한 말이었다. 준혁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재하라면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 사람은 웃음을 삼킨다.
준혁이 소매를 더 걷어올렸다. 주사 자국 외에도 팔꿈치 안쪽에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얕지만 제대로 소독하지 않아 가장자리가 붉게 부어 있었다.
하은은 핸드백에서 소독 티슈와 밴드를 꺼냈다.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기자 시절 취재 현장에서 다치는 일이 잦았기에 습관처럼 챙기게 된 물건.
준혁의 팔을 잡았다. 재하의 팔. 재하보다 체온이 낮았다. 소독 티슈로 상처 주변을 닦아내는 동안 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알코올 냄새가 오크나무 향을 밀어냈다.
"아프면 말해요."
"안 아픕니다."
하은은 상처 가장자리를 꼼꼼하게 닦았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피부의 결. 재하에게 밴드를 붙여줬던 수많은 밤들이 떠올랐다. 자전거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요리하다 칼에 베었을 때, 취재 중 유리에 긁혔을 때.
그때마다 재하는 말했다. 안 아프다고. 똑같은 말을 하는 다른 사람의 팔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준혁의 손이 움직였다.
하은의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 귀 뒤로 넘겼다. 재하가 늘 하던 동작. 검지와 중지 사이로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까지 쓸어올리는, 그 정확한 각도와 힘의 세기.
하은의 손이 멈췄다.
소독 티슈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면 재하의 얼굴이 있을 것이고, 재하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고, 그 눈 안에 재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핏기 도는 살점의 질감이 이 사이에 걸렸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 커튼이 흔들렸고, 서재 안으로 들어온 밤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시집의 닳은 표지가 테이블 위에서 빛을 받아 윤이 났다. 재하가 수백 번 넘긴 페이지들. 재하가 연필을 쥐고 밑줄을 긋던 손. 그 손과 같은 모양의 손이 방금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하은은 눈을 감지 않았다.
준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손가락을 펴고, 접고, 다시 폈다.
"지금… 제가."
"알아요."
하은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반음 올라간 것을 스스로 알았다. 통제에 실패하고 있었다.
"기억 역류예요. 레테 맞을 시간 됐으면 맞아요."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무겁게.
"시간이 아직 안 됐습니다. 두 시간 남았어요."
하은은 밴드를 붙이고 그의 팔을 놓았다. 거리를 벌리며 소파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려 했지만 잔이 비어 있었다.
"서재 탐색 좀 해도 될까요? 적응 훈련이라면서, 이 공간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구실이었다. 준혁도 알 것이다. 그래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보세요."
하은은 책장 사이를 걸었다. 손끝으로 책 등을 훑으며 제목들을 읽었다. 의학서, 뇌과학 논문집, 심리학 교재. 그 사이에 꽂힌 파란 표지의 노트가 손에 걸렸다. 빼냈다.
'프로젝트 라자로 — 초기 연구 일지 (비공개)'
하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표지를 넘겼다. 필기체로 빼곡히 적힌 내용 중 첫 줄이 눈에 박혔다.
'영혼 전이 후 원래 주인의 자아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사례 17건 확인.'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하은은 페이지를 넘겼다. 뒤를 돌아봤다. 준혁은 소파에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시선이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하은은 노트의 주요 페이지를 핸드백 안쪽 카메라 앞으로 기울여 세 장을 촬영했다.
노트를 원래 자리에 꽂으려는데, 준혁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가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이를 악물고, 목 근육이 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강준혁 씨."
하은이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열이 올라야 할 피부가 차가웠다. 목덜미에 손이 닿는 순간 싸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체온이 아니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금속을 만지는 것 같은 이질적인 냉기.
준혁의 눈이 벌어졌다. 동공이 풀려 있었다가 급격하게 수축했다. 초점이 하은의 얼굴에 맞춰지는 순간, 그의 손이 하은의 손목을 잡았다.
재하의 손. 재하의 악력. 하지만 재하보다 훨씬 절박한 힘.
입술이 움직였다. 나오는 목소리는 준혁의 것이 아니었다.
낮고, 갈라지고, 익숙한 음색.
"도망쳐."